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 명월이’와 ‘백백교 교주’의 상주가 된 사연
지난 2010년 1월 중순쯤이었다.
나는 서울 종로의 한 음식점에서 시민단체 문화재제자리찾기 혜문대표(당시 승려)와 만났다.
이때 혜문대표가 “정 기자님,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지하에 일제강점기 기생의 생식기와 백백교 교주의 머리가 있다는데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금시초문인데요”라고 답했다.
혜문대표는 자신이 알고 있는 얘기를 내게 들려줬고, 우리는 흥미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어처구니없는 그 이야기로 한참동안 대화를 이어갔다.
나는 바로 다음날부터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기초 취재를 한 다음 국과수에 전화했다. 언론담당을 바꿔달라고 했더니 여성 직원이 받았다. 일단 국과수에 인체표본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게 중요했다.

나는 다짜고짜 질문부터 던지지 않았다. 첫 마디에 “무섭지 않으세요?”라고 물었다. 의외의 물음에 직원은 의아해 했다. “네…”.
나는 다시 “국과수의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 같은 여자 입장에서도 안타까울 것 같습니다. 지하 부검실에 여성 생식기와 백백교 교주 머리 표본이 있는 걸 알고 있습니다. 실제 본 사람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어떻게 아셨어요? 사실 좀 무섭기는 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생식기는 여성의 상징인데, 빨리 처리해서 영혼이라도 편히 쉬게 해주고 싶습니다. 제가 국과수를 좀 도와주려고 합니다. 관련해서 질의서를 보낼 테니 답변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국과수 측에 공식 질의서를 보냈다. 얼마 후 국과수의 간부에게 전화가 왔고 “답변서를 만들었는데, 원장님 결제가 나면 바로 보내주겠다”고 전해왔다. 내가 보낸 질의서의 답변도 곧이어 도착했다.
국과수측은 “지금까지는 역사적 의미 때문에 함부로 폐기할 수 없어 비공개로 보관하고 있다. 처리 방법에 대해서는 적절한 관련 규정이 없어 고민하고 있던 중이다. 빠른 시일 내에 해결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이렇게 해서 국과수 지하에 일제강점기 기생의 생식기와 백백교 교주의 머리가 있다는 것을 공식 확인했다.
얼마 후 <시사저널>에 ‘국과수에 웬 70년 전 죄인 머리가…’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국과수 지하 부검실에 ‘백백교’ 교주의 잘린 머리와 ‘명월관 기생의 생식기’가 수십 년 동안 보관돼 있다고 최초로 보도했다.
일제 강점기 때 사이비종교 단체인 백백교 교주의 잘린 머리와 명월관 기생의 생식기가 포르말린 용액에 담긴 채 수십 년 동안 국과수 지하 부검실에 보관되어 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를 통해 약 70여 년 동안 숨겨졌던 역사의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기사가 나오자 혜문 대표는 ‘여성의 생식기 표본을 폐기하라’는 소송을 제기했고,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는 ‘백백교’와 ‘명월이’가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으며, 언론매체들마다 앞다퉈 관련 기사를 쏟아냈다. 이에 국과수는 장례 등 적절한 절차를 거쳐 인체 표본을 처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법원 재판부는 국과수 현장검증을 거친 후 생식기를 파기하라고 판결했다. 2010년 6월14일 국과수는 서울고검의 지휘를 받아 용역업체에 의뢰해 여성 생식기를 폐기했다. 최초 기사가 보도된 지 약 5개월 만에 70년간 이어져 온 일제의 만행에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기사를 쓰고 소송하는데 끝나지 않았다.
생식기의 주인이 정확히 누구인지를 밝혀야 했고, 그녀의 원혼을 천도하는 재(齋)를 지내주어야 했다. 혜문대표와 나는 오랜 탐문 끝에 일본 하기시 마츠모토 시립미술관에 그녀로 추정되는 그림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같은해 4월8일, 그림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직접 일본으로 건너갔다. 막연하게 ‘명월관 기생’, ‘기생 명월이’의 것으로 불리며 국과수 지하실에 잠자고 있던 생식기의 주인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마침내 마츠모토 시립미술관 특별관람실에서 그녀의 진짜 이름인 ‘홍련’을 찾아냈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일본인 화가 이시이 하쿠테이였다.

우리나라 근대 미술을 대표하는 이중섭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는 그는 1918년과 1921년 두 차례에 걸쳐 우리나라 각지를 돌며 인물화를 주로 그렸고, 그와 명월관 기생 홍련이와 사랑에 빠졌다는 일화는 지금까지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다.
1918년은 그가 우리나라에서 활동할 시기였으며 당시 그는 36세였고, 그때 우리나라의 최고 기생집이 명월관이었다. 1920년에 개업한 명월관은 1918년 화재로 소실되기까지 고관대작들이 자주 드나들던 곳이었다.
2010년 8월24일 경기도 남양주 봉선사에서는 수십 년간 구천을 떠돌던 한 많은 여인 ‘기생 명월이’ 홍련의 천도재를 지냈다. 혜문대표는 내게 “정 기자님이 명월이의 존재를 밝혀 기사를 쓰셨으니 상주를 맡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상주가 되어 그녀의 위패를 들었고, 일본에서 찾아온 그림을 영정으로 사용했다. 이렇게 생식기를 적출당한 채 구천을 떠돌던 한많은 여인의 원혼은 편안한 안식처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해 10월25일, 서울 시립승화원(벽제화장장)에서는 백백교의 교주 전용해의 머리가 화장되었다. 나는 이날도 백백교 교주의 상주 자격으로 참석했다.
전용해는 1927년부터 1937년까지 10여년 동안 전국을 공포에 떨게 한 인물로, 이 기간 동안 무려 620여 명에 이르는 신도들을 무참하게 살해했다.
‘백백교 사건’은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역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런 전용해의 상주를 내가 맡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런 것을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으리라.





전용해의 머리 유골은 혜문 대표가 당시 주지로 있던 포천 흥룡사에 묻혀 있다. 혹자들은 악마 같은 백백교 교주까지 챙겨줄 필요가 있었느냐고 하겠지만 그렇다고 잘린 머리를 포르말린 용액속에 담아 국과수에 보관하는 반인륜적인 행위를 그냥 지켜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혜문 대표는 역사의 아픈 상처를 치료하고 진실을 밝히는데 앞장섰고, 지금도 역사바로세우기에 누구보다 열성적이다.
나는 혜문 대표와 여러 일들을 함께 했는데 그중 하나가 기생 명월이와 백백교 교주 사건이다. 혜문 대표에게 깊은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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