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장교들 ‘공군비행학교’ 습격사건
1966년 8월7일 오후 7시 넘어 김해 공군 비행학교(현 김해비행장) 후문 입구인 덕두 주유소에 공군 장교(소위) 3명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비행학교에서 조종교육을 받고 있던 교육생들이었다.
7시20분쯤 부산 진해행 마지막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 안에는 진해 해병학교 35기 기초군사반 과정에 교육을 받던 중 임태호 소위(23) 등 해병대 장교 8명이 타고 있었다.
뒷문이 열리자 기다리고 있던 공군 장교들이 버스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때 차에 타고 있던 해병장교들이 이들을 막아섰다. 해병장교들은 술에 취한 상태였다. 공군 장교들이 앞문으로 오르려고 하자 이번에는 모자를 벗겨 던지고 폭행까지 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한 공군 상병이 재빨리 비행학교에 알렸다. 동기들이 구타당했다는 말에 조종학생들은 분개했고, 정성규 소위 등 16명은 군용트럭을 타고 버스를 추격해갔다.
공군 장교들은 더욱 속도를 내며 버스를 따라갔고, 창원군 태동면에 이르러 해병 장교들이 탄 버스를 따라 잡았다. 격분한 공군 장교들은 버스를 세운 뒤 해병 장교들을 버스 밖으로 끌어내고 곤봉 등으로 마구 구타했다. 16대 8. 술 취한 해병들은 속수무책으로 두들겨 맞았다.
해병장교들은 씩씩거리며 해병학교로 복귀했고, 자기들이 얻어터진 것을 동료 해병들에게 알렸다. 해병들은 즉각 ‘보복’을 선언했다. 보복 방법을 논의하다가 비행학교를 기습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치밀한 작전계획도 세웠다.
8월8일 새벽 당직 교육생 몇 명을 제외한 해병장교 129명은 부대를 집단 이탈, 진해의 경화역에서 김해 진영역까지 돈을 내지 않고 열차를 탔다. 역무원이 “무임승차는 곤란하다”고 말하자 시계 10여 개를 담보로 맡겼다.
이렇게 해병 장교들은 김해 진영역에 집결했다. (해병학교 35기 동기생들은 15년이 지난 2011년 8월 코레일을 방문해 당시 운임 100만원을 코레일에 전달했다)
이들은 다시 민간인 트럭과 버스에 나눠 타고 공군비행학교 입구인 평강 마을에 도착했다. 비행학교 정문에는 헌병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다. 해병들은 경계병의 눈에 띄지 않게 잠복훈련 하듯 논밭을 포복으로 기어갔다.
정문에 다가서자 불시에 기습, 보초근무중인 공군 헌병 김용만 병장의 권총을 빼앗았다. 이들은 김 병장에게 “조종 학생방으로 안내하라”고 위협했다. 김 병장의 안내에 따라 새벽 5시50분쯤 해병 장교들은 목표물인 조종학생 내무반에 접근했다.
당시 조종학생들은 새벽의 단잠에 빠져 있었다. 해병들은 조종학생들의 4개 내무반에 분산 침입해 돌과 주먹으로 무차별 난타했다. 잠결에 기습을 당한 공군은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했다.
우선 본능적으로 내무반 밖으로 도망쳤고, 해병들은 돌을 던지며 추격했다. 해병들은 조종학생 10여명을 때려눕히고 3개 내무반의 유리창 31장 등 기물을 마구 부시며 난동을 부렸다.
이들은 기고만장했다. 연병장에 집결해서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 ‘나가자 해병대’와 ‘청룡은 간다’를 자랑스럽게 불렀다.
이런 사이 일부 해병들은 주번 사령실에 침입해 근무 중인 사병을 밖으로 쫓아내거나 감금하고, 주번 사령인 최성만 중령(작전과장)에게 비행학교 교장과 전날 해병들을 폭행한 교육생들을 불러 사과시키라고 강요했다. 소위가 중령을 협박한 하극상이 연출됐다.

최 중령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대신 아침 6시20분쯤 교내방송을 통해 비행학교 전 장병을 연병장으로 비상 소집시켰다. 약 300여명의 공군 장병들과 해병장교 128명이 맞서는 상황이 됐다. 숫적으로는 해병들이 전적으로 불리했다. 공군 장병들이 한꺼번에 해병 장교들에게 덤벼들었다. 이들의 싸움은 약 10분간 계속됐고, 해병들은 철조망 쪽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숫적 열세를 느낀 해병장교들은 공군장병들에게 돌을 던지며 “추격해 오면 비행기를 부숴버린다”고 위협했다. 실제 이들은 도망가면서 비행기를 향해 돌을 던져 두 대를 파손시켰다. 더 도망 갈 데가 없어진 해병들은 담장과 철조망을 넘어서 제각기 흩어져 달아났다.
이 과정에서 이의일 해병 소위(경희대 졸업)가 늪에 빠져 동료들에게 구조됐으나 약 2시간 후에 사망하고 말았다. 작전계획까지 세워 의기양양하게 공군 비행학교를 기습한 해병들, 기습에는 성공했으나 공군에게 얻어터지며 줄행랑을 치는 신세가 됐다.
여기에다 동료까지 잃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던 것이다.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꽁지 빠진 새’ 같은 신세였다. 이 패싸움으로 양측에서 1명이 사망하고, 39명이 부상을 당했다.
국방부는 합동조사대를 꾸리고 수사에 나섰다. 조사대는 이번 사태의 주동자인 김정훈 해병소위(25) 등 15명을 무단이탈, 기물 손괴 및 특수폭행혐의로 구속했다. 후에 해병대 사령관을 지낸 전도봉 소위도 이 중 한 명이었다.
비행학교 장교 3명도 같은 혐의로 구속했다. 이들은 모두 해병학교와 비행학교에서 퇴교처분을 받았다. 싸움 당사자인 해병학교와 비행학교는 ‘자매결연’을 맺는 것으로 사태를 봉합했다.

당시는 남북한 대치 뿐 아니라 베트남 전쟁이 한창인 때였다.
한국군도 베트남전에 참전한 상태였기 때문에 장교 한 명이 아쉬운 때였다. 구속 후 퇴교 처분을 받은 장교들 중 주동자 외에는 재 입대 입영통지가 발부됐고, 전도봉 소위의 경우 3개월 후 계급을 그대로 인정받고 해병학교에 재 입교 했다. 이로 인해 임관은 동기가 아닌 후배들(38기)과 함께 했다.
그는 1968년에 청룡부대 소속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전도봉은 가까스로 해병 장교 임관을 받았지만 앞길은 캄캄했다. 사관학교 출신이 아닌데다가 이미 징계를 받았기 때문에 ‘별’을 다는 것은 말 그대로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운 좋게도 1996년에 해병대 사령관까지 오른다. 이때의 국방부장관이 1966년 습격사건 당시 공군비행학교의 당직사령이었던 이양호 중령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끝은 좋지 않았다.
이양호는 국방부장관 재직시절인 1996년 율곡비리에 연루돼 구속되면서 옷을 벗었다.
전도봉도 해병대사령관 재직시인 1997년 7월 경기도 안성의 개인 땅을 진급 청탁자인 이아무개 중령 처남 소유의 강화 땅과 맞바꾸기로 한 혐의(뇌물 약속) 등으로 기소됐다. 2002년 12월 대법원에서 벌금 500만원과 자격정지 1년이 확정됐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현직시절 비리에 연루됐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 국군 흑역사 중 하나다.
최정예 전투부대인 해병대 장교들이 적군도 아닌 아군 비행학교를 습격해 난동을 벌인 것도 모자라 세금으로 마련된 비행기를 부쉈고, 해병 장교 한 명이 사망하는 불상사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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