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 초등학생 ‘혜진·예슬’ 납치 살해사건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8동에는 이혜진양(10)과 우예슬양(8)이 살았다. 혜진이가 초등학교 4학년, 예슬이가 2학년이었다.
2007년 12월25일 크리스마스 날, 두 아이는 동네 놀이터에서 함께 놀다가 친구들과 헤어진다. 그런데 두 아이들은 밤이 늦었는데도 귀가하지 않았다. 애타게 기다리던 부모들은 다음날 오전 경찰에 미귀가 신고를 접수했다.
경찰은 비공개로 수사에 나섰다. 동네 인근의 폐쇄회로(CC)TV를 확보해서 보니 실종 당일 오후 4시10분쯤 안양8동 안양문예회관(현 안양아트센터) 앞의 야외 공연장에서 아이들이 찍힌 것이 확인됐다. 이어 5시쯤에는 문예회관 인근 슈퍼마켓 주인에게도 목격됐는데, 이게 마지막이었다. 그 뒤 아이들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체 아이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경찰의 대대적인 수색이 시작되고, 아이들을 찾는 전단지가 배포됐다. 경찰은 신고 보상금을 2천만 원에서 3천만 원으로 올렸다.
하지만 수사는 더 이상 진척되지 않았다.
단서가 될 만한 제보를 애타게 기다렸지만 그마저도 없었다. 하늘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수사는 점점 미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아이들의 가족들은 대문을 열어 놓은 채 매일 밤을 지새며 딸이 돌아오기만을 바랐다.
그러던 2008년 3월11일 수원시 인근 호매실 칠보산에서 동원 훈련중이던 예비군이 땅속에서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뼈를 발견한다. 바로 혜진이의 시신이었다. 사건발생 77일만이다.

예슬이의 시신은 실종 88일만에 시화호 하천에서 토막난 채 발견됐지만 가슴부위는 끝내 찾지 못했다.
딸이 간절히 살아있기를 바랐던 혜진‧예슬이 부모는 하늘이 무너지듯 했다. 그것도 시신이 잔인하게 훼손돼 돌아와 부모들은 가슴 찢어지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누가 이 아이들에게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것일까. 전 국민은 공분했고, 경찰은 수사본부를 꾸려 범인 검거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러다 한 남성이 유력한 용의선상에 올랐다. 두 아이가 실종된 당일 렌터가 회사에서 차량을 빌린 후 다음날 반납한 남성이 있었다. 그는 39세의 정성현이었다.
경찰은 해당 차량의 트렁크에서 혈흔을 발견하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에 감정을 의뢰했다. 그리고 두 아이의 DNA와 일치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경찰은 정씨를 유력 용의자로 특정하고 검거를 위해 수사력을 집중했다.
예슬이의 시신이 발견된 후 닷새만인 3월16일 오후 9시25분쯤 정씨는 충남 보령의 어머니 집에 숨어 있다가 검거된다. 경찰은 정씨를 수사본부가 있는 안양경찰서로 압송했다.

기막힌 것은 범인 정씨는 혜진이의 집에서 불과 130m 떨어진 곳에 살고 있던 이웃이었다. 지하 월세방에서 독신으로 살며 밤에는 대리 운전으로 돈벌이를 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웃집 아저씨가 잔혹한 살인범으로 밝혀지자 경찰도 놀라고 숨진 초등학생 가족들도 놀랐다.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도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정씨는 처음에는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다 “두 아이를 교통사고로 숨지게 한 후 당황해서 시신을 유기했다”고 말을 바꿨다. 경찰이 차량을 살펴본 결과 교통사고 흔적이 없었다고 재차 추궁하자 “두 아이를 납치해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아이들이 실종된 날 정성현의 행적도 드러났다. 그는 이날 할 일 없이 빈둥거리다 집에서 술을 마셨고, 밖에 나와 뛰어노는 아이들을 목격했다. 그는 혜진‧예슬이에게 접근해 “아픈 강아지를 돌봐 달라”며 자신의 집으로 유인한다.
그리고는 아이들을 성폭행 하려고 했으나 저항해 실패했다. 범행이 들통날까 두려웠던 정씨는 아이들을 살해한 후 시신을 잔혹하게 훼손해 유기했다.
경찰은 정성현이 예슬이의 시신을 토막내 유기했다고 진술한 경기도 시흥시 군자천을 집중수색했다.

여기에는 군 병력도 동원됐다. 얼마 후 이곳에서 예슬이의 토막 난 오른팔과 왼쪽 팔 그리고 오른쪽 다리를 추가로 수습했다.
그러나 예슬이의 일부 몸통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나주봉 ‘전국미아실종가족찾기 시민의 모임'(전미찾모) 회장은 “예슬이 부모는 ‘시화호 물을 다 퍼서라도 딸의 몸을 다 찾고 싶다’고 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고 전했다.
정성현은 유년기에 아버지로 부터 폭력과 학대에 시달렸고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에는 친구들로부터 잦은 괴롭힘에 시달려 고등학교 생활에도 적응하지 못했다.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사귀었던 여성들에게 일방적으로 실연을 당하면서 여성에 대한 배신감과 적개심, 혐오증을 갖게 됐고, 이로 인해 범행을 계획했다는 것이 정씨의 진술이다.
정성현은 두 아이들만 죽인 것이 아니었다. 군포에 사는 부녀자 3명을 토막 살해한 것이 추가로 드러났다. 2009년 2월 대법원은 정성현에게 사형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그러나 정씨는 진정으로 반성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형이 확정된 뒤 정씨는 자신의 사건을 담당했던 경찰관과 검사, 교도관, 기자 등을 상대로 잇달아 소송을 제기했다. 이 가운데는 ‘국과수의 감정서를 왜곡했다’며 경찰관을 상대로 낸 소송도 포함됐다.
정씨는 이 소송에서 최종 패소했지만 당시 정씨의 패소확정 사실을 보도한 언론사를 상대로 또 소송을 제기했다. 물론 정씨가 낸 소송은 줄줄이 패소했다. 정성현의 눈에는 자기가 죽인 아이들과 이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유족들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정성현이 사형선고를 받은 이후 예슬이 가족은 외부와 연락을 끊고 자취를 감췄다.
혜진이 가족의 불행한 삶은 계속됐다. 혜진이가 실종된 후 아버지 이창근씨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혜진이에게는 오빠와 언니가 있었다.
아버지 이씨는 유난히 막내 혜진이를 아끼고 예뻐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었다. 그런 딸이 살인마에게 잔인하게 살해된 후 이씨는 하루하루 술에 의지해 버텨왔다.
딸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그리움이 이씨의 가슴을 더욱 짓눌렀다. 술을 마신 후에는 혜진이가 보고 싶어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주변의 권유로 심리상담치료를 받기도 했지만 사랑하는 딸을 잃은 고통은 약물로도 치료되지 않았다.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면서 술에 의지하다보니 이씨의 건강은 말이 아니었다. 눈만 뜨면 밥 대신 술을 찾았다. 결국 2014년 3월5일 안양 자택에서 혜진이 곁으로 갔다. 향년 53세. 이씨의 시신은 화장한 후 의왕시 청계동 공원묘지의 혜진이 옆에 묻혔다.
혜진이 아버지와 호형호제하며 지냈던 나주봉 회장은 “혜진이 아버지는 원래 술을 못 마시는데, 중독성이 됐다”며 “나도 부음을 듣고 충격을 많이 받았다. 친형제처럼 생각하고 많이 아껴줬다. 소주 한 잔 마시고 우는 모습이 생각난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남아있는 가족들의 생계도 막막했다. 그동안 혜진이 엄마가 시간제 파출부나 식당 일 등을 나갔지만 집안 살림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도시가스비도 못 낼 정도로 힘들었다고 한다.
당시 고교 2학년이었던 혜진이 오빠는 끔찍했던 사건을 지우고, 굳세게 살아보려고 해병대를 자원입대했다.
하지만 연평부대 복무 중, 북한의 포격사건 후유증으로 잠을 자지 못하는 등 불안증세로 고통스러워했다. 단란했던 한 가정의 행복이 악마의 탈을 쓴 살인마로 인해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나주봉 회장은 “혜진이와 예슬이를 잊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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