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사고

세월호 또 다른 비극 ‘단원고 강민규 교감’ 사망사건

안산 단원고등학교 강민규 교감(52)은 ‘세월호 참사’가 빚은 또 하나의 비극이다.

강 교감은 침몰한 배에서 살아남았지만 스스로 목숨을 던졌다. 그는 2학년생 ‘제주 수학여행’의 인솔 책임자였다. 학생 325명과 교사 13명을 이끌고 제주도로 향하는 세월호를 타면서 운명의 갈림길에 선다.

강 교감은 배가 침몰할 때까지 제자들을 구하느라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이후 저혈당 쇼크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눈을 떴을 때는 배가 아닌 육지였다. 구조 현장에서 실신한 것을 해경이 헬기로 강제 후송한 것이다.

그는 죄책감이 들었지만 아이들의 시신 수습을 우선적으로 도왔다. 해경의 강도 높은 조사도 받았다. “물에 빠져 죽어야지. 왜 혼자만 살아왔느냐”는 유족들의 분노 섞인 절규도 접했다.

강 교감은 하루아침에 죄인 아닌 죄인이 됐다.

학생과 교사 등 200명이 넘는 인원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자 가슴 한켠에 남아있는 죄책감 때문에 괴로워했다. 자식이 실종된 학부모들 앞에서 제대로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당시 단원고 교장이 “(구조된 후) 반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고 할 정도다. 살아있어도 산 것이 아니었고, 산자의 고통을 뼈저리게 느꼈다. 강 교감은 구조된 후 사고대책본부가 꾸려진 진도 실내체육관을 떠나지 않았다.

강 교감에게는 이미 감당할 수 없는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주위에 “나만 혼자 빠져나온 것 같아 괴롭다”고 호소했다.

2014년 4월17일 단원고 교사들이 실종자 가족들이 있는 진도실내체육관 연단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

2014년 4월17일 오후 9시30분쯤 한 학부모로부터 “왜 당신만 살아 돌아왔느냐”는 강한 질타를 받았다. 이 말 한마디에 강 교감의 심리적인 마지노선이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강 교감은 그 후 홀연히 사라졌다.

필자가 이날 오후 11시쯤 세월호 침몰사고 사고대책본부가 마련된 진도 실내체육관에 가보니 단원고 교장과 교사들이 침통한 얼굴로 학부모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은 쫓기듯이 연단을 떠났다.

이때 강 교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강 교감이 없어진 것을 알고 동료 교사들이 찾았지만 휴대전화도 받지 않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학교 관계자가 112에 신고하면서 경찰이 휴대전화 위치 추적에 나섰지만 전원이 꺼져 있었다. 경찰은 병력 100여명을 투입해 체육관 인근 지역을 수색했다.

그리고 18일 오후 4시5분쯤 체육관 뒷산의 소나무에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강 교감의 지갑에서는 편지지에 손글씨로 작성한 유서가 발견됐다.

편지지 2장 분량의 유서에는 “200명의 생사를 알 수 없는데 혼자 살기에는 힘에 벅차다. 나에게 모든 책임을 지워달라. 내가 수학여행을 추진했다. 내 몸뚱이를 불살라 침몰 지역에 뿌려 달라. 시신을 찾지 못하는 녀석들과 함께 저승에서도 선생을 할까”라고 썼다.

강 교감은 죽어서도 ‘선생님’이었다. 그도 1남 2녀를 둔 아버지였다. 그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침몰한 배를 타고 수학여행을 떠난 죄다.

당시 200명이 넘는 학생과 교사들이 참변을 당하거나 실종된 상태이니 인솔 책임자로서 얼마나 괴로웠을지 짐작이 된다.

그 책임을 죽으면서까지 지고 가려고 했다. 배를 버리고, 승객들을 버린 세월호 선장과 너무나 비교 된다.

당시 강 교감에 대한 실종 학생 학부모들의 감정은 ‘분노’라기 보다 아쉬움과 서운함이었다. 어찌됐든 인솔책임자로서 강 교감에 대한 원망스런 마음도 있을 만하다.

필자가 보기에 강 교감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도의적인 책임까지 죽음으로 지고 갔다. 마지막까지 실종 학생들을 염려하고, 그들과 함께 있겠다고 했다. 시신을 불태워 사고 해역에 뿌리고, 시신이 발견되지 않은 아이들 곁에서 선생이 되겠다고 했다. 그의 책임감과 학생들에 대한 사랑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이유다.

강 교감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진도 실내체육관 인근의 야산. 그 후 경찰 병력이 배치됐다.

나중에 세월호 선체에서 나온 휴대전화 복구 결과 강 교감이 세월호 출항을 반대한 정황이 나왔다. 강 교감은 참사 전날이자 출항일인 2014년 4월15일 오후 6시42분 “안개로 못 갈 듯”이라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발송했다.

이어 오후 7시2분에는 “교감은 취소 원하고”라는 메시지가 남았다. 메시지 내용을 볼 때 강 교감은 당시 짙은 안개로 부두에 대기하던 세월호의 출항을 반대한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필자는 4월17일부터 9일 동안 세월호 사고대책본부가 있는 진도 실내체육관과 팽목항을 오가며 취재했다.

강 교감도 학생 구조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다 끝내 이곳에서 마지막을 보냈다. 강 교감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곳은 실내체육관 인근이다. 인조 잔디로 조성된 운동장을 사이에 두고 삥 둘러 산이다.

당시 필자는 아침 저녁으로 체육관 한켠에 있는 운동장을 돌며 강 교감을 생각했다.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그에게 닥친 운명이 너무 가혹하다.

2018년 4월 강 교감의 유족은 강 교감을 ‘위험직무’ 순직으로 인정받게 해달라는 내용의 국민청원을 냈다. 다른 희생 교사들은 ‘위험순직’으로 인정받았지만 강 교감은 ‘공무상사망’이었다. 아직까지 유족의 뜻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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