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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산울림’ 막내 김창익 사망사건

그룹 ‘산울림’은 김창환(보컬, 기타), 김창훈(보컬, 베이스), 김창익(드럼) 형제로 구성된 록밴드다. ‘한국의 비틀즈’라고 불릴 정도로 전설적인 발자취를 남겼다.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서 태어나 학창시절을 보냈던 삼형제는 서울대(김창완, 김창훈)와 고려대(김창익)를 졸업했다.

이들은 학창시절 합주실을 구하지 못하자 방에 달걀판을 덕지덕지 붙여서 합주실로 삼았다. 그 시절 흑석동은 담벼락이 무의미할 정도로 집과 집이 바싹 붙어 있는 형태였다.

서울대에 입학한 둘째 김창훈은 농업생명과학대학 소속 음악 동아리 ‘샌드페블즈’에 들어간다. 대학 3학년 때인 1977년, MBC 대학가요제가 처음 개최된다.

김창훈은 후배인 2학년들에게 대학가요제 출전을 권유했고 “노래가 없다”는 답변이 돌아오자 자신이 썼던 <나 어떡해>를 참가곡으로 내줬다.

삼형제도 ‘무이'(無異, 평소와 다름없음)라는 밴드를 결성해 참가한다. 예선에서 무이는 <문 좀 열어줘>로 1위, 샌드페블즈가 2위였다.

하지만 첫째인 김창완이 졸업생(1975) 신분인 게 문제였다. 결국 무이는 규정에 걸려 탈락하고, 본선 1위는 샌드페블즈가 차지했다. ‘나 어떡해’는 후에 산울림 2집에 리메이크돼서 실린다.

산울림은 같은해 <아니 벌써>,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거야> 등이 수록된 ‘산울림 1집’을 내놓으며 가요계에 정식 데뷔했다.

이들은 동요 같은 노랫말, 서정적인 사운드, 자유로운 음악 화법 구사 등 당시 주류 음악 시장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1집 앨범이 2주 동안 40만장이 팔렸을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산울림은 1집을 낸 후 1년 안에 3집까지 낼 정도로 열정적인 활동을 벌였다. 삼형제는 세계 최초로 앨범 100집을 내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질주했다. 이후 <산할아버지>, <청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가지마오>, <빨간 풍선>, <너의 의미> 등 록과 발라드, 동요 등 장르를 과감하게 넘나들며 수많은 히트곡을 탄생시켰다.

막내 김창익은 1990년대 말 캐나다로 이민을 갔고, 이후 한국과 캐나다를 오가며 가수 활동을 꾸준히 했다. 2006년에는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산울림 30주년 기념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그러던 2008년 1월29일 김창익이 캐나다에서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 김창익은 이날 오후 2시쯤 벤쿠버의 언덕진 장소에서 제설작업을 하다 리프트가 넘어지면서 그 밑에 깔렸다.

사고 직후에는 주위 사람들과 대화가 가능할 정도였지만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앰뷸런스가 도착했을 때는 산소호흡기를 대야 할 정도로 호흡이 좋지 않았다. 병원으로 옮겨진 후 끝내 숨을 거둔다. 향년 50세.

산울림의 팬카페에는 현지에서 그와 가깝게 지냈다던 한 팬이 사망 직전 김창익의 모습을 전했다.

그는 “방금전 故 김창익님의 유해가 안치된 병원에 다녀왔습니다”라며 “어제 점심 때 만나서 앞으로 있을 공연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는 그분을 뵐 수 없다는 현실이 너무나 슬프군요. 언제나 그렇듯 해맑게 웃으시던 모습이 너무 눈에 선한데…”라며 김창익의 갑작스런 죽음을 안타까워 했다.

이어 “김창익님의 다리가 심각하게 다쳐있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습니다.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사망소식을 접하게 됐습니다”라며 망연자실해 했다.

맏형인 김창완은 SBS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의 방송 직후 동생의 사망소식을 접하고 오열했다. 벤쿠버로 달려간 형제들은 막내의 주검을 마주하고 비통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김창완은 동생을 떠나 보낸 후 “산울림은 가족 밴드다. 막내가 이렇게 떠나 버린 이상 예정되어 있던 것 이상의 산울림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건 없을 것“이라며 해체를 선언했다. 이로써 산울림은 정규 앨범 13집, 동요 앨범 4집을 끝으로 긴 전설의 막을 내린다.

이들은 울려 퍼져 가던 소리가 산이나 절벽 같은 데에 부딪쳐 되울려오는 ‘산울림’처럼 한국 대중음악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김창완은 2013년 6월10일 방송된 케이블채널 tvN ‘백지연의 피플인사이드’에 출연해 동생 김창익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드러냈다.

김창완은 “(동생 김창익이 떠난 후) 실제로 내 몸이 잘린 건 아닌데도 분명 잘려나간 느낌이 들었다”며 “우리가 밴드를 해서가 아니라 ‘아! 형제는 이렇게 한 몸으로 태어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여태껏 타임머신이 있다면 항상 ‘먼 미래로 가고 싶다’고 말해왔는데 지금은 아니다”며 “막내 떠나기 전 어느 날 뙤약볕에서 악기 내리던 날이나 막내의 낄낄거리는 소리 들으며 통닭집 가던 날로 돌아가고 싶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김창완은 2008년 ‘김창완밴드’를 결성해 음악 활동을 이어왔다. 그는 또 라디오 DJ, 배우, 광고모델 등으로 다방면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동생 김창훈은 미국에서 일하다 2017년 귀국해 어릴적 살던 ‘흑석동’을 연상시키는 ‘블랙스톤즈’를 결성하고 음악활동을 재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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