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갔다가 ‘수건 3장’ 때문에 17명 살해한 조선인
1910년 8월22일 일본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침탈하고 강제 병합했다.
일제는 강압적으로 통치하며 조선인들을 핍박했다. 조선사람 중에는 일본에 건너가 하층 노동자로 생활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중에는 이판능(26)이라는 인물도 있었다.
결혼해 가정을 꾸렸던 이씨는 조선에서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수도인 동경에서 전기국 전차 기사로 취업했다. 그나마 조선인에게는 좋은 일자리에 속했다. 숙식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하숙집에서 해결했다.
나라 잃은 설움 속에서도 가족을 위해 이를 악물었던 이판능. 그에게는 뜻하지 않는 사건이 펼쳐진다. 1921년 6월2일 이판능 소유의 수건 3장이 없어졌다. 지금은 흔하지만 옷 한 벌 겨우 장만해 입고 다닐 때인 당시에 수건은 귀하고 비싼 물건이었다. 그런데 이판능이 아끼던 수건을 누군가 훔쳐갔다.
이씨는 하숙집 여주인을 의심했다. 그에게 “수건이 없어졌는데, 못봤느냐”고 묻자 “왜 댁의 없어진 수건을 나한테 물어보냐”며 퉁명스런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수건도 찾고 범인도 잡기 위해 가까운 지서에 가서 “수건 도둑을 잡아 달라”고 신고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은 이판능이 조선인이라는 것을 알고 그를 무시했다.
오히려 멸시만 받고 집으로 돌아온 이판능은 울분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하숙집 여주인과 없어진 수건을 놓고 말다툼을 벌였다. 집주인 부부는 되레 이판능을 폭행했다. 너무 억울하고 분통이 터진 그는 다시 경찰서를 찾아갔으나 또 다시 멸시받고 조롱만 당하고 나왔다.
이판능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마침내 감정이 폭발했다. 그는 집에 가자마자 부엌칼을 들고 주인집으로 들어가 주인 부부 등 가족을 모두 죽이고 길거리로 뛰쳐나왔다. 이성을 잃은 이씨는 어두운 밤길에서 보이는 사람을 닥치는 대로 찔렀다. 약 1시간 만에 17명을 살해했다. 여기에는 일본인이 다수였으나 조선인도 끼어 있었다.
이판능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검거됐다. 절도피해자에서 졸지에 살인피의자가 된 그는 일본 재판부에 회부됐다. 이판능의 가족과 친지들은 일본 변호사를 선임해 대응했다. 변호인은 “사건 당시 이씨는 극도의 흥분상태였고, 정신 착란이 있었다”면서 무죄를 주장했다.
이것은 일본 사법 역사상 최초로 정신병을 들어 ‘무죄‧감형’사유로 주장된 것이다. 재판부는 당시 제국대학 의과 교수였던 미야케 쿄우이치 박사에게 심층적인 정신감정을 의뢰했다. 아울러 감정이 진행되는 4개월 동안 재판은 미뤄졌다.
미야케 교수는 이판능에 대해 “집주인을 살해할 때까지는 의식이 있었지만, 길거리로 나가 추가 살인을 저지를 때에는 의식을 잃고 몽롱한 상태였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 결과를 토대로 1심에서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판능은 항소했다. 이 사건은 언론에 보도되면서 많은 관심을 불러왔다. 당시 일본인들의 차별을 받던 조선인들에게 이 사건은 많은 공감을 불러왔다. 재판정이 조선인 방청객들로 가득 들어찼을 정도다.
항소심이 어떤 결과가 나올지에 귀추가 주목됐다. 사건 발생 2년6개월 후인 1923년 12월17일, 항소심 법원은 이씨에게 징역 7년6개월을 선고했다. 17명을 살해하고 1심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이씨에게는 파격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이씨에 대한 근황은 전해지지 않았고, 1955년에 사망했다고 알려졌다.
이판능에 대해 일각에서는 ‘연쇄살인범’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냉각기가 없이 단 시간에 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대량살인범’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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