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사고

탑승객 292명 사망 ‘서해훼리호 침몰사고’

전북 부안군 위도면에 딸린 작은 섬 위도. 섬의 모양이 고슴도치를 닮았다 해서 고슴도치 위(蝟)자와 섬도(島)를 써서 ‘위도’라고 부른다.

서울 여의도 면적(2.95km2)의 4.8배쯤 되는 이 섬은 주위에 6개의 유인도와 24개의 무인도가 있다. 허균의 ‘홍길동전’에 나온 이상향의 나라 ‘율도국’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위도는 아름다운 겉모습과는 달리 아픔과 상처가 많은 ‘비극의 섬’이다. 한때 전국에서 찾아온 관광객들과 낚시꾼들로 붐볐다. 고기잡이도 활발해 섬사람들은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

1993년 10월10일 일요일 아침, 위도 파장금항에는 육지로 나가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당시 위도와 부안 격포항 사이에는 ㈜군산서해훼리 소속의 110t급 여객선인 ‘서해훼리호’가 1일1회 정기 운항했다.

이 배를 놓치면 육지인들은 싫든 좋든 위도에서 꼬박 하루를 더 지내야 한다. 단체관광객이나 낚시꾼들 중에는 직장인들이 많았는데, 배를 못 타면 다음날인 월요일에는 결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다보니 육지인들은 기를 쓰고 배를 타려고 했다.

그런데 이날따라 기상 상태가 좋지 않았다. 돌풍이 불고 파도가 높게 치면서 정상적인 운항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초당 10m~14m로 부는 북서풍 때문에 높이가 무려 2~3m에 이르는 파도가 내리쳤다.

기상청에서도 “파도가 높고 강풍이 불며 돌풍이 예상되므로 항해 선박은 주의를 요한다”는 방송을 내보냈다.

오전 9시에 출발해야 할 배는 날씨 때문에 출항을 미루고 있었다. 출항이 늦어지자 터미널 안에서 웅성이기 시작했다. 미리 표를 구한 손님들은 하늘만 쳐다보면서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시커먼 하늘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린 채 더 험악해져 갔다.

여기저기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선사 측에는 표를 구입한 손님들이 “배는 언제쯤 출항하느냐”는 문의가 빗발쳤다. “그냥 빨리 출발 합시다”라며 거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얼마 후 고심하던 선사 측은 출항을 강행하기로 한다.

이 배의 정원은 승무원 14명을 포함해 221명이다. 그런데 이날 배에 탄 승선인원은 총 362명이나 됐다. 무려 141명이나 정원이 초과된 상태였다. 여기에다 화물도 적재 기준보다 훨씬 초과했다. 처음부터 위험한 출항이었다. 오전 9시40분쯤, 서해훼리호는 출발을 알리는 긴 뱃고동 소리를 울렸다.

출항한 지 30여 분 만인 오전 10시10분쯤 배는 위도면 임수도 부근 해상에 다다랐다. 이때 강력한 돌풍을 만났다. 파도가 3~4m로 높아지고 초속 15~18m의 북서풍이 몰아쳤다. 더 이상의 항해는 무리였다.

이 상태로 계속 가면 기름을 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것과 같았다. 선장도 더 이상의 운항은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회항을 결정했다. 기관장에게 “뱃머리를 돌리라”고 지시했다.

기관장이 뱃머리를 돌리던 도중 서해훼리호는 파도를 맞아 심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이내 중심을 잃더니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배는 순식간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승객들이 아우성을 지르면서 배 안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당시 서해훼리호에는 9개의 구명정이 있었다. 문제는 이중 2개만 제대로 작동되고 나머지는 무용지물이었다. 생존자들 중 일부는 간신히 2개의 구명정에 나누어 타고 목숨을 건졌다. 일부는 배에서 나온 부유물에 매달리며 살려고 발버둥 쳤다.

낚시용 아이스박스를 붙잡고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승객도 있었다. 어떤 승객은 파카 잠바 덕에 물속에 가라앉지 않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아래층 선실에 있던 승객들은 대부분 빠져 나오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배가 순식간에 침몰하면서 서해훼리호에서는 구조신호를 보내지 못했다. 그나마 인근에서 조업 중이던 어선들이 사고를 목격하고 조난 사실을 알렸다. 어선들은 구조대가 오기 전 필사적으로 생존자를 구조해 40여 명의 목숨을 살렸다.

침몰한 지 약 1시간 후 구조 헬기와 군경 함정을 동원한 수색작업이 시작됐다. 강풍과 심한 파도 속에서 구조 작업도 난항을 겪었다. 사고 당일 오후 10시까지 70명의 생존자가 구조되고, 시신 51구를 인양했다. 같은 배에 타고 한 날 한 시에 출발했지만 승객들은 배 안의 상황에 따라 생사가 갈리고 말았던 것이다.

10월15일에는 선장과 기관장, 갑판장의 시신이 침몰한 선박의 통신실에서 발견됐다. 11월2일에는 마지막 실종자의 시신을 인양하면서 구조작업은 완료됐다. 사망자는 모두 292명이었다.

희생자들은 구명조끼 등 안전장비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아 피해가 더 컸다. 사고 발생 뒤 정부 당국은 정확한 승선인원과 명단을 파악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였다.

희생자들 중에는 위도면 주민들이 60여 명으로 가장 많았다. 단합대회 차 위도를 찾았던 육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 전산처 운영체계과 영관급 장교 7명은 전원 사망했다. 낚시 관광을 왔던 대전시 서구 괴정동 한국통신연수원의 교수요원 8명 중 6명이 참변을 당했다.

경제기획원 직원 13명 중 10명도 영영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간부수련회를 떠났던 KBS노동조합 전북지구 집행간부 9명 중 4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주시 완산구 서서학동 동사무소의 경우 전체 직원 20명 중 절반에 가까운 9명이 사망했다. 이밖에 부부 또는 가족단위로 서울에서 원정 낚시를 갔던 사람들의 희생이 많았다. 사고 후 가족을 잃은 위도 주민 중 상당수는 “바다가 싫다”며 삶의 터전이었던 섬을 떠났다.

당국은 사고 7일 만인 10월17일 선체를 수면위로 인양했다. 그러나 인양선 로프가 끊어지면서 12시간 만에 다시 침몰했고, 열흘 후인 10월27일 인양이 완료됐다.

정부는 서해훼리호 침몰사고 원인규명을 위한 중앙사고대책위 합동조사반(반장 이기표 서울공대 교수)을 가동했다. 사고 초기 침몰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됐다. 합동조사반은 배의 구조적 문제, 당시 기상 상황, 인원초과와 과적 등을 놓고 다각도로 분석했다.

그리고 조사결과 발표를 통해 “과적과 정원초과에 따른 선박의 복원력 상실과 사고 순간의 파도각도, 선박의 배수불량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일어났다”고 결론을 내렸다.

합동조사반은 사고 당시 배에는 승선인원 외에도 멸치액젓 9t, 자갈 7.3t 등 16.3t을 적재했는데, 이것은 최대 재화적재기준 보다 6.5t을 더 실은 것이라고 밝혔다. 이 상태에서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해보니 파도 방향이 30도에 불과한데도 배가 전복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해훼리호는 정원초과와 과적으로 인해 배의 무게 중심이 올라가 복원력이 크게 떨어져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추파(배의 뒤편에서 오는 파도)를 맞아 큰 각도로 우회전하다 순식간에 전복했던 것이다.

합동조사반은 또 다른 침몰이유로 해운항만청이 만재흘수선(화물과 승객을 최대한 실었을 때 물에 잠기는 선)을 부적합하게 지정한 것도 한몫을 했다고 밝혔다.

선박복원성 규칙에 따라 선박안전운항을 위한 만재흘수는 1천912m가 돼야 하나, 해운항만청은 이를 2천311m로 지정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서해훼리호는 6.5t의 화물을 실을 수밖에 없는데도 40t을 실을 수 있도록 만재흘수선을 지정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여기에 또 하나의 문제가 지적됐다. ‘위도~격포 간’ 노선은 정부 보조로 운항하는 ‘낙도보조항로’였다. 사고 당시에는 하루에 한 번만 운항했다. 문제는 위도에 입도하는 사람들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는데 노선이 하나다 보니 운항할 때마다 ‘정원 초과 현상’이 일어났다. 위도 주민들에 따르면 1988년부터 위도가 바다 낚시터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주말에는 300~400여명의 낚시꾼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특히 10월에 피크를 이루는데 서해훼리호는 승무원을 빼면 정원이 200여명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운항할 때마다 콩나물시루처럼 승객들이 빼곡하게 배에 탑승하게 된 것이다.

주민들은 끊임없이 관할 기관인 군산해운항만청에 운항횟수를 늘려달라고 탄원했다. 최소 두 차례는 운항해야 승객과 주민들의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번번이 국가보조금을 지원받는 적자항로라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고 전년도인 1992년 서해훼리호의 총 운영금액은 14억2천300여 만 원이었다. 이중 자체 수입은 3억5천만원에 그쳤고, 나머지 10억7천300만원을 국고 보조금으로 충당했다.국고보조금에 대한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너무 컸다. 여기에다 1993년 5월부터는 예산부족을 이유로 국고보조금이 중단된 상태였다.

서해훼리호를 위탁관리하고 있는 ㈜군산서해훼리는 적자분 2억4천200여만원에 대한 국가보조가 없자 사채와 은행대출을 받아 운영했다. 회사의 운영난은 서해훼리호의 무리한 운항을 부추기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관할 기간의 관리도 엉망이었다. 서해훼리호는 군산해운항만청에 운항때마다 승객자수만 무전으로 보고하고 승선자 명단은 보고하지 않았다. 이것도 한 달에 한 번 꼴로 사후 보고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사고 후 몇 시간이 지나도록 정확한 승선자수와 명단조차 확인되지 않은 것도 이것 때문이었다. 서해훼리호 사고는 이미 오래 전에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합동조사반은 당초 논란을 빚어온 선체의 설계결함과 관련해서는 이상이 없다고 밝혔다. 결국 서해훼리호 침몰은 ‘인재에 의한 사고’로 판명됐다. 인양된 서해훼리호는 완전 해체돼 고철로 팔려나갔다.

정부는 사고 책임을 물어 교통부장관과 해운항만청장을 전격 해임했다. 후속 조치로 교통부와 해운항만청 관계 공무원 38명을 문책했다. 해운항만청 산하기관인 해운조합이사장도 해임했다.

그러나 정작 처벌은 솜방망이에 그쳤다. 검찰은 서해훼리호의 정기검사 서류를 허위작성한 군산해운항만청 해무계장 등 공무원 4명과 선박회사 상무 등을 구속기소했으나 법원의 집행유예 선고로 모두 풀려났다. 서해훼리 선주에게는 행정책임을 묻는 정도에서 그쳤다. 결국 300여명이 목숨을 잃은 대형 인재사고였으나 구속돼 실형을 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부는 유족들과 협상을 벌여 사망자 1인당 9천910만원을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보상금액은 모두 282억원이었다. 당시 서해훼리호 선사의 배상능력은 10억 원 뿐이었고, 해운공제조합에서는 73억 원만 지급됐다. 정부는 국민성금 모금운동을 펼쳐 나머지 금액을 충당했다.

사고 초기 위도에는 대통령, 국무총리 등 고위관료들이 줄지어 다녀가면서 개발을 약속했다. 그러나 실제 지원된 금액은 생색내기용에 그쳐 주민들을 실망시켰다. 서해훼리호가 침몰한 지 21년 후에는 세월호 참사가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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