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지옥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은 한국판 홀로코스트로 불린다.
지난 1975년 부산시와 부랑인일시보호사업 위탁계약을 맺은 형제복지원은 국가보조금을 지원받으며 3000여 명의 부랑인을 수용했던 전국 최대 규모의 사회복지기관이었다.
부랑인 선도를 목적으로 해마다 20억원씩 국고 지원을 받고 있었다. 형제복지원은 트럭을 이용해 전국 각지를 돌며 역이나 길거리에서 주민등록증이 없는 사람이나 노숙자 등을 강제로 끌고 가 불법 감금하고 강제노역을 시켰다.
형제복지원에 끌려간 것은 부랑인들만이 아니었다. 전국의 역이나 길거리에서 길을 잃은 어린 남매, 중학생, 고등학생, 일반인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트럭에 강제로 태워 끌고 갔다.
이렇게 무차별로 사람들을 끌고 간 것은 인원수 만큼 지원금이 나오기 때문이다.
형제복지원은 무법지대였다. 마치 군대와도 같았다. 수용자들에게는 ‘번호’가 붙여졌고, 머리를 짧게 깎인 채 아동소대, 여성소대, 성인소대로 분류돼 내무반 생활을 해야만 했다.
똑같은 파란색 운동복을 입고 ‘소대장’과 ‘중대장’의 감시 아래, 매일 강도 높은 제식훈련이 이어졌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강제노역을 시켰으며, 저항하면 굶기고 폭행하거나 여성들을 상대로 성폭행이 만연했다.
심지어는 죽이고 암매장까지 했다. 이런 식으로 12년 동안 무려 551명이 사망했고, 일부 시신은 300~500만 원에 의과대학의 해부학 실습용으로 팔려나갔다. 또한 원장 박인근(당시 58세)은 자신의 땅에 운전교습소를 만들기 위해 원생들을 축사에 감금했고, 하루 10시간 이상의 중노동을 시켰다. 원생들은 하루하루 지옥같은 생활을 했다.
형제복지원에 수용됐던 한종선씨는 저서 ‘살아남은 아이’를 통해 당시 상황을 생생히 묘사했다. 한씨가 가족과 함께 복지원에 수용된 것은 9살 때인 1984년이다. 그는 이곳에서 지옥을 목격했다. 일상화된 구타와 고문, 기합 등은 어린 한씨의 삶을 송두리째 바꿨다.
한씨의 누나는 성폭행을 당한 뒤 정신분열증을 얻었다. 한씨의 아버지는 정신병원을 전전하고 있다. 한씨의 가족처럼 멀쩡한 상태로 잡혀와 형제복지원에서 정신이상자가 되거나 지체장애를 얻은 사람은 비일비재했다.
형제복지원에서 형을 잃은 한 피해자는 “형의 시체를 봤는데 온통 멍이었다. 두들겨 맞은 흔적이었다. 천을 확 펼쳐보니까 온몸에 피멍이었다. 대체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형제복지원은 사망 진단서를 작성해주는 병원까지 모두 연계돼 있었다.
한종선씨의 저서를 보면 추리닝 한 벌과 고무신을 지급받고 거의 매일 같이 일했다. 날이 더운 건 그나마 견딜만 했지만 몸이 꽁꽁 얼어붙는 추위는 원생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모든 원생들의 손과 발이 퉁퉁 부어 동상이 걸리는 날이면 죽음의 그림자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고된 노역에도 사료나 다를 바 없는 식사가 제공됐다. 썩은 젓갈과 깍두기가 반찬의 전부였다.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이들은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군가를 부르며 구보를 돌았다. 학대를 견디다 못한 몇몇 원생들은 탈출을 시도했다. 하지만 조교에게 발각돼 죽임을 당했다. 시체는 아무도 모르게 인근 야산에 매장됐다.

부산 진구 범전동에 사는 김대우씨(50대)는 초등학생 때 세 번이나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다. 첫 번째는 3학년 때인 1981년 부전역 근처였다. 김씨를 발견한 경찰관들이 무작정 부전역 파출소로 잡아갔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탑차(피해자들은 닭장차로 명명)에 실어 형제복지원으로 끌고 갔다. 김씨는 “도와주세요”라고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아저씨, 저는 집도 있고 초등학생’이라고 했으나 대답 대신 무차별 구타세례를 받았다”고 말한다.
이렇게 김씨는 열 살의 나이에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갔다. 그는 이곳에서 일 년 정도 막노동을 했다. 어른들과 같이 벽돌을 찍고, 날랐다. 구타와 기합은 일상적으로 이뤄졌다. 심지어 성추행까지 당했다. 김씨는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피똥까지 쌌다”며 울분을 토했다.
그가 형제복지원을 나간 것은 일 년 정도 지났을 때다. 김씨가 갑자기 사라지자 그의 이모가 수소문 끝에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데려갔다. 그러나 김씨의 ‘지옥 탈출’은 시한부였다. 한 달도 안 돼 다시 끌려왔다. 당시 부전역전 파출소 옆에 살았던 김씨는 어느 날 경찰관들에게 붙잡혔고, 1차 때처럼 다짜고짜 차에 실려 형제복지원으로 갔다.
그는 이렇게 형제복지원에서의 생지옥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일 년 정도 지날 때쯤 이번에는 원양어선 선원이던 아버지가 와서야 두 번째로 지옥문을 나설 수 있었다. 김씨와 형제복지원의 질긴 악연은 끊어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배를 타러 간 후 서면 시립도서관 앞에 있다가 또 경찰관들에게 붙잡혀 형제복지원으로 끌려왔던 것이다. 이번이 세 번째다.
김씨가 형제복지원을 완전히 나온 것은 1985년 10월쯤이다. 서울 ‘소년의 집’으로 옮겨갔다가 한 달 만에 천주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요한 보스꼬 기술원’으로 다시 이송됐다. 그는 이렇게 약 5년 동안 형제복지원에서 짐승보다 못한 대우를 받으며 지냈다.
김씨 보다 두 살 위인 형도 같은 처지의 신세였다고 한다. 그는 “내가 끌려온 후 우연찮게 형제복지원에서 형을 목격했다. 형도 나처럼 세 번이나 각기 다른 곳에서 끌려갔다. 그 안에서는 식사시간이나 교회 갈 때만 마주쳤지만, 말을 못하게 막았다”고 말한다. 그가 사회에 나왔을 때는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다시 초등학교에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렇게 그는 성지초등학교 3학년까지만 학교를 다녔다.
김씨는 “학교에 다니고 가족들과 지낼 어린 나이에 형제복지원에 끌려갔다”며 “성추행에 구타까지, 제대로 먹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것이 가장 분하고 억울하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잃어버린 5년’으로 인해 김씨의 삶은 꼬일 대로 꼬였다. 어릴 적 꿈도 짓밟혔고, 모든 것이 뒤틀렸다.
김씨는 경찰에 묻고 있다. “경찰은 초등학생인 나를 형제복지원에 한 번도 아닌 세 번씩이나 끌고 갔다. 나는 아직 그 이유를 듣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한다. 그래서 그 이유를 말해달라고 경찰서 앞에서 1인 시위를 했다”고 말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 대부분은 김씨의 처지와 비슷하다. 이들은 한결같이 ‘형제복지원’에 대해 “생지옥에 끌려갔었다”고 말한다.

형제복지원의 실체는 우연찮게 드러났다. 당시 부산지검 울산지청의 김용원 검사(현 변호사)는 복지원 인근에 사냥을 나갔다가 사냥꾼으로부터 이상한 말을 듣게 된다. “여기서 멀지 않은 산 속에 이상한 작업장이 있다. 인부들이 산을 깎는 작업을 하는데 경비원들이 몽둥이를 들고 지킨다. 경비원들이 인부들을 개 패듯이 패는 것을 몇 번 봤다. 커다란 개 여러 마리가 인부들을 지킨다”고 귀띔했다.
김 검사는 작업장으로 갔고, 산중턱의 작업장에서 감금된 수용자들을 목격했다. 증거물 채취를 위해 경찰관들을 시켜 망원렌즈로 인부들이 작업하는 장면, 몽둥이를 든 경비원들의 모습, 쇠창살이 쳐진 인부들의 숙소 등을 촬영했다.
김 검사는 곧바로 수사에 착수했고, 1987년 1월 법원에서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형제복지원으로 갔다. 교도소 보다 높은 담장이 성곽처럼 둘러싸여 있었고, 위압적인 육중한 철문이 놓여있었다. 원생들이 기거하는 곳에는 안과 밖에 잠금장치가 돼 있었다.
원장실에는 은행에서나 볼 수 있는 대형 금고가 있었다. 원장은 금고문을 열라는 김 검사의 요구를 거절했다. 김 검사는 경찰관을 시켜 마을에서 산소 용접기를 빌려오도록 해 강제로 금고문을 열었다. 금고 안의 풍경은 김 검사의 눈을 휘둥글게 만들었다.
예금증서와 달러, 엔화 등 시가 20억원 규모의 뭉칫돈이 쏟아져 나왔다. 이 돈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김 검사는 형제복지원의 회계장부를 살펴보고서야 출처를 알 수 있었다. 국고보조금 39억원 중 11억원을 횡령한 사실을 밝혀냈다. 김 검사는 원장 박씨를 구속하고, 형제복지원도 폐쇄했다.
수사는 순탄치 않았다. 김 검사는 한 달 만에 형제복지원 원장 박씨를 특수감금, 업무상횡령 등 혐의로 구속했지만 우여곡절이 많았다.
김 검사가 1993년 쓴 ‘브레이크 없는 벤츠’를 보면 당시 수사 외압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경찰과 수사 계획을 세우고 갔는데 단 한 명도 조사하지 못했다. 다 쫓아냈다. 부산지검에서 철수를 명령했다. 윗선에서 수사 중단을 지시했다. 부산시장이 직접 전화까지 했다. 이유를 불문하고 석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김 검사는 박씨의 국고보조금 횡령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수개월 동안의 수표추적을 통해 물증을 확보했다. 그리고 울산지청장에게 수사보고를 올렸다. 그랬더니 지청장은 자필로 몇 가지를 지시했다.
1.VIP 가 금주 내에 부산에 온다.
2.공소장 변경은 토요일까지 되도록 한다.
3.돈을 빌려 간 부산시 공무원의 신분이 노출 안 되게 이름 가운데 받침하나를 빼라.
4.법원에 연기하도록 조치(1주일)
여기서 ‘VIP’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의미한다. 1987년 5월 21일 부산에서 제16회 소년체육대회가 열렸다. 전 전 대통령은 당시 개회식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을 방문했다.

김 검사는 박씨를 국고보조금 횡령혐의 등으로 구속했지만 구형이 20년에서 15년으로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재판부는 징역 10년(1심)에서 4년(2심)으로 다시 2년6월(대법 파기환송심)로 형을 감경했다. 박씨가 횡령한 국고보조금이 12억 원에 이르지만 검찰은 7억에 대해서만 기소했다.
박씨의 혐의도 7번의 재판 끝에 업무상 횡령, 초지법 위반, 외화관리법 위반에 대해서만 유죄가 인정됐고, 불법구금, 폭행, 살인 등에 대해서는 재판조차 받지 않았다. 말 그대로 ‘솜방망이 처벌’로 끝이 난 것이다.
‘형제복지원’이 폐쇄된 지 30년 가까이 됐지만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형제복지원이 운영 중이던 12년 동안 551명이 사망했다. 하지만 이들이 왜 죽었는지 또 죽어서 어디로 갔는지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다. 형제복지원의 실태에 대한 진상은 끝내 밝혀지지 않은 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박인근은 출소 후 형제복지원 땅을 매각해 1000억원대 재산을 축적했다. 이후 형제복지원을 ‘형제복지지원재단’으로 변경하는 등 재단 이름을 바꿔가며 이사장직을 유지했다.
사회복지법인대표자협의체의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2005년에는 재단이 부산저축은행으로부터 118억원을 불법 대출 받은 사실이 부산시의 감사를 통해 드러났다. 복지시설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한 수익사업체를 갖고 있고, 국가 보조금을 받고 있으면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금액의 돈을 대출받은 것이다.
이 돈은 국고보조금 횡령뿐만 아니라 3000여 명의 수용자들을 봉제공장과 목공소, 철공소 등에서 무보수로 투입해 번 것이다. 수용자들의 고혈을 빨아 고급 아파트, 골프 회원권, 콘도미니엄 등을 소유하고 단자회사 등에 수십억 원의 예금을 가진 재벌 아닌 재벌이 됐던 것이다.
박인근은 2011년 셋째 아들에게 법인 대표직을 물려주고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지난 6월 27일 전남의 한 요양병원에서 87살의 나이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처럼 형제복지원 사건은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의 결정판이다.
형제복지원은 엄밀히 따져 국가에 의한 폭력이다. 1971년 부산시의 업무협약과 1975년에 발표된 박정희정권의 내무부 ‘훈령 410호’가 탄생 배경이다. 전두환 정권 때는 ‘부랑인 복지시설 운영개선 종합대책’(보건사회부 훈령 523호)과 ‘부랑인 등에 관한 업무처리지침’(내무부)을 만들어 부랑인 등의 강제수용이 가능하도록 했던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사건 진상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졌고,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도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이 적은 금액이지만 피해보상을 받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피해자들의 고통은 가족에게까지 대물림되고 있다. 김대우씨의 경우처럼 당시 10대의 소년과 소녀도 많았는데, 너무 오래 갇힌 채 피동적인 삶을 살아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은 2013년 12월 ‘형제복지원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국가를 상대로 인권침해에 대한 진상 조사와 배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해 삭발식, 단식, 거리 시위 등을 진행했다.

2022년 8월23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는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을 결정했다.
진실화해위는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은 국가의 부당한 공권력 행사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국가 기관이 형제복지원 사건을 처음으로 국가 폭력으로 규정한 것이다.
박인근은 누구인가
형제복지원 설립자인 박인근은 육군 상사 출신이다. 그가 복지원을 소대, 중대 등 군대식으로 편제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중대장부터 소대원까지 계급을 매기고 상급자는 하급자를 연일 구타했다.
자신은 절대 권력을 가진 왕으로 군림했다. 수용자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무자비한 폭력으로 제압했다. 폭행을 당한 일부 소대원(원생)은 정신을 잃고 하얀 천에 덮여 실려 나갔다. 죽임을 당한 것이다.
수용자들은 군번 비슷한 수용번호를 부여받아 내무반 생활을 했고, 소속 소대장과 중대장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했다.
박 원장은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1981년 4월 국민포장을, 1985년 5월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평화통일자문위원회 상임위원에 임명됐을 정도였다. 부산시장, 부산지검장, 울산지청장 등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박 원장에 대한 검찰 수사가 한창 진행 중일 때인 1987년 5월20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소년체전에 참석하기 위해 부산에 내려왔다.
부산시장이 “복지원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고 하자, 전두환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박 원장은 훌륭한 사람이오. 박 원장 같은 사람 덕분에 거리에 거지도 없고 좋지 않소.” 대통령인 VIP가 신임하는 사람이었으니 그 위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김용원 변호사는 “형제복지원은 군대식으로 운영되는 하나의 작은 왕국이었고, 원장은 왕이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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