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사건

김길태 ’13살 소녀’ 납치 성폭행 살인사건


2010년 2월 24일 저녁, 부산 사상구 덕포동의 좁은 골목길에 어둠이 짙게 깔렸다. 중학교 입학을 불과 6일 앞둔 이유리양(13)은 집 안방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맞벌이인 부모가 비운 집안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오후 7시 7분, 이양은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와 3분 동안 통화한다. 밤 9시쯤, 중학생인 오빠(15)가 귀가해보니 집안은 불이 꺼져 있고, 현관문은 잠기지 않은 채 닫혀 있었다. “유리야!” “유리야!”를 연신 불렀지만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전기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켰더니 방 안에는 동생 대신 분신과도 같았던 검은 뿔테 안경과 휴대전화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오빠는 안경을 보고 덜컥 겁이 났다.

사라진 소녀와 남겨진 검은 뿔테 안경

이양은 왼쪽 시력이 0.2, 오른쪽이 0.5로 안경 없이는 코앞의 사물조차 분간하기 힘들다. 이런 동생이 안경을 두고 사라졌다는 것은 신변에 이상이 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더욱이 다락방과 이어진 화장실 바닥에는 누군가 밖에서 타고 들어온 듯한 250mm 크기의 진흙 묻은 운동화 발자국 몇 개가 찍혀 있었다.

아들의 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어머니(당시 38세)가 집으로 달려왔다. 밤 10시 50분쯤에는 “집에 있던 딸이 없어졌다”며 경찰에 실종신고를 접수한다. 이양의 가족은 다급했지만 경찰은 느긋했다. “요즘 아이들 며칠씩 나갔다가 들어온다”며 단순 가출을 배제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우리 아이는 안경 없이는 나갈 수가 없다”고 간곡하게 말했지만 경찰은 즉시 수색에 나서지 않았다.

수사는 다음 날 시작된다. 실종사건은 촌각을 다투는데, 이미 골든타임을 놓친 시점이었다. 경찰은 정황상 납치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했다. 실종 사흘째인 2월 27일에는 공개수사로 전환하고 전국에 ‘엠버 경보’를 발령했다.

우선 이양의 집과 인근 주택에 대한 정밀 감식을 벌였다. 화장실에 찍힌 운동화 발자국은 국립과학수사연구연에 보내 감정을 의뢰했다. 전단지 2만 장이 뿌려지고 헬리콥터가 하늘을 돌았지만, 이양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동네는 재개발을 앞두고 원주민들이 떠난 빈집들이 즐비했다. 그 어둡고 텅 빈 공간 어딘가에 아이가 갇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덕포동 일대를 휘감았다.


실종 7일째인 3월 2일, 드디어 범인의 윤곽이 드러난다. 화장실에서 나온 족적과 인근 빈집에서 나온 지문을 대조해보니 한 사람의 것과 일치했다. 그는 수차례 성범죄 전과가 있었다. 한 달 전에는 덕포동에서 길 가던 여성(22)을 끌고가 10시간 동안 감금하고, 세 차례에 걸쳐 성폭행한 혐의로 지명수배를 받던 김길태(당시 33세)였다.

그는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란 인물이었다. 복역기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사상구 덕포동과 모라동, 주례동 일대에서만 생활했고, 과거 범행들 모두 이 지역에서 저질렀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경찰은 김길태를 이양 실종의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해 공개수배한다. 그나마 김씨가 성범죄 전력에도 인명을 해친(살해한) 사실이 없었기에 이양이 살아 있다는 한 가닥 희망을 걸 수 있었다.

경찰은 김길태 검거와 이양을 찾기 위해 수사력을 집중한다. 집 주변을 권역별로 나눠 전담팀을 배치하고, 집집마다 수색에 나선다. 이 잡듯 뒤지던 3월6일 밤 9시20분쯤, 이양의 집에서 직선거리로 50m (도보 약 100m) 떨어진 이웃집 옥상에서 수색 대원들의 발길이 멈췄다.

다세대주택 보일러실 위에 놓인 파란색 물탱크 뚜껑을 열자 폐가재도구와 벽돌, 그리고 하얀석회 가루가 뒤섞인 더미가 보였다. 그 아래에는 손발이 노끈으로 묶인 채 옷이 벗겨진 소녀의 시신이 있었다.
시신을 밖으로 꺼내보니 차갑게 식은 이양의 주검이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울혈 현상을 보인점으로 미뤄 성폭행을 당한 뒤 목 졸려 숨진 것으로 판단됐다. 범인은 시신의 부패를 늦추고 흔적을 지우기 위해 석회 가루를 붓는 치밀함을 보였다.

이 집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으나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시신에서 채취한 모발과 타액 등의 DNA를 감정한 결과, 김길태의 것으로 최종 확인됐다.

수사망 비웃는 빌라 옥상 사이의 도주극

김길태는 쉽게 잡힐 듯 했지만 유령처럼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자신이 나고 자란 사상구 일대의 지형지물을 손바닥 보듯 꿰고 있었다.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옥상을 타고 넘으면 경찰의 포위망을 비웃듯 빠져나갈 수 있는 구조였다.

경찰은 김길태가 멀리 도망가지 못했을 것으로 판단했다. 연고가 없고 돈도 없는 그가 익숙한 동네를 벗어나기는 힘들었다. 실제로 김길태는 경찰 수천 명이 골목을 메우고 있는 와중에도 인근 빈집을 전전하며 라면을 끓여 먹거나 시장에서 음식물을 훔치며 버텼다.



이양의 시신이 발견되기 전인 3월3일에는 빈집을 수색하던 경찰과 맞닥뜨렸으나, 3m 높이의 담벼락을 뛰어내려 달아나는 괴력을 보이며 추격을 따돌렸다. 경찰이 “저놈 잡아라”라는 고함과 함께 김씨를 따라 담 아래로 뛰어내렸으나 발목을 다치는 바람에 더 이상 뒤쫓지 못했다. 인근에 있던 경찰관 두 명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정작 검거는 우연과 필연이 겹친 순간에 이뤄졌다. 3월10일 오후 3시쯤, 덕포동의 한 빌라 인근을 수색하던 경찰이 옥상 문을 여는 순간, 김씨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남자가 옆 빌라 옥상으로 몸을 날리는 것을 목격했다.

경찰이 “길태다!”라고 외치며 뒤를 쫓았다. 김길태는 빌라 사이의 좁은 틈에 등과 발을 지지하며 1층으로 내려와 도주를 시도했다. 하지만 주차장 입구에서 잠복 중이던 경찰관들에게 가로막혔고, 거세게 저항하던 끝에 마침내 수갑이 채워졌다. 부산 시내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15일간의 도주극이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검거 직후 김길태는 입을 굳게 닫았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하지만 경찰이 제시한 DNA 증거와 거짓말탐지기 앞에서는 버틸 재간이 없었다. 수사관의 끈질긴 설득 끝에 그는 3월 14일 시신 유기를 먼저 자백했고, 이튿날 살인 사실까지 털어놨다.

그의 자백을 통해 우리 사회의 안전망이 얼마나 허술했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김길태는 사건 당일 저녁, 다락방 창문을 통해 이양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겁에 질린 이양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고 위협해 밖으로 끌고 나왔다. 그가 향한 곳은 인근 무속인이 사용하던 빈집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이양을 성폭행했다.

고통과 공포에 못 이겨 소리를 지르자, 김길태는 비명이 밖으로 새 나갈 것을 두려워해 손으로 이양의 코와 입을 막고 목을 강하게 눌렀다. 단 5분 만에 숨이 멈췄다. 살해 후에는 시신을 가방에 넣어 약 39m 떨어진 이웃집 옥상 물탱크로 옮겼다. 발견되지 않도록 주변에 있던 시멘트 가루(석회)를 물과 섞어 시신 위에 붓고 벽돌과 타일을 얹어 뚜껑을 닫았다.



김길태는 납치와 성폭행 살해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된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만취 상태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주장을 폈다. 1심은 사형을 선고했으나, 2심 재판부는 그의 불우한 성장 환경과 정신 상태의 불완전성을 참작해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이에 유족과 시민들은 “피해자의 인권보다 가해자의 환경이 우선이냐”며 분노했다.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되면서 그는 영원히 사회로부터 격리됐지만, 피해 가족의 삶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무너진 뒤였다.

시스템의 구멍, 우리에게 남겨진 경고

김길태 사건은 한국 경찰 역사에서 가장 뼈아픈 실책 중 하나로 꼽힌다. 가장 큰 문제는 ‘안일함’이었다. 한 달 전 강력 사건을 저질러 수배 중이던 그는 멀리 도주하지 않고 연고지인 사건 현장을 맴돌았다. 그런데도 경찰은 김길태를 붙잡지 못했다.

수배 중이던 강력범이 연고지인 덕포동 재개발 구역을 제 집처럼 드나들며 추가 범행을 준비하고 있었는데도, 경찰의 감시망은 작동하지 않았다. 만약 경찰이 1월 사건 이후 김길태의 거주지 주변을 철저히 감시했다면 이양의 비극은 ‘막을 수 있었던 사건’이었다.

이양 사건 발생한 후에도 마찬가지다. 경찰은 수차례 검거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형식적인 수색으로 번번이 허탕을 쳤다. 심지어 김길태는 경찰이 수색을 벌이는 와중에 빈집 옥상을 타고 넘나들며 라면을 끓여 먹고 잠을 잤다.

실종 직후의 초동 수사 실패는 뼈아팠다. 이양의 안경과 휴대전화가 방에 남겨진 납치 징후를 무시하고 가출에 무게를 두고 골든타임을 허비했다. 수천 명의 인력이 투입된 수색 과정에서도 피해자의 집에서 불과 50m 떨어진 물탱크를 11일 동안이나 찾아내지 못한 점은 공권력의 무력함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이는 보여주기식 수색이 아닌, 현장의 구석구석을 훑는 정밀한 수사 체계가 부재했음을 의미한다.

이 사건 이후 우리 사회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서야 변화를 시작했다. 성범죄자 신상 공개 제도인 ‘성범죄자 알림e’가 강화됐고, 상습 성범죄자에 대한 위치추적 전자장치(전자발찌) 부착과 화학적 거세 논의가 본격화된다.


특히 재개발 구역 등 치안 사각지대에 폐쇄회로(CC)TV를 확충하고 범죄 예방설계(CPTED)를 도입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제도의 강화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시선이다. 사회에서 고립된 이들에 대한 관리와 보호관찰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같은 사건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김길태 사건이 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공권력의 나태함과 사회적 무관심이 결합할 때, 가장 약한 고리인 아이들이 희생된다는 것이다. 그때 물탱크 안에서 발견된 그 참혹한 진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범죄를 저지른 개인의 악마성에만 분노할 것이 아니라, 그런 괴물이 활개 칠 수 있도록 틈을 내준 우리 사회의 빈틈을 메우는 일에 끝없이 매달려야 한다. 그것만이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어린 넋을 진정으로 기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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