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 아빠 출근시키는 5살 소녀에게 찾아온 기적
필리핀 비사야 지방의 남쪽에 자리한 레이테주 소곳 마을에는 매일 아침 특별한 동행이 시작된다. 앞이 보이지 않는 마흔네 살의 가장 넬슨 페페(Nelson Pepe)와 그의 다섯 살 난 딸 제니(Jenny)가 그 주인공이다.
페페는 선천적으로 시력을 잃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아내와 세 아이라는 소중한 가족이 있기에 매일 아침 삶의 현장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아침 햇살이 가녀리게 비출 때쯤, 페페가 어깨에 하얗고 커다란 자루를 메면 딸 제니가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아이의 손에는 어른 손가락 굵기만 한 나무 막대기가 들려 있다. 제니가 막대기의 한쪽 끝을 아빠의 손에 쥐여주면, 페페는 익숙하게 반대쪽 끝을 잡아쥔다. 어린 딸의 작은 손과 거칠어진 아빠의 손이 나무 막대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단단하게 연결되는 순간이다.
목숨을 건 하루 60그루의 이동
제니는 막대기를 쥔 채 앞장서서 숲길을 걷기 시작한다. 울퉁불퉁한 돌멩이가 널려 있고, 사방으로 거친 풀뿌리가 튀어나온 거친 산길이다. 아이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빠가 넘어지지 않도록 주변을 살핀다.
큰 돌이 나타나면 잠시 멈춰 서서 아빠의 발 위치를 유도하고, 나뭇가지가 낮게 드리워진 곳에서는 아빠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겨 위험을 알린다. 어른도 혼자 걷기 힘든 깊은 숲길이지만, 아빠는 오직 딸아이가 이끄는 막대기의 작은 떨림과 움직임에 의지해 농장으로 향한다.

부녀가 매일 향하는 곳은 마을 인근의 코코넛 농장이다. 이곳에 도착하면 제니는 아빠의 일과가 끝날 때까지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놀거나 주변을 서성거리며 시간을 보낸다. 가끔은 아빠가 일하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며 발을 구르기도 한다. 그사이 페페는 본격적으로 거대한 코코넛 나무에 오르기 시작한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높이가 10m에서 15m에 달하는 미끄러운 나무를 오르는 일은 그 자체로 목숨을 건 모험이다. 페페는 오직 손끝과 발끝의 감각만으로 나무줄기의 홈을 찾고, 온몸의 근육을 팽팽하게 긴장시킨 채 위로 기어오른다. 나무 꼭대기에 다다르면 허공에서 중심을 잡고 단단한 코코넛 열매를 수확한다.
이렇게 온 힘을 다해 나무 한 그루에서 코코넛을 따서 벌 수 있는 돈은 고작 5페소, 한국 돈으로 약 122원에 불과하다. 페페가 온종일 땀을 흘려 하루에 버는 총수입은 300페소(약 7300원) 안팎이다. 다섯 식구의 하루 끼니를 간신히 해결할 수 있는 이 돈을 모으기 위해, 그는 매일 60그루가 넘는 코코넛 나무를 맨몸으로 오르락내리락해야 한다. 손바닥이 굳은살로 딱딱하게 굳어지고 온몸에 상처가 가실 날이 없지만, 그는 일을 멈출 수 없다.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30초짜리 영상의 울림
이들의 눈물겨운 일상은 한 대학생의 시선에 머물면서 세상 밖으로 드러났다. 통학 길에 우연히 이 부녀를 목격한 대학생은 매일 같은 시간에 막대기를 주고받으며 숲길을 걷는 부녀의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며칠 동안 부녀의 동행을 지켜본 끝에 이 모습을 영상으로 촬영했고, 부녀가 처한 안타까운 사연을 적어 개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렸다.
인터넷에 올라온 영상의 파급력은 대단했다. 다섯 살 아이가 아빠의 눈이 되어 길을 잡는 모습은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 영상은 순식간에 수백만 회의 조회 수를 기록하며 필리핀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곧이어 주요 방송사와 언론들이 이들 부녀의 삶을 심층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필리핀을 넘어 전 세계의 수많은 이들이 소녀의 깊은 효심에 눈물을 흘렸고, 부녀를 돕고 싶다는 온정의 손길이 사방에서 답지했다.
인터넷과 언론을 통해 모인 수많은 후원금 덕분에 페페는 평생 가보지 못했던 대형 병원을 찾을 수 있었다. 필리핀의 대형 복지재단은 그를 수도 마닐라에 있는 종합병원으로 이송했고, 그의 눈을 치료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정밀 검사를 진행했다.

검사 결과 페페의 질환은 ‘망막 박리’로 밝혀졌다. 이는 안구 안쪽의 망막 벽이 찢어지거나 들뜨게 되면서 시신경으로 가는 영양 공급이 끊어지는 심각한 안과 질환이다.
그러나 냉혹한 현실은 대중의 바람과 달랐다. 페페는 망막 박리가 일어난 지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 이미 시신경이 완전히 손상되고 위축된 상태였다. 현대 의학의 기술로는 수술을 하더라도 시력을 되살릴 방법이 전혀 없다는 최종 판정이 내려졌다. 결국 아빠는 자신을 위해 매일 막대기를 건네던 딸의 얼굴을 끝내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다.

아빠가 눈을 뜨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은 부녀의 삶에 또 다른 형태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시력을 되찾을 수 없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은 실망하는 대신, 이들 가족이 더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힘을 모았다.
사회복지단체와 후원자들은 페페가 더 이상 목숨을 걸고 높은 코코넛 나무에 오르지 않도록 생계 대책을 마련해 주었다. 부녀가 사는 마을에 가족이 직접 운영할 수 있는 작은 구멍가게인 ‘사리사리 스토어’를 차려준 것이다. 이와 함께 비가 새던 낡은 집을 허물고 다섯 식구가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튼튼한 새 보금자리도 지어주었다.

이제 페페는 매일 아침 거친 숲길을 걸어 농장으로 출근하지 않는다. 날카로운 코코넛 나무껍질에 손을 다칠 일도, 높은 곳에서 떨어질까 봐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집 앞에 마련된 작은 가게에서 아내와 함께 안전하게 물건을 정리하며 손님을 맞이한다.
매일 아침 아빠의 손에 막대기를 쥐여주던 제니의 작은 손길은, 비록 아빠의 육신의 눈을 뜨게 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 작은 손길은 차가운 세상의 마음을 움직였고, 아빠의 등 뒤에 매여 있던 무거운 자루를 마침내 내려놓게 만들었다. 아빠의 손을 잡고 숲길을 헤쳐 나가던 소녀의 올곧은 발걸음은, 이제 가족 모두가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활짝 열어주었다.■
<저작권자 ⓒ정락인의 사건추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