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사건

기생 명월이 생식기 적출 사건


우리나라 과학수사의 산실인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하 국과수)은 1955년 설립된 이래 전국에서 크고 작은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냈다.

2013년 11월에는 서울 양천구 신월동에 있던 본원이 58년간의 서울시대를 마감하고 강원도 원주로 이전했다.

그런데 국과수에는 공공연한 비밀 한 가지가 있었다. 서울 본원 시절 이곳 지하 부검실에는 일제 강점기에 악명이 높았던 백백교 교주 전용해의 ‘머리’와 유명 기생집인 명월관 기생의 ‘생식기’가 포르말린 용액 속에 담긴 채 보관되어 있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한 시대를 풍미했고, 성(性)적인 능력이 탁월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신체 표본이 어떻게 해서 국과수 부검실에 있는 것일까.

일제 강점기에 가장 유명했던 기생집이 명월관이었다. 1909년 대궐 궁내부 주임관과 전선사장으로 있으면서 궁중 요리를 맡았던 안순환이 서울 종로(지금의 동아일보 광화문 사옥 자리) 2층 양옥에 ‘명월관’ 간판을 내건 것이 시초가 되었다.


같은 해 ‘관기 제도’가 폐지되자 궁중의 기녀들이 대거 명월관으로 몰려들면서 명소가 되었다. 명월관에는 주로 고관대작이나 친일계 인물들이 자주 드나들었으며, 문인과 언론인들도 출입했다고 한다. 그러다 1918년에 대형 화재가 나면서 소실되었다.

일제는 왜 명월관 기생의 생식기를 적출했고, 주인이 누구이기에 이런 비참한 모습이 됐던 것일까. 정확한 내력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었다. 국과수에도 기록이 전무했다.

전해지는 말로는 이 기생과 동침을 한 남자들이 줄줄이 복상사를 당했다고 한다. 그러자 이 기생이 사망한 후 일제가 신체 연구용으로 성기를 적출해 포르말린 용액 속에 넣어 보관했다는 것이다. 사망 당시 30대로 알려진 이 기생의 사망 원인도 베일에 싸여 있었다.

<시사저널>은 제1057호(2010년 1월26일자)에 ‘국과수에 웬 70년 전 죄인 머리가…’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국과수 지하 부검실에 ‘백백교’ 교주의 잘린 머리와 ‘명월관 기생의 생식기’가 수십 년 동안 보관돼 있다고 최초로 보도했다. 이로 인해 약 70여 년 동안 숨겨졌던 역사의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는 ‘백백교’와 ‘명월이’가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으며, 전 언론에서 앞다투어 관련 기사를 쏟아냈다.

기사가 보도된 날 문화재제자리찾기는 서울중앙지법에 ‘여성 생식기 표본 보관 금지 청구의 소’(2010가합 4894호)를 제출하고, 국과수에 보관된 인체 표본을 ‘인도적 차원’에서 적절히 조치할 것을 촉구했다.


종교계와 여성계에서는 명월관 기생의 생식기를 당장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보향 불교여성개발원 108인회 부회장은 “일제강점기부터 내려오는 여성의 생식기를 지금까지 국과수가 보관하고 있는 것은 문제다. 이 여성의 신체 표본은 남성적 시각에 입각한 성적 쾌락이나 성적 호기심으로 만들어졌다”며 “명월관 기생은 비참한 시기를 살다간 슬픈 여인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이 여성의 생식기 표본을 매장하거나 화장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얼마 후 국과수에서는 법원 재판부의 현장검증이 있었다. 국과수 측의 안내를 받아 법원 담당 판사와 원고인 혜문 대표가 지하 부검실에 들어가 생식기 표본을 확인했다.

혜문대표는 기생 생식기 표본을 본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두께 1미터쯤 되는 두꺼운 차단문을 4개나 열고 들어가자 큰 냉장 보관기가 하나 있었다. 냉장 보관기 문을 열자, 안은 다시 4칸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맨위쪽 칸을 열어 젖히자 그곳에 명월이 생식기라고 불리는 표본이 모습을 드러냈다.
현장검증을 진행하는 판사의 양해를 얻어 3분간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고 표본을 보는 순간, 난 갑자기 저게 뭐지 하고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사실 ‘명월이 생식기 표본’을 현장 검증하기로 날을 받아놓고, 과연 어떻게 생긴 것이기에 표본까지 만들었는가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다는 사실은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나 명월이가 대단했으면 일제 경찰이 생식기를 오려 표본으로 만들었는가하는 궁금증은 표본을 보는 순간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나는 국과수 측에서 설명을 시작하기 전에는 반쯤 넋이 나가 저게 뭔지 형체조차 알아 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사실 나는 막연히 주먹 정도 되는 크기의 표본이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냥 장기 하나를 떼어낸 정도가 아닐까 단순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실물을 보니 축구공만한 크기였다. 표본은 피부의 탄력이 남은 젊은 여성의 둔부와 생식기를 완전히 오려낸 상태였고, 나팔관까지 이어지는 자궁까지 그대로 도려내어져 있었다.
아마 외과의사가 절단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외과의사가 신체를 절단했다면, 절단면이 저렇게 너덜너덜하게 도려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냥 비 전문가이거나 일반인이 칼로 도려내었기 때문에 절단면이 깨끗하지 않다.
해부방식이 연구용, 자료용은 아닌 걸로 보인다. 앞으로의 연구가치가 있지도 않다. 다만, 일제 경찰이 만들어 놓은 자료였기 때문에 폐기되지 않고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 것 같다.”


일제의 조선여인에 대한 만행이 있었는데도, 해방 후에도 우리는 그것을 연구 표본인 것처럼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법원은 생식기를 파기하라고 판결했다. 2010년 6월14일 국과수는 서울고검의 지휘를 받아 용역업체에 의뢰해 여성 생식기를 폐기했다. 최초 기사가 보도된 지 약 5개월 만에 70년간 이어져 온 일제의 만행에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기사를 쓰고, 소송을 내는데서 끝나지 않았다. 생식기의 주인이 정확히 누구인지를 밝히기로 했고, 그녀의 원혼을 천도하는 재도 지내기로 했다. 필자와 혜문대표는 당시 조선과 일본을 넘나들며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일본 화가 이시이 하쿠테이(石井柏亭, 1882-1958)를 주목했다.

이시이는 우리나라 근대 화가의 선구자인 이중섭 선생의 스승으로도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1918년과 1921년 두 차례에 걸쳐 조선 각지를 돌며 주로 인물화를 그렸다. 이시이와 명월관 기생 ‘홍련’이 사랑에 빠졌었다는 일화는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필자와 혜문대표는 오랜 탐문 끝에 일본 하기시 마쓰모토 시립미술관에 이 여인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2010년 4월8일 이 그림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직접 일본으로 건너갔다.

마쓰모토 시립미술관 측은 특별관람실에서 ‘홍련’의 실물 그림을 공개했다.

그동안 막연하게 ‘명월관 기생’ ‘기생 명월이’로 불리던 국과수 지하실에 있는 기생 생식기의 이름과 얼굴을 찾을 수가 있었다. 그림 속 주인공의 이름은 ‘홍련’(紅蓮)이었다. 그림의 배경으로 볼 때 홍련의 방에서 그린 것으로 보였다.

그림 속의 홍련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함께 같던 일행이 일제히 ‘와’하는 감탄사를 자아냈을 정도였다. 하지만 얼굴 표정은 어둡고 슬펐다. 마치 자신의 운명을 예견한 듯 했다. 당시 명월관 최고의 기생을 상징하듯 왼손에는 금가락지 세 개를 끼고 있었고, 옷고름에는 금 노리개가 달려 있었다.

이 그림을 통해서 국과수 생식기의 주인과 명월관 기생 홍련이 상당히 부합한다는 것도 확인됐다.

이 그림은 1918년에 그려졌고, 1918년은 이시이가 조선에서 활동할 시기였으며 당시 그의 나이는 36세였고, 이 당시 최고 기생집이 바로 ‘명월관’이었다. 1909년에 개업한 명월관은 1918년 화재로 소실되기까지 일본과 조선의 고관대작들이 자주 들렀던 곳이다.

당시 명월관의 최고 기생은 ‘명월이’로 알려진 생식기의 주인공이다. 또한 국과수에 보관 중인 생식기의 상태 등으로 볼 때 이 기생의 사망 시점도 30대로 추정되고 있다. 명월관 최고 기생이었던 ‘생식기의 주인공’과 ‘홍련’이 동일 인물로 볼 수 있는 근거다.

혜문대표는 “여러 정황을 보면 국과수에 보관중인 생식기의 주인공과 홍련은 동일 인물이 확실하다”고 밝혔다.

마쓰모토 시립미술관 관계자는 “이 그림은 1954년에 이시이 선생의 가족들이 마쓰모토 박물관에 기증했다가 2002년 미술관이 개관하면서 옮겨 왔다. 지금까지 이 그림을 보러 온 한국인은 없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2010년 8월24일 남양주 봉선사에서는 수십 년간 구천을 떠돌던 조선 여인 ‘기생 명월(홍련)’의 천도재를 지냈다. 필자는 상주가 돼 홍련의 위패를 , 함께 활동했던 이상근 조계종 중앙신도회 사무총장(현 문화재환수 회복재단 이사장)이 영정을 들었다.


우리가 일본에서 찾아온 홍련의 실제 그림을 영정으로 사용했다. 이로써 수십 년간 구천을 떠돌던 조선 여인 ‘기생 명월이’의 영혼도 편안한 안식처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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