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사건

패터슨의 20년 살인게임 ‘이태원 살인사건’


1997년 4월3일 밤 외국인 밀집지역인 서울 용산구 이태원 거리.

홍익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조중필씨(당시 22세)는 여자 친구와 만나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었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데이트를 즐기던 조씨는 오후 9시50분쯤 여자 친구를 집에 데려다 주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다 소변이 급해 눈앞에 보이는 햄버거 가게 2층 화장실로 들어갔다. 조씨가 소변을 보고 있을 때 화장실로 두 명의 남자가 들어왔다. 한 명은 키와 덩치가 큰 한국계 미국인 에드워드 리(17)였고, 다른 한 명은 체구가 작은 어머니가 한국인인 혼혈 미국인 아더 존 패터슨(17)이었다.

당시 두 사람은 10대 남녀 20여명과 함께 이태원의 한 건물 4층 술집에 모여서 파티를 하고 있었다. 배가 고파진 이들은 같은 건물 1층 패스트푸드점으로 내려와서 햄버거를 시켜 먹었다. 패터슨이 잭나이프(휴대용 칼)로 햄버거를 자르면서, 이들은 칼을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이후 다른 일행이 밖으로 나가거나 4층 술집으로 돌아간 사이 패터슨과 리는 햄버거 가게 화장실로 들어갔고, 거기서 우연히 조중필씨와 마주쳤다. 패터슨의 손에는 잭 나이프가 들려있었다. 리는 패터슨이 칼을 갖고 있는지 알면서도 “아무나 칼로 찔러보라”며 살인을 부추겼다.

당시 벽을 보고 소변을 보고 있던 조씨에게 패터슨은 순간적으로 나이프를 휘둘렀다. 미쳐 방어할 사이도 없이 조씨는 잭 나이프로 무려 9곳이나 찔렸다. 왼쪽 목 부위 네 곳, 오른쪽 목 부위 세 곳, 가슴 부위 두 곳 등이다.

조씨는 그 자리에서 화장실 바닥에 쓰러졌다.

잠시 후 신고를 받은 경찰과 119가 출동했으나 조씨는 피를 많이 흘린 채 숨진 상태였다. 화장실 바닥은 말 그대로 피바다가 돼 있었다. 패터슨은 조씨와 일면식도 아무런 원한도 없었다. 그런데도 마치 살인게임을 하듯 조씨를 살해했던 것이다.


범행 후 이들은 4층 술집 화장실로 가서 몸에 묻은 피를 닦았고, 패터슨은 미국 제8군 기지로 들어가 친구를 만나 바지를 갈아입었다. 피 묻은 옷을 불에 태운 후 범행에 사용한 칼을 버렸다. 다음 날인 4월4일 조중필씨 살해사건은 언론에 크게 보도됐다. 장소가 이태원이라는 특성상 범인은 미군일 것으로 의심받았다.

미군 범죄수사대(CID)는 바짝 긴장했다. 자칫 한국에서 반미감정이 솟구치기라도 하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를 야기할 수 있었다. 사건 다음날 CID에 첩보 하나가 들어온다. 이태원 살인사건의 범인이 미군 군속의 아들인 아더 패터슨이라는 것이다.

CID는 조용히 내사에 들어갔다. 반미감정으로 격화되기 전에 미군에 의한 범죄가 아니라고 밝혀야 했다. 아더 패터슨이 평소 잭 나이프를 소지하고 다닌다는 것과 그가 다혈질에 난폭한 성격의 소유자인 것을 파악했다. CID는 패터슨을 체포한 후 혐의 상당부분을 자백 받았다. 사건 발생 3일 만에 패터슨은 한국 경찰에 인계됐다. 사건은 금방 해결되는 국면으로 접어드는 듯 했다.

그런데 이틀 뒤 엉뚱한데서 꼬이기 시작한다. 패터슨이 조중필씨를 살해할 때 함께 있던 에드워드 리가 자수해 온 것이다. 이로써 한국의 사법당국은 범인과 공범의 신병을 모두 확보했다. 사실상 검찰이 주범과 공범의 범행 정도에 따라 죄의 경중을 가려 기소하는 절차만 남아 있었다.

여기서 또 다시 한심한 일이 벌어진다.

‘다 된 밥에 코 푼다’는 말이 현실에서 일어났다. 검찰에 송치된 아더 패터슨은 범행을 완강히 부인했고, 오히려 에드워드 리에게 죄를 덮어씌웠다.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그러자 담당 검사는 직접 자백을 받겠다며 자신만만해 했다.

영화 ‘이태원 살인사건’의 한 장면.

사법고시까지 패스한 검사가 범인 심문을 영어로 하지 못해 통역을 내세웠다. 통역을 거치다보니 검사는 패터슨을 상대로 날카로운 추궁을 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시신을 부검한 법의학자를 불러 소견을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조중필씨의 뒷목에 ‘위에서 아래로 내려 찌른’ 치명적인 손상이 있는 것으로 봐서 범인은 ‘키가 클 것’이라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주범인 패터슨은 키가 170cm 정도로 작았고, 공범인 에드워드 리는 180cm가 넘는 거구였다. 검사는 이번에야 말로 범인을 확실하게 잡았다고 판단하고, 리를 살인범으로 특정한 후 ‘살인죄’로 기소했다. 그리고 패터슨은 불법 무기 소지와 증거인멸죄만을 적용해 기소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한심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이 범인으로 몰렸을 지를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다. 한 번 꼬이기 시작한 사건은 계속 엇갈렸다. 에드워드 리는 2년에 걸친 재판 끝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97년 10월2일 서울지법, 다음해 1월26일 서울고법에서 살인죄가 인정돼 징역 20년을 선고받았지만, 대법원은 “패터슨 진술의 신빙성이 의심스러워 리가 단독 범행을 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리가 살인을 했다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1998년 9월30일 서울고법은 리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그는 풀려났다. 그사이 진범인 패터슨이 “나 잡아가라”하고 가만히 있었을까. ‘흉기소지’로 복역 중이던 패터슨은 1998년 8‧15 특사로 풀려났고, 검찰이 출국금지를 제때 연장하지 않아 미국으로 출국했다. 말이 출국이지 사실상 도주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조중필씨 유족은 분노했다.

범인을 다 잡았다가 주범은 놓치고 공범을 기소한 검찰, 여기에 출국금지를 해놓고도 제때 연장하지 않아 범인을 미국으로 도주하게 만들었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을까. 이렇게 억지로 연출하고 싶어도 쉽지 않은 연출을 검찰이 했던 것이다. 한 마디로 기막힌 코미디였다.

이에 분노한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 배상을 청구했다. 1심과 2심에서는 원고 패소 판결을 했으나, 대법원은 ‘담당 검사의 과실과 유족들의 정신적 피해 사이에 인과 관계가 인정된다’고 판결했다. 이후에도 유족들은 패터슨에 대한 ‘범죄인 인도 요청’을 하라고 요구했지만, 검찰은 미적거렸다. 살인범을 놓쳤으면 후속조치라도 신속하게 했어야 하는데도 검찰은 못 들은 척 했던 것이다.

검찰을 움직인 것은 다름 아닌 영화였다.

사건이 일어난 지 12년만인 2009년 <이태원 살인사건>이라는 영화가 개봉됐다. 분노한 여론은 검찰에 사건의 재조사를 강하게 요구했다. 여기에 놀란 검찰은 패터슨이 출국한 지 10년이 지난 2009년 9월 미국 당국에 ‘범죄인 인도’를 요청했다.


2011년 10월10일 출국 후 행적이 묘연했던 패터슨이 같은 해 5월 미국 수사기관에 검거돼 한국 송환재판을 받았다. 검찰도 같은 해 12월 패터슨을 다시 살인 혐의로 기소했다. 살인죄 공소시효(15년) 만료를 불과 4개월여 앞둔 때였다.

미국 LA법원은 2012년 10월 패터슨에 대해 한국 송환 결정을 내렸다. 패터슨은 여기에 불복하며 ‘인신보호청원’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시간 끌기에 나섰다. 미국 사법부의 범죄인 인도 재판이 3심까지 진행된다는 것을 이용해 송환시기를 늦췄던 것이다. 하지만 1심과 항소심, 뒤이은 재심에서마저 패해 국내 송환이 성사됐다.

아더 패터슨은 사건발생 18년 만인 2015년 9월 23일 새벽 인천공항을 통해 국내로 송환됐다. 인천항에 도착한 패터슨은 곧바로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패터슨의 변호인으로는 국선 변호인이 선임됐다. 패터슨은 무죄를 주장하며 의기양양했다.

2016년 1월 29일 1심 법원인 서울중앙지방법원은 패터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당시 미성년자였던 패터슨에게 내릴 수 있는 법정 최고형이다.

현행 특정강력범죄처벌법 4조는 ‘범행 당시 나이가 18세 미만인 소년을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해야 할 경우 최대 징역 20년까지 선고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1979년 12월생인 패터슨은 범행 당시 17세 4개월이었다.

재판부는 “패터슨은 범행을 자백하고 피해자 가족에게 용서를 빌 수 있는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도 공범인 리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자신의 억울함을 주장하는 태도로 일관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재판을 받는 지금까지 자신의 억울함만을 강변하는 패터슨의 태도로 볼 때 20년의 형은 무겁지 않다”고 판시했다.

에드워드 리에 대해서는 공범으로 봤다.

재판부는 “리는 패터슨이 칼을 갖고 있는지 인식한 상태에서 ‘아무나 칼로 찔러보라’며 부추겼으며, 범행 직후 ‘우리가 재미로 어떤 남자를 칼로 찔렀다’며 범행사실을 과시하기도 했다”며 “이 같은 행동에 비춰볼 때 리와 패터슨이 공모해 살인을 저질렀다는 점을 넉넉하게 인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같은 해 9월 13일 항소심에서도 1심 판결이 유지됐다. 2017년 1월25일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살인 혐의로 기소된 패터슨의 상고심에서 징역 20년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피고인이 피해자를 칼로 찔러 살해한 사실이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충분히 증명됐다고 본 원심의 판단은 정당하다”고 판시한 것이다.

이로써 패터슨의 무자비한 살인게임도 20년 만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 사건은 사람을 잔인하게 죽인 범인도 문제지만, 그 범인을 도주하게 만든 한국 검찰의 무능은 더 질타를 받아야 마땅하다.검찰이 제대로 했더라면 비명에 아들을 잃은 유족들이 20년 이라는 ‘통한의 세월’을 보내지 않았어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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