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백교 교주 전용해 머리 절단사건
나라가 어지럽고 백성들의 삶이 힘들면 혹세무민(惑世誣民 : 세상 사람들을 속여 미혹하게 만들고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것)하는 종교집단이 출몰하기 마련이다.
1937년 2월 조선 팔도가 공포에 휩싸이는 일이 있었다.
사이비 종교인 ‘백백교’ 교주 전용해 등이 10여 년 동안 무려 620여 명의 신도들을 무참하게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언론들은 ‘호외’까지 내며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백백교 사건은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역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1940년 3월20일자 <동아일보>를 보면 ‘세계 역사상 가장 무서운 범죄라는 기록으로, 다른 자랑할 것이 없는 우리는 후세에 가서도 이 부끄러움을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백백교 사건이 얼마나 큰 충격과 분노를 자아내게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혹세무민한 사이비 종교가 문제였다. 전용해의 아버지인 전정운은 1912년 자신을 금강산 도인이라며 ‘백도교’라는 사이비 종교를 창시했고, 주로 강원 지역 농민들을 상대로 포교활동에 나서 상당한 세를 불렸다.
전정운은 신도들에게 ‘헌금’이란 명목으로 돈을 바치게 하고 호화롭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 1919년 교주 전정운이 사망하자 측근이었던 우광현은 그의 죽음을 숨기고 전용해와 상의해 암매장했다.
그런데 1920년 평안남도 강서의 정성희가 그의 아버지 정근일이 백도교에 빠져 재산을 탕진한 데 격분, 경찰에 고발하면서 전정운이 죽은 사실이 밝혀졌고, 많은 신도들이 이탈했다.
그의 아들 전용해는 1923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기도 가평과 양평을 근거지로 새 교단인 ‘백백교’를 창시했다. 전용해는 스스로 교주가 됐고, 정감록에 나온 정도령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후천개벽 세상의 주인이 된다며 ‘대원님’이라고 신격화했다.
백백교는 경전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고, 교리도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이들은 “일제는 가고 백백교의 세상이 온다”며 농민들을 끌어 모았다. “곧 심판의 날이 온다” “천부님이 내려오셔서 나는 임금이 된다” “헌금을 바치는 순서대로 너희에게 벼슬을 주겠다” “불로장생할 수 있다”는 등의 말로 사람들을 현혹했다.
그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재산을 교주에게 봉헌하고, 몸과 마음도 교주에게 의탁해야했다. 교주가 하사한 첩지를 구매해서 몸에 항상 지니고 다녀야했고, ‘弓弓乙乙’로 시작되는 밑도 끝도 없는 주문을 계속 외우는 것 역시,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중요했다.
세상은 멀지 않아 불심판과 물심판을 받게 되는데, 이때 살아남기 위해서는 피난소를 찾아야 한다면서 전국 53개소에 임시분소를 설치하기도 했다. 여기에 혹한 신도들은 재산을 통째로 바치거나 자신의 딸을 바쳤다.

백백교에 입교하면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전국의 산간벽지로 보내졌다. 교주는 그사이 수십 명의 첩을 거느리고 신도들이 바친 현금을 탕진했다. 전용해는 변태성욕자였다. 많은 여신도들이 보는 앞에서 다른 여성 신도들과 정사를 벌였으며, 이를 ‘신(神)의 행사’라고 했다.
그는 또 잔인한 교주였다. 자신에게 불만을 품거나 반기를 드는 신도들은 ‘벽력사’ 직책을 가진 심복을 시켜 무참하게 살해했고 일부는 산 채로 매장했다.
그러다가 1937년 전용해 첩의 오빠인 한약사 유곤룡이 일제 경찰에 고발하면서 전모가 드러났다. 일본 경찰은 전국적으로 퍼져있던 백백교 본부, 지부, 사업장, 간부 집 등을 급습하여 간부들을 잡아들였다.
당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일본 경찰은 강원 평강, 경기 연천 등을 돌아 1937년 6월8일 양평 지역에서 시체 발굴 작업을 계속했다. 이때까지 발견된 유골이 무려 380구. 백백교 일당은 실로 ‘인간 백정’들과 다름없었다.
1937년 6월8일자 <동아일보>를 보면 “일본 경찰은 이 사건을 조사하면서 3만 장이 넘는 조서를 작성했고, 24차례나 현장 조사를 나갔다. 각 읍면에서는 시체 처리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조선총독부에 자금 지원을 요청했다”고 적었다. 경성 법원은 백백교 핵심 간부 14명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교수형에 처했다.
전용해는 수사망을 피해 도주하다가 1937년 4월7일 경기도 양평 용문산에서 자살한 채 발견됐다. 동쪽을 향해 누운 채 칼로 목을 찌른 상태였고, 코 아랫부분이 산짐승에게 먹혀 흉한 모습이었다.
전용해 아들 전종기는 시신을 보자마자 “아이고 아버지”하고 대성통곡했다는 기록이 있다. 양복 주머니에선 전용해가 차고 다니던 시계와 80여 원이 들어 있는 지갑이 나왔다.
일제는 전용해의 시신을 거둔 후 범죄 연구용으로 삼기 위해 머리는 잘라서 포르말린 용액 속에 넣어 보관했다. 그 뒤 해방 등을 거치면서 전용해의 머리가 국과수로 전해져 내려왔다. 얼굴은 산짐승에게 훼손된 상태고, 머리에는 절개한 자국이 남아 있다. 일제가 연구를 위해 절개한 후 실로 꿰맨 것으로 보이는 자국이다.

필자는 <시사저널> 제1057호(2010년 1월26일자)에 ‘국과수에 웬 70년 전 죄인 머리가…’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국과수 지하 부검실에 ‘백백교’ 교주의 잘린 머리와 ‘명월관 기생의 생식기’가 수십 년 동안 보관돼 있다고 최초로 보도했다. 이로 인해 약 70여 년 동안 숨겨졌던 역사적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기생 명월이 생식기는 같은 해 6월14일 법원의 결정에 따라 서울고검의 지휘아래 폐기됐다. 8월24일에는 경기도 남양주 봉선사에서 명월이를 위한 천도재가 열렸다. 이때까지도 백백교 교주 전용해의 잘린 머리는 국과수 지하 부검실에 있었다.
전용해가 저지른 만행은 천인공노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죄인이라고 해서 그 머리를 잘라 보관하는 것은 반인륜적 행위다. 백백교 교주의 죄에 대해서는 역사가 단죄하면 될 것이고, 그 머리는 마땅히 폐기해야 했다.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 대표 등 불교계는 2011년 8월29일 경술국치 101년을 맞아 ‘일제 경찰의 만행을 고발하고 바로잡기 위해 행정안전부에 ’국과수 소장 머리표본‘을 표기하라는 취지의 진정서를 제출했다.
이들은 “본인과 유족의 의사에 반하여 목을 잘라 표본화 하는 것은 반 문명, 반인륜적 행위이며, 대한민국 헌법 10조에서 규정한 ‘인간의 존엄성’에 비춰볼 때 깊은 우려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 진정이유를 밝혔다.
국과수도 여기에 동의했다. 국과수는 백백교 교주의 머리를 폐기하기 위해 구청, 경찰, 검찰, 법원 등과 필요한 절차를 거쳤다.
그리고 2011년 10월25일 서울 시립승화원(벽제 화장장)에서 전용해의 머리를 화장했다. 화장은 이날 오후 4시에 시작돼 약 30분 동안 진행됐다. 화장 절차가 끝난 후 냉각중 이라는 안내 화면이 나왔는데, ‘1번 전용해’라는 글씨가 뚜렷하게 보였다.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이비 종교의 교주가 70년 만에 시립승화원에서 화장될 줄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화장을 마친 유골은 분쇄기에 넣은 후 가루로 변했다. 일반 유골은 흰색인데 반해 전용해의 것은 회색이다.
오랜 기간이 경과하면서 변한 것으로 보여 진다. 그리고 두개골에서 나온 것 치고는 양이 상당했다. 유골은 혜문 대표가 준비해 온 비닐봉지에 담은 후 나무로 된 유골함에 넣었다.




이날 화장장에는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대표와 봉선사 해진스님, 국과수 관계자 등이 화장 과정을 지켜봤다. 기자는 기생 명월이 천도재 때와 마찬가지로 상주 자격으로 참석했다. 혜문 대표와 혜진스님은 망자를 위한 위령의식을 치렀다.
화장이 끝난 유골은 국과수 관계자로부터 유골인수증을 써주고 인수했다. 그리고 남양주 봉선사로 옮겨졌고 10월27일 오전 11시에 망자를 위한 위령제를 지냈다.
혜문 대표는 “부처님 시대 999명을 살인한 앙굴리말라도 부처님께 귀의해 참회하고 불법을 수행한 것처럼 전용해 교주도 불법에 귀의시키기 위해 위령제를 지낸 것”이라고 밝혔다.




이로써 백백교 교주 전용해의 머리는 70년 간 몸통을 잃은 채 머리만 구천을 떠돌다가 땅에 묻히게 됐다. 그 후 전용해의 머리 유골은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도평리에 있는 흥룡사 청암부도에 안치됐다.

흥룡사가 위치한 백운산은 전용해가 활동했던 가평 화학산과 가까운 곳이다. 사실상 백백교 교주 시절 자신이 활동했던 무대로 돌아온 것이나 다름없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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