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수·탈옥

‘유전무죄 무전유죄’ 탈주범 지강헌 사건

1988년 10월8일 오전 7시20분, 서울시 구로구 고척동 영등포 교도소에서 호송버스 한 대가 출발했다.

여기에는 죄수 25명(무기수 1명, 미결수 24명)과 영등포 교도소 소속 교감 김종업씨(54) 등 계호 교도관 10명이 탑승했다. 죄수들은 각각 대전교도소와 공주교도소로 이감될 예정이었다.

호송차는 첫 번째 목적지인 대전으로 향했다.

버스가 중부고속도로에 진입하자 죄수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서로 눈짓을 시작하자 미리 준비한 철사로 수갑과 포승줄을 풀기 시작했다.

오전 9시30분쯤, 호송버스가 안성 톨게이트 부근 일죽 인터체인지 3km 전방에 이르자 죄수 6~7명이 일제히 교도소에서 만든 쇠꼬챙이를 교도관들의 목에 들이댔다.

이들 중 일부는 권총을 소지하고 좌석 앞줄에 앉아 있던 김상록 교도관을 덮쳤다. 김 교도관이 권총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버티자 수갑 등으로 머리를 때려 실신시켰다.

죄수들은 김 교도관이 갖고 있던 권총 1정과 실탄 5발을 탈취하고, 영치금 125만원도 빼앗았다. 이어 나머지 교도관들을 흉기로 위협하며 주먹과 발로 마구 때려 완전히 제압한 후 자신들이 차고 있던 수갑을 채우고, 포승줄로 묶었다.

탈주범 한 명이 버스 운전대를 잡고, 서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정상적인 호송업무를 수행하는 것처럼 비상라이트와 사이렌도 울렸다.

그사이 죄수들은 사물 보따리에서 각자 사복을 꺼내 갈아입은 뒤 교도관들로부터 재소자 기록카드를 빼앗아 그 자리에서 찢었다.

호송버스는 검문검색을 피해 국도를 따라 서울로 들어왔다. 오전 11시55분쯤 서초구 서초동 남부순환도로변 한적한 곳에 차를 세웠다. 그런 다음 탈주를 원하지 않는 미결수 13명과 교도관들을 버스에 남겨둔 채 그대로 달아났다.

교정 사상 최대의 탈주극은 이렇게 시작됐다.

탈주범들은 우면산과 양재동쪽으로 각각 도주했다. 전과 2~8범인 이들 대부분은 특정범죄가중처벌법(특가법) 위반죄로 2심에서 7년 이상의 장기 징역형을 선고받고 대법원에 계류 중인 미결수들이다. 때문에 머리가 모두 길고 사복을 갖고 있어 일반인들과 구별이 어려웠다.

검찰은 서울지검 김종구 제3차장 검사를 본부장으로 하는 수사지휘본부를 설치하고 경찰과 군의 공조체제를 갖춰 탈주범 검거와 탈주 경위 조사에 나섰다.

치안본부(현 경찰청)는 탈주범들 1인당 200만원의 현상금을 내걸고 검거 경찰관과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는 민간인에게 지급하기로 했으며 경사 이하 경찰관을 1계급 특진시키기로 했다. 달아나지 않은 미결수 13명은 낮 12시30분쯤 영등포교도소에 재입감됐다.

탈주범 가운데 손종석(21)은 이날 오후 3시45분쯤 서울과 과천 경계지점인 남태령고개 군부대 앞에서 서울구치소 교도관 등 5명에게 붙잡혔다. 이들 교도관들은 시내버스를 타고 과천에서 서울로 오다 길옆에 러닝셔츠와 재소자용 바지를 입은 그를 발견, 심문한 결과 정신이상으로 공주치료감호소에 가던 손씨인 것을 확인했다.

탈주범 최철호(24)는 오후 3시30분쯤 택시를 타고 서울 도봉구 미아동 집에 도착, 가족들을 시켜 부근 서울 종암경찰서 미농파출소에 전화로 자수의사를 밝힌 뒤 어머니와 함께 파출소로 가다가 미아7동 앞길에서 출동한 경찰에 자수했다.

탈주범 중 장호택(22). 김성진(23), 한재식(30)은 탈주 당일 한남동 룸살롱에서 술을 마시다가 주인의 신고로 검거됐다. 5일 후인 10월14일, 김동연(32)은 자수 의사를 밝힌 뒤 경찰에 검거됐고, 손동완(26)은 신촌에서 붙잡혔다. 이렇게해서 탈주범 12명 중 7명이 자수하거나 검거됐다.

탈주자 명단(12명)

지강헌(35, 특가법, 징역 7년 감호처분 10년), 최철호(24, 폭력, 징역 1년6월), 정호택(22, 폭력, 징역 10년), 김성진(23, 특가법, 징역 20년), 안광술(22, 특가법, 징역 12년), 김동연(32, 특가법, 징역 7년), 한의철(20, 특가법, 징역 15년), 김길호(21, 특가법, 징역 7년),강영일(21, 특가법, 징역 12년), 손동완(26, 특가법, 징역 7년), 한재식(30, 특가법, 무기),손종석(21, 현주건조물방화, 치료감호),

나머지 탈주범 중 지강헌(35), 안광술(22), 한의철(20), 강영일(21)은 함께 움직였다. 이들은 10월14일 오후 8시쯤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임석이씨(70) 집에 침입했다.

이곳에서 임씨 가족 3명과 대전 거주의 부모와 떨어져 이 집에 세든 이옥경양(14·중2) 등 4명을 인질로 삼아 25시간 동안 숨어 지냈다. 지강헌 일당은 10월15일 오후 9시10분쯤 임씨 집에서 나왔다. 강영일은 붉은색 치마를 입고 여자로 변장했다.

이들은 경찰의 검문검색을 피해 시내버스를 타고 북가좌동으로 이동해 대문이 열려 있던 고영서씨(50·동해운수직원) 집에 침입했다. 이때가 밤 10시10분쯤이다. 집안에는 고씨의 부인 김정애씨(52)와 1남3녀 등 5명이 있었다.

탈주범들은 겁에 질린 김씨와 자녀에게 “우리는 탈주범이다. 며칠 쉬어가야겠다. 사람은 안 해칠테니 떨 것 없다”며 권총과 식칼로 위협해 안방에 몰아넣었다. 10시20분쯤, 퇴근한 큰딸 선숙씨(22)와 다음날 오전 0시20분쯤 귀가한 집주인 고씨도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이들에게 인질로 잡히고 말았다.

고씨는 가족들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후 침착하고 태연하게 양주(캡틴큐)와 과일주 등을 꺼내 탈주범들에게 권했다. 긴장이 풀어진 탓인지 탈주범들은 서슴없이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새벽 3시30분쯤, 이들은 발로 걷어차도 모를 만큼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고씨는 슬며시 현관문을 빠져나와 150m쯤 떨어진 서부경찰서 북암파출소에 달려가 신고했다.

고씨는 다급하게 “우리집에 탈주범들이 있다”고 말했다. 경찰은 즉각 서부경찰서 기동대와 5분대기조 무장 경찰 200여명을 출동시킨 데 이어 경찰 1천여 명이 고씨 집 주변을 겹겹이 에워싸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 구급차와 소방차도 부근에 대기시켰다.

이런 사실을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져있던 탈주범들은 새벽 4시40분쯤 둘째딸 경숙양(19)이 지강헌을 깨워 “화장실에 가도 좋으냐”고 물으면서 주인 고씨가 집을 빠져나가 경찰에 신고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지씨는 잠든 일행을 깨워 운동복으로 갈아입게 한 뒤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바깥의 움직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지씨 등은 새벽 4시50분쯤 개 짖는 소리와 함께 경찰의 무전기 소리가 들리자 포위됐음을 직감했다. 지씨는 “가까이 오면 인질들을 죽여버린다”며 공포탄 2발을 발사하며 경찰의 접근을 제지했다.

이때부터 탈주범들은 경찰과 본격 대치에 들어갔다. 새벽 5시부터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10여m 거리에서 경찰과 탈주범들 간의 대화가 시작됐다.

5시25분쯤, 탈주범들은 경찰에게 최루탄 쏘지 말고 현 대치상태를 유지해 줄 것, 자신들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책임자 1명을 만나도록 해 줄 것 등 3개 요구사항을 제시하며 오전 8시까지 자신들의 태도를 결정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텔레비전으로 생중계해달라고 요구했고, 경찰은 그 요구를 수용한다. 이때부터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인질극이 TV를 통해 생중계됐다.

오전 6시30분쯤 한의철의 애인을 시작으로 강영일의 어머니와 남동생, 지강헌의 형과 형수 등 탈주범 가족들이 속속 현장에 도착했다. 이들은 “제발 자수하라”며 눈물로 애원했다.

여기에 자극받은 탈주범들은 유리창을 부수는 등 난폭해지기 시작했다. 안광술은 고씨의 둘째딸 목에 식칼을 들이대고 장독대 위에 올라가 “나는 폭력으로 북부서에 잡혀서 이틀 동안 고문당하고 강도죄를 뒤집어 썼다”고 주장하며 몸부림쳤다.

탈주범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들은 밖에서 들여온 소주 5병과 양주 1병을 병째로 들이키는 등 극도로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보였다.

지강헌은 인질로 삼은 선숙씨 옆에서 권총을 들고 여러 말들을 쏟아냈다.

“돈 없고 권력 없이는 못사는 게 이 사회다. 전경환의 형량이 나보다 적은 것은 말도 안 된다”, “더 살기에 지쳤다” “대한민국의 비리를 밝히겠다. 돈이 있으면 판검사도 살 수 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우리 법이 이렇다”는 등의 말을 쉴새없이 외쳐댔다.

이 사건의 상징이 된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는 강영일이 탈주 중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도 나온다.

오전 10시47분쯤, 탈주범들은 인질 중 고씨의 부인 김씨와 막내아들 장선군(11)을 풀어주며 도주용으로 봉고차를 요구했다. 오전 11시40분쯤, 지강헌은 강영일에게 “밖에 나가 봉고차가 와 있나 보고와라”며 고씨의 셋째딸 대경양(17)과 함께 밖으로 내보냈다.

강씨가 15분 만에 다시 집안으로 들어서려하자 지씨는 “영일아, 내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다. 내 마음을 갖고 가라”며 그의 발 아래로 총을 쏘며 강씨가 돌아오는 것을 제지했다. 지강헌은 나이도 어리고 형기도 7년으로 짧은 편인 강영일을 살려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정오 무렵, 방안에 있던 한의철과 안광술이 총소리에 놀라 “왜 형 마음대로 하느냐. 죽어도 같이 죽어야 할 것 아니냐”며 지씨에게 대들었고, 순식간에 격투가 벌어져 안씨와 한씨가 합세해 지씨를 넘어뜨린 뒤 권총을 빼앗았다.

이어 두 사람은 작은방으로 뛰어 들어갔고, 연이어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이들은 차례로 머리에 총을 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공포에 질린 채 이 방에 웅크리고 있던 경숙양(19)과 윤정양(14)은 눈앞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참극에 놀라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어나왔다.

지씨는 작은방으로 뛰어가 두 동료의 죽음을 확인한 뒤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방바닥에 떨어진 총을 주워들고 다시 골목이 내다보이는 큰 방으로 건너왔다. 그는 밖을 향해 큰소리로 “한의철과 안광술이 자살에 성공했다”고 이들의 죽음을 알렸다.

지강헌은 경찰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미국 팝그룹 비지스의 노래 <홀리데이>가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달라고 요구했다. 경찰이 테이프를 전달해오자 선숙씨를 앞세워 테이프를 받아왔다.

그는 책상 위 카세트 녹음기에 넣은 후 볼륨을 최대로 높였다. 선숙씨를 붙잡은 채 총구를 자신의 오른쪽 머리에 대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음악이 끝나갈 무렵 묘한 미소를 지으며 왼손에 든 유리조각으로 목을 긋기 시작했다.

지씨의 피를 본 선숙씨가 비명을 질렀다.

낮 12시22분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경찰특공대원들이 담을 뛰어넘어 집안으로 돌진하며 지씨를 향해 4발의 총격을 가했다. 그가 쓰러지자 나머지 경찰관들이 일시에 고씨 집으로 몰려 들어가 피투성이인 지씨와 자살한 두 탈주범의 시체를 밖으로 들고 나왔다.

마지막까지 인질로 잡혀있던 인질들은 공포에 질린 채 울부짖으며 풀려났다.

옆집 2층 계단으로 건너뛰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강영일도 붙잡혔다. 다리와 옆구리에 총을 맞은 지강헌은 병원으로 옮겼으나 몇 시간 뒤 과다출혈로 숨졌다. 이로써 지강헌 일당은 강씨를 제외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탈주범들은 인질극 중 인질들에게 깎듯한 예의를 갖췄고, 폭력, 욕설, 협박 등 위해가 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인질과 인질범 모두 서로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했고, ‘오빠’ ‘누나’ ‘아가씨’ 등으로 호칭했다.

인질로 잡혔던 피해자 중에는 나중에 강영일의 재판과정에서 법정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증인으로 나서는 등 강씨 편에 서기도 했다.

탈주범 중에는 인질극에 동참하지 않은 마지막 탈주범 김길호(21)가 남아 있었다. 그는 홀로 도주해 숨어지내며 도주행각을 벌이다 탈주한 지 1년9개월 만인 1990년 7월1일 경찰에 검거되면서 탈주극은 막을 내렸다.

2006년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홀리데이>가 개봉됐다.

지강헌은 누구

지난 1954년 전남 광주에서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집이 가난한 탓에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사회에 나왔다. 어린시절 시인을 꿈꾸었으나 그가 배운 것은 주먹질과 도둑질뿐이었다. 그는 잡 전과까지 합해 총 11범이었다.
지강헌은 1988년 올림픽이 한창일 때 남의 집에 들어가 556만원을 훔쳤다가 붙잡혔다. 상습절도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그는 법원에서 징역 7년에 보호감호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보호감호’는 사회보호법에 따른 보호처분 제도로 재범 가능성이 있는 자의 보호 및 사회 복귀를 위한 직업훈련을 목적으로 보호감호 시설에 수용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사회 적응과 자립을 돕겠다는 취지로 도입됐다.
그러나 형 집행 후에도 격리 수용돼 이중처벌 논란이 있었고, 2005년도에 사회보호법이 폐지되면서 보호감호제도도 사라졌다.보호감호 처분으로 꼼짝없이 17년을 복역하게 된 지강헌은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특히 전두환 동생 전경환의 부패사건을 보면서 그의 분노가 폭발했다. 600억 원을 횡령한 전경환은 징역 7년(실제로는 약 3년 복역 후 사면복권)인데, 600만원도 안 되는 돈을 훔친 자신은 17년을 살아야 한다는 것에 분통이 터졌던 것이다.

지강헌은 돈 있고 권력 있는 자는 특혜를 받고, 돈 없고 권력이 없으면 중형을 받는 대한민국의 불평등한 현실에 분노했다. 그는 구치소에서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며 동료 죄수들에게 불만을 토로했고, 이들이 여기에 동조하자 결국엔 탈주로 이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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