바보처럼 살아온 기자의 길
전북 익산의 농촌 마을에서 태어났다. 학창시절 섬마을 국어선생님을 꿈꾸었고, 대학에서도 국어교육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옷깃에 참교육 배지를 달고 야학에서 국어와 역사를 가르쳤으나, 경직되고 수동적인 교직 생활보다 능동적인 삶을 원해 진로를 수정했다.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의지를 갖고 언론계에 투신, 물류 전문지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했고 <중앙일보> 경제주간지를 거쳐 <시사저널>에 입사했다.
시사저널에서 사회팀 기자, 사회팀장, 사회전문기자, 탐사보도팀장으로 활동하는 동안 군 의문사, 연쇄살인 등 각종 강력사건 현장을 누벼 ‘수사반장’으로 불렸다.
기자생활 중 대부분을 크고 작은 사건들과 함께했고 많은 사건 현장을 취재했다. 단순히 취재하는데 머물지 않고 올바른 약자 편에서서 악의 무리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기자직’ 걸고 국가권력에 맞서다
잘못된 국책건설사업으로 삶의 터전을 잃을 뻔했던 충남 연기군 동면 명학리(현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명학리) 주민들의 생존권을 지켜주기 위해 ‘기자직’을 걸고 정부와 싸웠다. 이 과정에서 이권에 개입한 국회의원 등 정치인, 경찰, 지역 공무원 등의 비리를 폭로했다.
2년 넘게 엉터리 국책건설사업의 비리를 지속적으로 파헤쳐 대통령이 ‘완전백지화, 전면재검토’를 선언했다. 국내에서 이미 결정된 국책건설사업이 완전히 뒤집힌 최초의 사례다. 이로써 약 5000명 주민들의 삶의 터전도 지켜줬다. 한 이름없는 전문지 기자가 국가권력과 정치권력 등에 맞서 계란으로 바위를 깨트린 것이다.

주민들은 가을 추수가 끝나자 십시일반 쌀을 모아 내가 재직했던 언론사로 보내왔다. 나는 이것으로 떡을 빼서 직원들과 함께 나눠 먹었다. 주민들은 또 나를 위해 마을잔치를 벌이고 “생존권을 되찾아줘서 고맙다”며 감사패를 줬다. 충청북도는 “올곧은 취재로 도민들의 숙원을 풀었다”며 도민을 대표해 이원종 도지사가 감사패를 수여했다.
거대 범죄 조직과 3년 전쟁
나는 얼마 후 조폭이 낀 거대 사기조직과 3년간 전쟁을 벌인다. 그들은 법의 사각지대에서 서민들의 피를 빠는 비열한 범죄조직이었다. 피해자는 내 가족, 내 이웃, 가난한 민초들이었다. 이들은 사기를 당한 후 신용불량자가 되고, 빚더미에 올라앉아 거리를 떠도는 신세로 전락했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피해자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나는 사기조직에 전쟁을 선포한 후 홀로 싸우기 시작했다. 이때의 심정은 “칼을 맞거나 수갑을 차거나 둘 중의 하나는 각오해야겠구나”라고 생각하며 목숨을 걸었다. 그만큼 위험한 싸움이었다. 거의 매일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에 시달렸으나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추적의 강도는 더욱 세지고 집요했고, 사기조직을 하나씩 격파해 나갔다.
인터넷 사이트를 개설해 66개의 사기조직, 사기두목과 조직원 253명의 실명을 공개하며 베일에 가려졌던 사기조직의 실체를 만천하에 폭로했다. ‘모든 죄는 법원에서 결정한다’는 이른바 죄형법정주의를 어긴 것이다. 이로 인해 고소를 당하면서 경찰, 검찰, 법원을 오고가는 신세가 됐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 명의 피해자라도 막기 위해 3개월간 서울과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 생활정보지에 “사기 조심하라”는 광고를 게재하는 승부수를 두기도 했다.




결국 사기조직들은 “정락인을 가만두면 안 되겠다”고 판단한다. 협박과 회유가 통하지 않자 위해를 가하려고 했다. 회사로 조폭들이 찾아왔다.
대학원 재학시절에는 야간에 중앙대 정문앞에서 조폭들이 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마침 그날은 학교에 가지 않으면서 위기를 모면했다. 내가 나오지 않자 그들은 ‘학교에서 노숙하냐 쌍넘아 빨오라고 죽아버려’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이 사건으로 나는 조폭들에게 칼을 맞지는 않았지만 재판에서 벌금형을 선고받고 전과자가 된다. 경찰과 검찰 등 수사기관은 서민들 죽이는 사기조직을 나몰라라 하며 사실상 방치했다. 국가 대신 나는 목숨 걸고 그들과 홀로 싸웠다. 그런데도 나는 수사기관에 불려다니며 죄인 취급을 당했고, 국가는 법원을 통해 ‘전과자’라는 훈장을 줬다.
내가 수사와 판결이 부당하다며 벌금을 내지 않고 버텼더니, 국가기관은 나를 지명수배하고 검거전담반까지 편성해서 추적중이라고 통보했다.

반면 언론에서는 내가 벌이고 있는 사기조직과의 전쟁을 잇따라 조명했다. MBC 손석희의 시선집중 ‘지입차량 사기조직과 전쟁 벌이는 기자’, 월간 말 ‘바보 기자 정락인의 외로운 투쟁’, 한겨레 ‘지입차량 사기와의 전쟁…바보 기자를 고발합니다’ 등.

이때부터 나는 언론계에서 ‘바보 기자’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대표적 언론시민단체인 민주언론시민연합의 제5회 민주시민언론상(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공공임대아파트 부도 배후세력 최초 폭로
어느 날 전남 광양에 사는 대학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얼마 전 서울에 살다 지방에 있는 신축 임대아파트에 입주해서 정착했다. 그런데 그 아파트가 부도가 나서 입주민들 모두 길바닥에 나앉게 생겼다며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당시는 전국에서 공공임대아파트가 연쇄 부도나면서 도미노 현상을 불러왔다. 피해자가 무려 15만 명에 달했다. 공공임대아파트는 서민주택문제해결을 위해 정부 주택기금으로 지은 아파트다.
대통령이 이 문제를 놓고 격노하고 심지어 TV시사프로그램에 나와 답답함을 토로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원인을 못 찾고 있었다.
그런데 내 친구가 공공임대아파트 부도 피해자가 된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나서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지만 친구의 거듭된 도움 요청을 모른채 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하루는 PC방에 가서 공공임대아파트 부도에 관한 내용을 검색했는데, 이상한 것이 포착됐다.
건설사가 아파트를 짓고 분양이 끝난 후 부도가 난 것이다. 나는 ‘분양이 끝났으면 돈을 벌었는데 왜 부도가 났지?’라는 의문을 갖고 관련 자료를 세심하게 검토했다. 분명 뭔가 이상했지만 정확한 원인이 파악되지는 않았다. 이 내용을 토대로 편집장에게 기획안을 냈더니 “지면은 얼마든지 줄테니 취재하라”는 것이다. 이때부터 사막에서 바늘 찾기와 같은 취재가 시작된다. 나는 ‘모자이크식 취재기법’을 활용했다.

곧바로 배낭에 짐을 챙기고 최대한 간편한 복장을 하고 광양에 내려갔다. 먼저 친구가 사는 아파트를 방문해 그곳부터 취재에 들어갔다. 이어 벌교-순천-천안-아산-군산 등 공공임대아파트 부도가 많은 지역을 찾아갔다. 그러면서 점점 모자이크 그림이 맞춰져 갔다. 그리고 부도 배후세력의 실체와 이들의 치밀한 부도수법을 밝혀내 폭로했다.
아울러 삼성그룹의 일부 계열사들이 공공임대아파트 수백채를 직원 사외 기숙사로 전용하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내가 쓴 기사가 나가자 방송 시사프로그램 등에서 연이어 취재에 들어갔고, 정부는 관련법을 만들어 피해자를 구제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내 친구를 비롯한 전국의 수많은 부도 임대아파트 피해자들이 집을 잃을 위기에서 벗어나 구제를 받을 수 있었다.
정치 권력 실세와 맞장 떠 완승
정치 권력과도 맞장을 텄다. 이명박 정부 초기 한 정치권 인사로부터 당시 한나라당 최고위원이자 서울시당 위원장인 A의원의 비리 제보를 받는다. 그는 “정 기자님 밖에 쓸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 같습니다”라며 내게 취재할 의향이 있냐고 물어봤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는 쓸 수 있다”고 말했고, 그때부터 은밀하게 취재가 시작됐다. 당시 A의원은 여당의 실세 정치인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사가 나가면 권력과의 싸움을 피할 수 없었다.
약 한 달간의 취재 끝에 나는 A의원의 비리와 여당 의원들의 커넥션을 단독으로 연속 보도했다. 기사가 나가자 야당은 내가 쓴 기사를 근거로 A의원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A의원도 기사를 쓴 나와 편집국장을 상대로 세 건의 민·형사 소송을 제기했다. 언론중재위원회에도 제소했으나 우리는 중재를 거부했다. 그러면서 나는 A의원에 대한 관련 기사를 연속으로 터트렸다. 이게 시사저널의 저력이자 강점이다.

검찰이 수사에 나서면서 A의원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고,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면서 의원직을 상실했다. 검찰은 A의원이 나와 편집국장을 상대로 제기했던 소송에 대해 ‘죄가 안 된다’며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나는 완승을 거뒀고, A의원은 완패를 당한 것이다.
기생 생식기와 백백교 교주 머리 70년 만에 폭로
일제강점기 명월관 기생(일명 명월이)의 생식기와 국내 최악의 사이비 종교였던 백백교 교주의 머리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지하 부검실에 있다는 것을 최초 폭로했다. 뒤이어 시민단체가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재판부는 70년 만에 폐기하라고 선고했다.
나와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혜문스님 등은 조선 여인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그녀의 실물 초상화를 찾아냈고, 실명이 ‘홍련’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아울러 경기도 남양주 봉선사에서 그녀의 원혼을 좋은 곳으로 인도하는 천도재를 지냈고, 내가 상주를 맡았다.

백백교 교주의 머리는 서울 시립승화원(벽제 화장장)에서 화장됐는데, 이때도 내가 상주 자격으로 참석했다. 이렇게 나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악의 사이비 종교 교주와 일제 강점기 피해자인 조선 여인 명월이의 상주가 됐다. 이로써 죽은 뒤 치욕적인 만행을 겪으며 구천을 떠돌던 명월이의 원혼도 편히 쉴 수 있었다.
비열한 전주 조폭들과의 싸움
또다시 조폭들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어느 날 전주에서 “서민들 다 죽어간다”며 다급한 제보 이메일과 전화가 왔다. 아파트 재건축 과정에서 조폭들이 관여해 건설을 좌지우지하며 횡포를 부리고 있고, 이로 인한 피해가 막대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얼마 후 전주 아파트 재건축 현장으로 출장 취재를 갔다. 폭력전과가 있는 조합장, 전주 최대 폭력조직의 행동대장급 출신의 업무대행사 대표, 그리고 이들의 배후에는 아파트 시공사인 대기업 건설사가 있었다. 나는 전주 재건축 아파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비리 복마전을 연이어 폭로했다. 조합장 등은 내가 쓴 기사를 가지고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했으나 조정불성립 결정이 나고 민사소송까지 제기했으나 ‘기사의 내용이 모두 사실이다’며 각하됐다.

내가 취재를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폭로와 추적이 이어지자 우리 가족을 들먹이며 협박을 시작하고, 심지어 내가 사는 아파트 앞에 한 달 동안 집회 신청을 하는 등 나를 압박하며 취재를 막으려고 했다. 나는 여기에 굴복하지 않고 계속해서 비리를 폭로했다. 결국 전주지검은 업무대행사 대표와 조합장을 ‘주택법 위반’과 ‘협박’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이로써 1년 반 동안의 싸움도 끝이 났다.
오원춘 거주지 소각로에서
사람 것으로 추정되는 뼈 최초 발견
수원에서 오원춘에 의한 토막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전국을 발칵 뒤집은 초대형 강력사건.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찰과 검찰은 강도 높은 수사에 나선다.
그렇다면 실제 살인이 일어난 현장은 어떨까. 경찰은 오원춘의 거주지 입구와 창문을 합판으로 봉쇄했다. 안을 들여다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수많은 방송사와 언론사 기자들이 현장을 찾았지만 대부분 문 앞에서 인증샷만 찍고 가는 정도였다. 관점의 차이를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인턴기자 두 명, 사진기자와 함께 취재차량을 타고 현장을 찾았다. 그날은 가랑비가 내리면서 현장은 더욱 음산했다. 인턴기자들에게 각자 취재지시를 내려 밖으로 내보냈다. 나는 팔을 걷어 부치고 사진기자와 함께 오원춘 거주지를 면밀하게 살폈다.

그러다 현장에서 소각로를 찾아내고 그 안에서 사람의 뼈로 추정되는 것을 발견한다. 내가 기사를 쓰자 온 세상이 발칵 뒤집힌다. 당시는 오원춘의 인육매매 의혹이 확산되고 있었는데, 여기에 기름을 붓고 불을 지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사건 뒤에는 무서운 음모가 숨겨져 있다.
10년 넘게 추적한 사상 최대의 군 의문사
군부대 안에서 일어난 사건은 취재가 까다롭고 어렵다. 군사 보호구역이라 현장 접근도 쉽지 않고, 군에서도 언론 접근을 전면 통제한다. 고도의 취재 기법이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기자들은 취재할 용기조차 내지 않는 실정이다.
‘연천 530GP 사건’은 사상 최대의 군(軍) 의문사로 불린다. 2005년 6월19일 경기도 연천 육군 제28사단에서 장교 1명, 병사 7명 등 8명이 사망한다. 국방부는 김동민 일병이 수류탄 한 발을 내무실에 투척하고, 소총으로 44발을 난사해 GP장을 비롯한 8명이 죽고, 4명이 부상당했다고 발표했다.
군 당국은 김 일병 단독범행으로 결론짓고 사건을 서둘러 마무리했다. 국방부 발표는 의문투성이였다. 나는 이 사건 추적에 들어갔다. 그리고 2007년 <시사저널> 10월23일자에 ‘연천 총기난사사건, 진실은 따로 있었다?-530 GP의 잠 못드는 영혼들’이라는 기획기사를 내보냈다.

이때부터 유족들과 함께 이 사건의 진실을 10년 넘게 추적했다. 그날에 있었던 사건의 진실은 거의 다 밝혀졌다. 다만 국방부가 이를 인정하지 않을 뿐이다. 8명의 장병 유족들은 나중에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데 기여한 공로가 매우 크다”며 그 고마움을 감사패에 담아서 줬다.
해외 약탈 문화재 환수 위한 평양 방문
나는 문화재환수위원회 실행위원으로 해외로 불법 반출된 약탈 문화재 환수 활동을 했다.
2008년 8월에는 4박5일 일정으로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스님 등과 중국을 거쳐 북한 평양을 방문했다. 금강산 관광객인 박왕자씨가 북한군에게 피격당해 남북관계가 경색된 후 최초 방문단이다.

이때 양각도 호텔에 묵으며 TV에 자주 나오는 김일성광장, 대동강, 소년인민궁전, 박물관, 유적지 등을 방문했다.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에 맞서 살수대첩을 펼쳤던 청천강을 지나 묘향산 보현사 등을 방문해 약탈 문화재 현황을 파악하고 향산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평양방문단은 북한 불교계와 함께 일본 등 해외로 반출된 문화재를 찾아오기 위한 공동성명서를 채택했다. 또한 일본에 약탈된 평양 율리사지 석탑 반환 운동을 공동 추진키로 합의했다.

이후 나는 환수위원회 일원으로 혜문스님 등과 함께 일본을 방문해 약탈 문화재를 공동조사하고, 일본 정관계 인사들과 만나 협의했다. 아울러 기획취재를 통해 해외로 약탈된 문화재의 실상과 문제점 등을 연속으로 보도했다.
드디어 2011년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약탈한 국보문화재 조선왕실의궤가 110년만에 반환되는 성과를 거둔다.

나는 빼앗긴 우리 문화재의 환수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조선왕실의궤환수위원회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이후에도 문화재 환수 활동을 계속 이어갔다.

2015년 8월29일에는 혜문스님과 개성을 방문해 북한 측과 다시 한 번 문화재 반환 문제를 논의했다. 하지만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문화재 교류 협력도 사실상 중단된 상태다.
해외입양인 가족 42년 만에 찾다
지금도 매일 실종자들이 발생한다. 아동 실종의 경우에는 골든타임을 놓치면 장기실종이 될 수 있다. 장기실종자 가족들의 삶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아이가 실종된 그때에 모든 시간이 멈춰버린다. 이때부터 아이를 찾아 전국을 헤매면서 평생 고통 속에 살아야 한다.
실종자를 찾을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으려면 신속하고 빠른 전파가 중요하다. 그나마 지금은 인터넷이 발달하고 SNS가 활성화돼 실종자를 찾는데 좋은 환경이 만들어졌다.

나는 기자생활 중 실종자와 해외입양인 가족을 찾는데 누구보다 적극 나섰다. 실제 서울, 구미, 대전 등에서 발생한 다수의 실종자들을 찾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냈다.
전북 전주가 고향인 윤현경씨는 어릴 적 해외로 입양됐다. 한국에 있는 가족을 찾으려고 했으나 단서는 오직 하나, 왼쪽 팔에 새겨진 십자가 문신이 유일했다. 나는 이걸 근거로 윤씨 가족 찾기에 나섰고, 결국 찾아냈다. 그리고 한국에서 42년 만에 감동적인 가족 상봉을 했다.

나는 실종자와 해외입양인의 가족을 찾아준 공로를 인정받아 제12회 실종아동의 날에 ‘경찰청장 감사장’을 받았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 가치관의 혼란
언제부터인가 하루하루 숨이 턱턱 막혔다. 가치관의 혼란이 시작됐다. 더 이상 기성 언론에서 미래와 희망을 보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이대로 안주하면 월급 걱정없이 살 수는 있겠지만, 더 소중한 것을 잃을 것 같았다.
제도권 언론에서 ‘기자생활’을 계속해야 하는지 회의가 들었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그럴 때마다 회사 근처 조용한 공간에서 수없이 하늘을 보며 고뇌했다. 그곳에서 내가 가야 할 길을 물었다.

나를 차분하게 돌아봤다. 기자생활 내내 초심을 잃지 않았고 신념이 꺾이거나 부러지지 않았다. 불의에 맞서고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았다. 항상 힘없고 올바른 약자 편에 섰고, 악의 무리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거대한 정치 권력에도 맞섰다. 정의로운 기자의 길을 가기 위해 기자직도 걸고, 목숨도 걸고, 내 모든 것을 던졌다.
참교사의 길 대신 참기자가 되겠다는 약속도 지켰다. 부모님이 주신 이름 석 자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다. ‘기자 정락인’의 소중한 가치를 만들었고, 내 명예이자 자부심이 됐다. 지금 당장 그만두더라도 후회도, 미련도, 아쉬움도 없었다. 이제 내 이름으로 내가 꿈꾸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새로운 도전과 변화를 위해 시사저널에 사표 내고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개척하기 위해 또다시 외롭고 고독한 길에 나선 것이다.
새로운 도전
지금은 SNS가 세상을 바꾸는 시대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모든 정보를 얻고, 공유하고, 소통한다. 이런 때에 손 안의 세상에서 가장 파급력과 영향력을 갖는 게 바로 SNS다. 나는 이런 미디어 환경의 변화 속에서 내가 갈 길을 찾았다.
그래도 나는 누구보다 ‘뉴 미디어’에 강했다. 미디어 환경 변화에 민감했고 빠르게 변화하고 적응했다. 2000년 4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국내 언론인 최초로 ‘정락인 기자의 Power Logis’라는 이메일 웹진을 발행해 화제를 모았다.
블로그는 2004년부터 운영했다. 중앙일보 재직 당시에는 ‘조인스닷컴’ 기자블로그를 운영했고 순위를 매겼는데, 항상 10위 안에 들어갔다. 2009년부터는 Daum 티스토리로 옮겨 <정락인닷컴>을 운영했고, 많을 때는 하루 방문자 100만 명을 넘기도 했다.

내 블로그는 2014년 6월 Daum view가 종료되기 직전 이곳을 이용하는 블로그 약 52만개 중 ‘전체 1위'(사회1위, 정치2위)에 올랐다.
당시 Daum view에는 네이버를 포함한 포털사이트 블로그와 각 언론사의 기자블로그 등이 총 망라돼 있어 여기서 1위를 하면 사실상 ‘대한민국 블로그 순위 1위’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특히 뉴스 송고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미디어의 영향력을 함께 갖는다고 볼 수 있었다.
2018년부터는 정락인닷컴 외에 사건을 전문으로 다루는 블로그를 개설해 하루 평균 10만 명의 방문자를 기록했다.
그러던 2022년 10월 티스토리를 운영하는 카카오 데이터센터에 화재가 나면서 며칠동안 카카오 서비스가 먹통이 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나는 이때 포털사이트의 블로그 시대를 끝내야겠다고 판단하고 독립 사이트 개설을 준비하며 새로운 변화를 모색했다.
그리고 2023년 1월 국내 최초로 사건 전문 뉴스사이트인 <정락인의 사건추적>을 개설했다. 아울러 기존 운영하던 블로그(네이버는 유지)는 정리하고 이 사이트로 일원화했다. 일일 방문자 100만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
탐사저널 사건전문기자로 복귀
나는 시사저널에서 선·후배로 만난 후배 안성모 기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입사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형제처럼 지내고 있다. 시사저널 재직 당시 내가 팀장을 맡으면 제일 먼저 안 기자를 우리팀의 수석으로 영입했다.
내가 시사저널에서 나온 후에는 내가 맡고 있던 탐사보도팀장을 성모가 이어받았다.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도 ‘기자직’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시사저널에서 계속 기사를 써달라는 요청이 와서 ‘객원 기자’로 매주 사건 기사를 썼기 때문이다. 안 기자가 팀장일 때는 내 기사를 받았는데 야구로 따지면 캐처였다. 지금도 시사저널에는 ‘정락인의 사건속으로’ 연재를 맡아 매주 기사를 쓰고 있다. 이미 시사저널 ‘최장수 객원기자’ 타이틀을 갖고 있다.
나는 기자생활 내내 탐사·추적보도를 해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건’이 기자 정락인의 테마가 됐다. 기자는 자기 테마가 있어야 생명력이 길고 전문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데, 사건이 내 전문분야가 된 것이다. 2019년에는 미제사건을 추적한 <미치도록 잡고싶다>를 펴내기도 했다.

2024년 10월 안 기자가 시사저널 출신들을 주축으로 탐사보도 전문 시사종합매체 <탐사저널>을 창간하며 언론 사주(대표 기자)로 변신했다. 안 대표의 요청에 따라 나는 ‘사건전문기자’로 합류하면서 제도권 언론에 일시 복귀했고, ‘정락인의 사건X파일’ 연재를 맡고 있다.

내가 어릴 적 어떤 스님이 탁발을 위해 우리집에 찾아왔고, 나를 보더니 어머니에게 “쟤는 사막에 던져놔도 먹고 살 운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고 보니 그때 스님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지금까지 내 삶을 스스로 개척해 왔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도전했으며, 피눈물이 날 정도로 노력했다. 또 실력으로 경쟁하며, 능력을 인정받아 여기까지 왔다. 현실에 안주하거나 입신영달을 꾀하지도 않았다.
나는 혼이 담긴 계란은 바위를 깰 수 있다고 믿었고, 실제 그런 것을 보여줬다. 세상은 내 의지와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시킬 수 있고,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지금까지 그 누구보다 치열하고 파란만장한 기자의 삶을 살았지만 그렇다고 내 도전이 멈추지 않았고, 끝나지도 않았다. 사는 동안 나는 계속해서 도전하고 또 도전할 것이다. 이제 내 마지막 꿈은 정원사다. 머지 않아 서울 생활을 끝내고 나 혼자 자연으로 돌아가 내가 좋아하는 꽃과 식물, 나무들을 가꾸고, 동물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글을 쓰며 살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