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사건

17명 살해 ‘연쇄살인마’ 김대두 사건


대한민국의 범죄 역사를 새로 쓴 김대두.

그는 1949년 10월11일 전남 영암군 학산면 은곡리의 농촌마을에서 3남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가난한 가정형편에도 김씨 아버지의 교육열은 대단했다. 큰 아들인 김대두가 대도시의 일류 중학교 진학에 실패하자 광주로 보내 재수까지 시켰다.

하지만 아버지의 기대만큼이나 아들은 능력이 없었다. 오히려 삐뚤어진 삶을 살기 시작한다.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 김대두는 집에서 농사일을 돕다가 17살 되던 해 “큰돈을 벌겠다”며 목포로 나왔다. 농방에 직공으로 취직해 일을 하다 한 달 만에 그만두고 광주로 가서 양복점 직공으로 1년간 종사했다. 그 후 5년 동안 전북 임실 등 각지를 떠돌며 막노동, 머슴살이, 품팔이 등으로 일정한 직업이 없이 살았다.

1972년 11월 다시 고향에 내려간 김대두는 한 달간 머문 후 집에서 5만원을 갖고 서울로 왔다. 성북구 송천동에서 보증금 1만원에 월 3천원의 전세를 얻은 후 하는 일 없이 시내를 배회하며 지냈다.

신체허약으로 군 면제가 된 후에는 범죄의 세계로 빠져든다. 73년 폭력으로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고, 다시 폭력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75년 5월17일 수원교도소에서 출소한 후 외톨이가 된다.


김씨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고, 친척과 친구들도 전과자라고 냉대했다. 일자리도 얻지 못하고 무력감과 소외의식에 빠지면서 사회에 대한 불만은 더욱 커져갔다.

그해 8월12일 김대두는 살기를 가득 품고 칼을 들었다. 8월13일 새벽 전남 광산군(현 광주 광산구) 임곡면의 한 외딴집에 복면을 하고 침입했다. 무작정 안방으로 들어간 그는 잠에서 깬 주인 안아무개씨(62)가 도망가려 하자 낫으로 찔러 죽이고, 아내 박아무개씨(58)는 절굿대로 쳐 실신시켰다.

이곳에서 김대두가 훔친 물건은 플래쉬 한 개가 전부였다.

첫 살인을 저지른 김씨는 목포역으로 가서 순천행 기차를 탄다. 이곳에서 교도소 동기인 김해운(29)을 우연히 만나 한 탕할 것을 모의한다. 김해운이 집에서 훔쳐나온 2만5천원을 갖고 다시 목포로 내려가 3일간 놀며 김대두는 제크나이프를, 김해운은 이발용 면도칼을 각각 구입했다.

수중에 돈이 떨어지자 다시 범행에 나선다. 기차를 타고 무안군 몽탄역에서 내린 뒤 철길을 따라가며 범행 대상을 물색했다.

8월19일 이들은 몽탄면 당호리의 마을을 지나다 한 구멍가게를 발견한다.

이곳에 돈이 있다고 생각하고 침입해 주인 박아무개씨(55)와 그의 아내 서아무개씨(56), 손자(7)를 살해한다. 서씨와 손자가 빨리 죽지 않자 발로 밟으며 무차별 찔렀다. 그러면서 김대두는 “완전 범죄를 위해 현장에 있는 사람은 모조리 죽여야 한다”고 거침없이 말했다.


당시 박씨의 안방 이불위에는 현금 2만6천원이 있었으나 미처 발견하지 못한 채 250원만 훔쳤고, 가게에서 빵, 사이다, 과자 등을 훔쳐 배를 채우고 달아났다.

두 번째 범행 후에는 야산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잡히면 죽는데 기왕이면 돈이 많은 서울에서 큰 것을 한탕하자”고 모의한다. 둘은 9월7일 기차를 타고 상경했다. 서울에 도착해서는 헤어졌고, 김대두는 혼자 범행을 계속하기로 결심한다.

이날 김씨는 동대문구 면목동 뒷산에 있는 한 천막집에 침입해 홀로 살고 있던 최아무개씨(남‧60)를 살해했으나 돈은 훔치지 못했다. 김대두는 미아동 외사촌 누나집과 영등포 누나집을 전전했다.

그러다 9월23일쯤 평택 미군부대에 가면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평택으로 내려갔다. 그는 그곳에서 양아무개 할머니(71)와 손자 둘(7세, 5세), 손녀(11세) 등 일가족 4명을 살해했다.

인간이 한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김대두는 할머니와 손자 둘은 둔기로 머리를 가격해 살해했는데, 안면부가 거의 함몰된 상태였다. 손녀는 집에서 150m쯤 떨어진 야산에서 손과 발이 나무에 묶이고 얼굴에는 보자기가 씌워져 있었다. 손녀 역시 온몸에 둔기로 난타 당해 살해됐고, 범행에 사용된 장도리는 나무 손잡이가 부러져 나갔을 정도였다.

김대두의 살인행각은 브레이크가 없었다. 그는 다시 경기도 양주로 올라가 변아무개씨(남‧50) 일가족 3명을 살해했다.

잇따라 살인사건이 발생하자 언론에서 보도가 시작됐다. 김씨는 경찰의 추적을 피해 버스를 타고 안양으로 갔다가 다시 부곡을 거쳐 수원으로 가기 위해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9월30일 오후 8시쯤 시흥에서 또 다시 살인을 저지른다. 집에는 20대 후반의 아기엄마와 생후 3개월 된 딸이 있었다. 김대두는 엄마인 윤아무개씨(여‧28)를 겁박해 강간한 후 둔기로 때리고 칼로 찔러 살해했다. 갓난아기가 울자 “우는 소리가 귀찮다”며 둔기로 때리고 발로 짓밟아 살해했다. 김씨는 집안을 뒤져 2천300원을 훔쳐 나왔다.

수원에 잠입한 김씨는 10월2일 오후 3시쯤 우만동 노아무개씨(38) 집에 침입해 노씨와 부인 전아무개씨(37)를 살해했다. 남편 노씨를 둔기로 때리고 칼로 찔러 살해한 김대두는 아내 전씨는 집근처 야산으로 끌고 가 알몸 상태로 양손을 묶은 채 살해했다.

김씨는 이날 성남시로 잠입, 오후 5시쯤 남서울 골프장 인근에서 범행 대상을 골랐다. 캐디 이아무개씨(21)가 혼자 길을 걷는 것을 본 후 목에 칼을 들이대고 숲속으로 끌고 가 옷을 벗기고 양손과 발을 나무에 묶어 강간을 시도했다. 이때 도로에서 승용차 차량의 불빛이 비추자 이씨는 그 틈을 타 “사람 살려”라고 소리를 질렀고, 김대두는 산속으로 도망쳤다.

다시 서울로 들어온 김대두는 시내를 배회하다 영등포역전에서 교도소를 갓 나온 23세 정도의 청년을 만나 한탕하자고 꾀어 사촌매형집으로 데려갔다. 그런데 이 청년은 오히려 현금 3천원과 구두를 훔쳐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사촌매형에게 욕을 먹은 김대두는 10월7일 집을 나와 용산역 앞 철우회관에서 이 청년을 붙잡아 우이동으로 데려가 이날 오후 9시30분쯤 칼로 찌르고 돌로 쳐 죽인 뒤 시체에서 청바지를 벗기고 가짜 금반지와 지갑 등을 훔쳤다.

산속에서 밤을 지샌 김대두는 통금이 풀린 뒤 동대문구 전농동의 여인숙에 들어갔다. 10월8일 오전 8시30분쯤 김씨는 시체에서 벗긴 피 묻은 청바지와 붉은색 바지 등 2개를 한 세탁소에 맡겼다. 주인 하아무개씨(26)는 어머니가 맡은 피 묻은 바지를 보고 수상한 생각이 들어 청량리 경찰서 역전파출소에 신고했다.


형사 2명이 세탁소에 잠복하며 김씨가 옷을 찾으러 오길 기다렸다. 여인숙에서 낮잠을 뒤 같은 날 오후 4시쯤 세탁소에 들어온 김씨는 형사들이 불심검문을 하자 태연히 “바지에 묻은 피는 전날 친구와 싸우면서 코피를 흘린 것”이라고 잡아뗐다.

형사들은 김씨가 수배된 살인범의 몽타주와 비슷하자 경찰서로 연행해 추궁을 계속했다. 경찰은 그가 숙박하고 있던 여인숙에서 피해자들의 도난품을 찾아내고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이라고 확신한다. 계속된 추궁에 김대두는 “내가 살인범”이라며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이로써 광란의 살인극도 막을 내렸다.

검거될 때까지 55일 동안 김대두는 전남, 서울, 경기 등을 오가며 9차례에 걸쳐 17명을 살해하고 3명에게 중상을 입혔으며 3명을 강간했다. 전남 무안에서는 일가족을 살해했고, 서울에서는 칠순 할머니와 어린아이까지 죽였다. 불과 1주일 사이에 11명을 살해하고 2명에게 중상을 입히기도 했다. 그가 사용한 흉기는 칼, 망치, 돌 등이었다.

강도 살인 행각을 저지르면서 김대두가 빼앗은 돈은 2만 6천800원에 불과했다. 1975년 당시 쌀 한 가마니 값이 1만 8천600원쯤 했으므로 지금 돈으로 치면 겨우 몇 십 만원을 빼앗으려고 살인 행각을 벌인 것이다.

검거된 뒤에도 범행에 대해 후회하거나 반성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현장검증 당시에는 껌을 씹으며 히죽대기도 했고, 교도소에서도 교도관과 재소자들을 폭행하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살인, 강도, 강간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씨는 1심과 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상고를 포기했다.

공범 김해운은 김대두의 반 강요로 참여하고, 한 건의 살인만 가담한 점을 참작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김대두는 사형 판결을 받은 뒤 여성 교화위원의 교화로 참회했으며 기독교 세례도 받았다.

1976년 12월28일 전격 처형됐는데, 마지막 순간에 피해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웃는 얼굴로 사형대에 올랐다고 한다. 형장에서는 “지은 죄를 깊이 뉘우친다. 전과자들에 대한 사회적 냉대가 시정됐으면 한다. 피해자와 유족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는 말을 남겼다.


김대두의 시신은 화장된 후 경기 벽제의 기독교 공원묘지에 묻혔다. 김대두와 두 번째 범행을 저지른 김해운은 20년을 복역한 뒤 출소했다. 현재는 결혼해 수도권에서 살고 있다고 알려졌다. 김대두는 2004년 유영철 사건 발생 전까지 30년 동안 가장 많은 사람의 목숨을 뺏은 살인범으로 기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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