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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감춘 ‘조선시대’ 소름돋는 연쇄살인마들


왕조국가였던 조선시대는 1392년부터 1910년까지 518년간 이씨가 집권했다.

조선은 나름의 사법체계와 대명률 등 법률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왕의 명령 ‘어명’ 한 마디면 모든 게 무용지물이 됐다. 왕의 비호 속에 왕족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고 법 위에 군림했다.

조선의 제14대 왕 선조는 1567년부터 1608년까지 무려 41년을 집권했다. 그는 8명의 부인에게서 14남11녀를 뒀다. 우유부단하고 무능했던 선조는 자식 교육도 마찬가지였다.

임해군, 정원군, 순화군은 역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포악했다.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고 노비나 궁녀들을 내키는 대로 겁탈하고 죽였다. 이들에게 죽거나 다친 무고한 사람들이 수 백명에 달했다.

그런데도 선조는 자식들을 훈계하거나 처벌하지 않았다. 오히려 방관하거나 외면하면서 피해를 더욱 키웠다. 이들의 악행을 고해바치거나 수사하면 그 신하에게 벌을 주고 귀양을 보냈다. 덕분에 후대에 와서 이들은 선조의 ‘사이코패스 3왕자’로 불린다.

조선의 제21대 왕 영조의 두번째 왕자 사도세자는 아버지와 갈등하다 뒤주에 갇혀 죽은 ‘비운의 왕자’로 알려졌다. 하지만 사도세자 또한 100여명을 죽인 악명 높은 살인마였다.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조선의 제7대왕 세조. 그가 왕위에 오른 후 공신들의 악행은 헤아릴 수가 없다. 특히 영의정까지 지낸 홍윤성은 기분 내키는대로 사람들을 죽였다. 세조는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홍윤성을 비호하며 처벌하지 않았고, 오히려 벼슬을 높여줬다.


역사책에 제대로 기록되지 않았고,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살인마들, 그들은 누구인가.

임해군 이진

조선 14대 임금 선조의 장남으로 이름은 이진(1574년~1609년)이다. 광해군의 친형으로 어머니는 공빈 김씨다. 성질이 난폭해 세자에 책봉되지 못하고 아우에게 세자 자리를 빼앗겼다.

그는 이복 동생 순화군과 함께 ‘왕자’라는 지위를 이용해 살인, 폭행, 강간, 약탈 등을 일삼으며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장남 임해군과 5남 순화군에게 함경도로 가라고 지시했다. 지역의 민심을 다독이고 의병을 규합해 전란을 극복하는데 보탬이 되게 하려는 조처였다.

그러나 두 왕자는 함경도로 들어가 왜군을 피해 회령에 머물렀다. 이때 민심을 수습하기는커녕 노복들을 풀어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고, 폭행하고, 수령들을 핍박해 인심을 크게 잃었다.

그러자 그해 9월 당시 회령에 귀양 와 있던 전주 출신의 아전 국경인이 반란을 일으킨 뒤 백성들과 함께 두 왕자를 결박해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줬다.

이듬해 포로에서 풀려난 임해군의 포악함은 극에 달했다. 미친 듯이 길거리를 헤매다가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하고 노비나 궁녀들을 내키는 대로 겁탈하고 마구 죽였다. 궁노(궁의 사내노비)를 풀어 토지를 멋대로 차지하고 궁노의 입을 막기 위해 남의 지아비를 죽이고 그의 처를 궁노에게 짝지어 주기도 했다.


1603년에는 특진관 유희서가 경기도 포천에서 화적 떼 습격을 받아 살해된다. 대대적인 수사가 벌어지고 얼마 후 용의자 4명이 체포된다. 그런데 이들 모두 옥중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는데, 알고보니 화적 두목으로 지목된 김덕윤은 임해군의 수하였다.

포도청 수사결과 이 사건은 임해군이 유희서의 기생 출신 애첩 애생을 뺏으려다 여의치 않자 애생과 공모해 벌인 청부살인극이었다. 그러나 선조는 임해군을 처벌하는 대신 이 사건을 수사했던 포도대장 변양걸과 사건을 추적하던 유희서의 아들 유일에게 뒤집어 씌운다.

선조의 지시를 받은 의금부는 변양걸에게 모진 형신을 가하며 신문했다. 결국 임해군을 배후로 지목했다는 이유로 파직과 함께 2년6개월형을 내린 후 귀향보낸다. 유일 또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채 장 100대를 맞고 귀향을 떠난다. 선조의 비호를 받던 임해군은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임해군은 선조가 죽고 광해군 즉위 원년인 1608년 역모죄로 몰려 진도에 유배됐다가 다시 강화의 교동으로 이배되었고, 이듬해 38살의 나이에 사사됐다.

순화군 이보

선조의 여섯 번째 왕자이며 이름은 이보(1580~1607)다. 어머니는 순빈 김씨다. 그는 임해군과 마찬가지로 성격이 포악했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명령으로 임해군과 함께 함경도에 갔다가 일본군을 피해 회령에 머물렀다. 그는 왕자 신분을 내세워 온갖 행패를 부리다가 임해군과 함께 백성들에게 붙잡혀 왜장에게 넘겨졌다. 가까스로 풀려난 그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약탈과 살인행각에 나선다.

순화군은 양인과 사대부, 노비 가릴 것 없이 마구 잡아 폭행하고 죽였다. 특히 술만 마시면 이성을 잃고 행패를 부렸다. 물론 처벌을 받지 않았다.

1599년 19살 때 처음 살인을 했는데 피해자는 이웃에 사는 백성이었다. 하지만 ‘왕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누구도 처벌을 주장하지 못하고 쉬쉬했다. 그러자 더욱 기세등등하며 악행과 살인을 일삼았다.


1600년 8월5일 선조의 첫 비(妃)였던 의인왕후가 사망하자 순화군은 의인왕후의 관이 모셔져 있던 빈전에서 궁녀를 겁탈했다. 순화군이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자 선조는 순화군의 군호(君號)를 박탈한 후 수원으로 유배를 보냈다.

귀양가서도 반성은커녕 사치와 향락에 빠지고, 사람들을 죽였다. 형구를 가져다가 향리들에게 형벌을 가해 죽게 만들었고, 소고기와 생선을 올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창고지기 노비의 집을 불태웠다. 또 약주를 가지고 온 계집종의 옷을 전부 벗긴 후 결박해 날이 샐 때까지 풀어주지 않았다.

1601년 2월 군사 장석을시 집에 질병이 돌자 앞을 못 보는 맹인의 아내 무녀를 데려다가 역신을 쫓는 굿을 하고 있었다. 술에 취한 순화군이 길을 가다 이 모습을 보고 이들을 잡아다가 무녀의 위아래 이빨 각 한 개씩을 뽑고, 장석을시의 위아래 이빨 9개를 작은 쇠뭉치로 때려 깨고 집게로 잡아 뺐다.

무녀는 과다 출혈로 현장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장석을시도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신임 부사가 자신에게 인사를 늦게 온다고 온갖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다시 한양으로 불러올려 남대문 밖 인가에 연금했지만 소용없었다. 제멋대로 집을 나와 또 다시 악행이 계속됐다. 1604년 5월에는 길 가던 두 여인을 아무 이유없이 살해했다. 금위군 군사들에게 가택 연금된 뒤 1607년 3월18일 풍병으로 27살에 사망했다. 작위는 사후에 복구됐다.

순화군이 죽은 후 <선조실록>에는 “이보는 왕자다. 성질이 패망하여 술만 마시면 행패를 부렸으며 남의 재산을 빼앗았다. 비록 임해군이나 정원군의 행패보다는 덜했다 하더라도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것이 해마다 10여명에 이르렀으므로 도성의 백성들이 몹시 두려워하여 호환을 피하듯이 하였다”고 적었다.


당시 선조 아들들(임해군, 순화군, 정원군)의 행패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원군 이부

선조의 다섯째 왕자이며 이름은 이부(1580~1619)다. 인빈 김씨의 첫째 소생이다. 선조의 아들 중 임해군, 순화군과 함께 악명을 떨쳤다.

생전의 기록인 <선조실록>에는 “성품이 포악하고 행동이 방탕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과 탄핵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1602년 6월 같은 실록에는 “여러 왕자 중 임해군과 정원군이 일으키는 폐단이 한이 없어 남의 농토를 빼앗고 노비를 빼앗았다”며 “가난한 사족(士族)과 궁한 백성들이 자기의 토지를 잃고도 항의할 수도 없어 중외가 시끄러웠다”고 적고 있다.

그해 9월에는 정원군의 하인들이 선조의 맏형인 하원군의 부인을 납치해 감금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사간원에서 ‘인간의 도리상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난했으나 선조가 나서서 무마했다.

이복형 순화군이 죽은 후 기록된 졸기(卒記)에는 순화군에 대해 “비록 임해군이나 정원군의 행패보다는 덜했다 하더라도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것이 해마다 10여명에 이르렀다”고 적고 있다. 해마다 10명을 죽인 순화군보다 정원군의 악행이 더 심했다면 그의 행실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아들 인조가 반정을 통해 즉위하면서 정원군의 악행은 임해군이나 순화군에 비해 기록이 빈약하다.


인조는 왕이 되자 아버지 정원군을 대원군에서 왕(원종)으로 추존됐다. 그의 묘비에는 “어려서부터 용모가 출중하였고, 태도가 신중했으며, 효성과 우애가 남달라서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라고 써져있는데, 이것은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 인조가 아버지 정안군의 악행을 감추고 미화시켰다고 봐야 한다.

사도세자 이선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의 두 번째 왕자로 이름은 이선(1735-1762)이다.

사도세자는 사람들을 참혹하게 죽인 악명 높은 연쇄살인마였다.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에는 사도세자의 살인 행각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다. 그나마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이나 정조 임금 때 박종겸이 지은 <현고기>에는 사도세자의 살인기록이 비교적 자세히 나온다.

사도세자는 20세쯤 정신병이 발병한다. 특히 ‘의대증’이 아주 심했다. 옷 입기를 싫어하는 것인데 일종의 강박증이자 정신질환이다. 이 때문에 사도세자가 옷을 한번 입으려면 열벌이나 20~30벌은 준비해야 했다. 입지 못한 옷은 귀신이 붙었다며 불태우기도 했다.

이런 증상은 세자가 영조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 생긴 것이다. 22세 때부터는 정신질환이 심해지면서 폭행, 강간, 살인 등의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한다.

영화 ‘사도’의 한 장면.

피해자는 주로 직접 시중을 들던 나인이나 내관이었다. 사도세자는 옷을 입던 도중 심기가 뒤틀리면 그 자리에서 궁녀와 내시들을 때려 죽이거나 칼로 찔러 죽였다. 세자의 곁을 지키던 호위무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내관 김한채를 죽인 사도세자는 그의 목을 잘라 내인들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내수사 담당관 서경달은 내수사 물건을 늦게 가져왔다는 이유로 죽였다. 점치는 맹인은 점을 치다가 말을 잘못했다고 그 자리에서 죽였다. 하루에도 죽인 사람이 여럿일 때도 있었다. 사람을 죽이지 못할 때는 짐승이라도 죽여야 화가 삭았다.

심지어 아끼는 후궁인 빙애(경빈 박씨)를 칼로 찔러 죽였다. 박씨에게는 돌 지난 아들 은전군이 있었는데, 이 은전군도 당시 사도세자의 칼에 맞고 우물에 던져졌으나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기록에는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이 중관, 내인, 노속 등 100여 명에 달한다고 적혀 있다.

그뿐만 아니라 사치를 하느라 동궁전의 창고가 텅 비어있었다. 세자는 번번이 미행을 나가 유흥을 즐기며 사치 향락에 빠지며 타락했다. 영조의 침방 나인을 강간해 임신시키고, 가선이라는 여자를 겁탈하고 궁중에 몰래 들이기도 했다. 사도세자는 지금으로 말하면 연쇄살인마에 망나니였던 셈이다. 결국 뒤주에 갇혀 28세의 나이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홍윤성 세조 때 공신

홍윤성(1425∼1475)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낸 계유정난에 적극 가담했다. 세조가 즉위 후 정난공신 2등에 책록됐다.

그는 세조의 비호아래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성질이 포악했던 그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무나 예사로 죽였다. 늙은 백성의 땅을 마음대로 빼앗고는 돌려달라고 울며 호소하자 돌로 때려죽였다. 자기 집 앞을 흐르는 물에 말을 씻기는 것을 보고는 쫓아나가서 말과 함께 죽이기도 했다.

한번은 가난한 어린시절에 그를 돌봐준 숙부가 찾아왔다. 숙부가 벼슬자리를 부탁하자 홍윤성은 그 대가로 “논 스무 마지기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이에 숙부는 “내 덕분에 잘 먹고 살았는데도 벼슬 하나 안 주느냐”고 따졌다.

그러자 화가 난 홍윤성은 숙부를 때려죽이고 땅에 파 묻어버렸다. 당시 홍윤성의 권세에 눌려 아무 곳에서도 사건을 맡으려 하지 않았다. 숙모는 세조가 온양온천에 행차하기를 기다렸다가 사건의 전모를 고해 바쳤다.

세조는 크게 화를 냈을 뿐 홍윤성을 처벌하지 않았다. 대신 노비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사건을 종결했다.


이렇듯 세조가 공신이라면서 처벌하지 않자 홍윤성은 더욱 기고만장했다. 그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해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올랐다. 온갖 부귀영화와 권세를 누리다가 50세에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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