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연천 예비군 훈련장’ 폭발사건
‘예비군’은 일반시민이 주병력이다.
전쟁과 이에 준하는 천재지변, 그외 긴박한 상황에 병력을 추가 동원할 필요가 있을 때를 대비해서 선발하거나 임명된 시민들을 훈련하고 준비시키는 군사조직이다.
군 복무를 마친 현역 군인과 사회복무요원은 예비군 훈련을 받게 되는데 기간은 보통 2~3일이다.
1993년 6월8일 경기도 시흥에 위치한 육군 수도군단 예하 967포병대대에서 동원예비군 훈련이 시작됐다. 이날 소집된 예비군들은 인천시 북구 만수동, 작전동(현 남동구 만수동, 계양구 작전동) 등지에서 소집됐으며, 총 448명이 훈련에 참가했다.
이들은 이틀간 주둔지 훈련을 끝내고 6월10일 155mm 고폭탄사격 훈련이 예정돼 있었다. 이날 예비군들은 오전 2시 버스로 부대를 출발해 오전 6시에 경기도 연천군 차탄4리에 위치한 육군6군단 포병사격 훈련장에 도착했다.
예비군들은 사격준비를 위해 포를 배치하는 방열작업을 실시했다.
오전 11시쯤 부대장이 방문해 훈련이 너무 느슨하다며 훈련장을 옮기라고 지시했고, 인근 다락대 사격장으로 옮겨 오후 2시30분까지 다시 방열작업을 했다. 점심식사 후에는 포사격을 위해 위장막을 설치하고 반동호를 팠다.
당시 소집된 예비군 중에서는 포병이 아닌 보병이 120명 포함돼 있었으나 부대는 병과에 상관없이 모두 포병 사격훈련에 투입했다. 훈련 하루 전 예비군교육장에서 포사격에 대한 사전교육이 있었으나 보병 출신들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게 허술하고 위험한 훈련은 이어지고 있었다.
오후 4시5분쯤 훈련도중 고폭탄 신관을 조립하던 C포대 2포반 9번 진지에서 155mm 고폭탄 1발이 폭발했고, 이어 포탄 4발이 연쇄폭발을 일으켰다.
폭발한 포탄 파편이 장약통 3개를 관통했고, 장약통이 연소하면서 고폭탄 옆에 있던 조명탄 2발이 다시 폭발했다. 조명탄 2발은 폭발로 인해 약 30m 정도 튕겨나가면서 2차 폭발이 발생했다.
이 사고로 진지 안에 있던 20명이 모두 숨지고, 진지 밖에서는 5명이 부상당했다. 9번 진지의 예비군 2명은 서늘한 곳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고, 1명은 음료수를 사기 위해 훈련장 부근 구멍가게에 갔다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사고 현장 주변에는 포탄파편에 잘려나간 팔다리들과 주인을 잏은 군화들이 널려 있었으며, 포다리가 엿가락처럼 휘어져 있었다. 또 피묻은 옷가지와 살점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사고 당시의 끔찍한 상황을 생생히 보여줬다.

사고지점에서 약 30m 지점에 떨어져 있던 예비군 김씨는 “갑자기 꽝하는 굉음과 함께 빨간 불꽃이 치솟으며 비명이 터져나왔다”며 “곡사포 주변 반경 20여m 안에 있던 25명이 파편 등에 맞아 순식간에 쓰러졌다”고 증언했다.
훈련장 철책 옆에서 나물을 캐던 인근 주민은 “귀가 멍할 정도의 폭음이 서너차례 들린 뒤 매캐한 화약냄새와 함께 ‘사람 살리라’는 비명이 터져나왔다”며 “사고를 피한 예비군과 현역사병들이 황급히 모포로 부상자들을 감씨는 모습이 보였다”고 말했다.
이 사고는 포탄 실사격을 하면서도 안전관리 등을 소홀히 해 빚은 예비군 창설 이래 최대의 대형사고였다.
국방부는 “규정상 포탄을 포다리 오른쪽에 두고 추진장약은 포다리 왼쪽에 두도록 되어 있으나 사격 당시 이러한 안전수칙이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당시 장약과 포탄은 최소한 3m 떨어진 곳에 두는 것이 규정이었으나, 실제로는 1.7m 거리에 놓여져 있었다. 또 포 한 문당 8~9명이 적정인원인데도 27~29명씩 배치돼 훈련과정이 매우 혼잡스러웠고 통제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육군은 사고 후속대책으로 967포병대대를 해체하고, 수도군단장 배문한 중장과 수도포병여단장 김정웅 중장을 보직해임했다. 또한 967포병대대 배두용 소령, 수도군단 사격통제단장 윤점복 중령과 전포통제관 김남인 대위를 직무유기 혐의로 구속했다.
이 사고로 사망한 현역 3명과 예비군 17명의 유해는 대전현충원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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