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천 530GP사건 ‘조작·은폐’ 10대 의혹
2005년 6월19일 경기도 연천 28사단에서 발생한 ‘530GP 사건’으로 장병 8명이 죽고 4명이 부상당했다.
고 김종명 중위, 김인창, 박의원, 이건욱, 이태련, 전영철, 조정웅, 차유철 상병이 희생자들이다.
희생 장병 8명 중 5명이 독자였다.
국가를 믿고 아들을 군에 보냈던 부모들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았다. 꼭두새벽에 아들의 죽음을 통보받았고, 그때부터 사랑하는 아들을 가슴에 묻고 평생의 한이 됐다. 부모들의 시계는 멈춰버렸고, 평범한 삶도 완전히 무너졌다.
더욱 기막힌 것은 아들의 죽음에 대한 끝없는 의혹이다.
알면 알수록 의혹이 해소되기 보다는 더욱 깊어졌고, 유족들은 그때부터 ‘진실 찾기’에 나섰다. “하늘이 두 쪽 나도 너희들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꼭 밝혀줄게.” 부모들은 아들의 영정을 보면서 몇 번이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 그건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자 국방부에 대한 원망과 분노였다.
부모들은 아들에 대한 마지막 사랑이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모진 세월을 피눈물로 보냈다. 또 누군가의 희생을 막고, 비극의 가족이 다시 나오지 않으려면 ‘530GP 사건’의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한다.
1.’일촉일발’ 최고의 긴장 상태였던 DMZ
2005년 6월12일부터 비무장지대(DMZ) 북측 지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북한군 5~6명이 군사분계선을 넘었다는 징후가 포착됐고, 아군은 매일 수색 및 매복 작전을 실시했다.
6월17일에는 강원도 철원군 대마리의 5사단 27연대 지역에서 북한군 초급병사 리영수(20)가 검거된다. 그는 남한으로 향해 있던 3중 철책을 넘은 후 민가에서 4일 동안이나 숨어 지내다 주민에 의해 발각됐다.
군은 이에 따른 후속조치로 5사단과 28사단 지역에 ‘진돗개 둘’을 발령했다.

진돗개 둘이 발령되면서 28사단의 530GP 등은 최고조의 경계근무에 들어갔다. 18일~19일에는 530GP 작전지역에서 주‧야간 수색매복 등이 실시됐다. DMZ을 사이에 두고 북한군과 아군의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런 상황에서 6월19일 새벽 530GP 사건이 터진다.
2.새벽에 울린 굉음의 정체
연천 28사단 81연대는 530GP와 531GP를 운용하고 있다. 530GP는 철책선에서 직선거리로 1.5km 정도 멀리 북쪽으로 떨어져 있는 독립벙커다. 북한의 505GP, 506GP와는 상대적으로 가깝다. 북한이 선제공격을 하면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는 위치다.
2005년 5월19일 새벽. 530GP에서 굉음이 울렸고, 일대에 비상이 걸린다. 당시 군 수사기록, 상황 보고서, 부대 일지, 장병 진술서 등에 따르면 상황 근무자들과 GP 소대원들은 최초 상황이 발생했을 때 ‘북한군의 공격’으로 인지하고 있었다.

81연대 지통실 당직사령인 정판영 대위의 진술서를 보면 ‘미상 적으로부터 530GP가 9발의 총격을 받았다는 내용 접수’ ‘530GP 및 GOP와 전화를 해 대응 사격 실시 여부 지속 확인’ 등의 표현이 나온다. “꽝 소리에 GP가 심하게 흔들리고 정전이 됐다. 그것이 끝이었다”(530GP 상황병 최재욱).


연대 작전장교 김형호 대위는 “경고 방송” “대응사격” “앰뷸런스 출동”을 지시했다. 81연대 박정현 중위는 “교전이 발생했으니 즉시 7통문으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했다.
GOP 상황병 남상욱 병장은 고속지령대를 방송했다. 내용은 “530GP 미상화기 9발 피탄 받음” 5사단 GP에 최초로 수신된 무전 내용은 “실 상황이다. 교전이다. 교전이다”라는 다급한 목소리를 수신했으며 이는 남상욱 병장의 고속지령대 방송보다 먼저 수신됐다.

외박에서 즉시 복귀한 81연대장 오주석 대령은 연대 지통실과의 통화에서 “대응사격은 했느냐?” 고 물었다. 그런데 상황이 종료된 후 국방부 발표는 달랐다. ‘북한군 공격 상황’이 아니라 ‘김동민 일병에 의한 내무실 총기 사고’로 발표했다.
유족들은 국방부의 수사 내용에 의문을 제기했다. 최초 상황시 군의 모든 움직임이 ‘북한군의 공격’에 맞추어져 있었는데 갑자기 내무실 총기사건으로 바뀌었다.
또 당시 상황 보고 중에는 ‘내부 침입’이나 ‘내부 공격’이라는 말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유족들은 국방부가 ‘북한군의 공격 상황’을 은폐하기 위해 내무실 총기 사고로 조작했다며 ‘조작설’을 주장하고 있다.
3.’내무실’ 아닌 ‘북한군 피격사건’인 이유
530GP의 코앞에는 북한의 505, 506GP가 있다. GP에서 실시하는 차단 작전은 월북하려는 적이나 불순 세력을 막기 위한 것이다. 군 당국은 처음에는 유족들에게 “차단작전을 실시하지 않았다”며 소설과 같은 주장이라고 비웃었다.
그러다 2007년도 국방부 국정감사에서 국방위원의 질의에 3군사령부는 서면 답변을 했다. 그때서야 군은 사건 당일 새벽 비무장지대에서 ‘차단작전’이 있었다고 시인했다. 다만 530GP의 좌측 520GP와 우측 531GP만 실시했고, 530GP는 실시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거짓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군 작전상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530GP가 차단작전에 참여했을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이때 아군이 차단작전을 실시하자 북한군은 정탐조가 월북할 수 있도록 도주로를 확보해주기 위해 미상화기로 9발의 포격을 가한 사건으로 정리된다.

사건이 발생한 날 새벽 유족들은 지통실 당직사령인 정판영 대위(수색중대장)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정 대위는 사망·부상 가족들에게 “폭탄이 폭발해 사망했다”거나 “지뢰를 밟아 부상했다”는 등의 말을 전했다.
이때 유족 중 누구도 ‘내무실 총기사고’라는 말을 듣지 못했다. 당시 작전에 참여했던 생존병사들 중에도 유족들과 만난 자리에서 “작전 중 사고”라고 진술했고 유족들이 진술내용을 녹음했다.
4.부상병 몸에서 나온 의문의 ‘수류탄 파편’
국방부 발표대로 김동민 일병이 내무실에 수류탄을 투척하고 소총을 난사했다면 사망자와 부상병의 몸에서는 수류탄과 소총 파편이 나와야 한다. 김동민 일병이 내무실에 던졌다는 경량형 세열 수류탄은 ‘KG14(한화 K413제품)’다.
이 수류탄은 1천여 개의 쇠구슬로 구성돼 있다. 폭발되면 그 안에 있던 쇠구슬이 일시에 퍼져나가 인명을 살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망자와 부상자의 몸에 박혀있는 파편은 쇠구슬 모양이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부상병 중 김유학 일병의 몸에서 정체불명의 파편이 나왔다. 실물파편형상이 ‘원형’이 아니라 ‘사다리꼴’이었다. 쇠구슬이 사람 몸에 들어가는 순간 사다리꼴로 바뀌지 않는 한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530GP에 사건 당시 근무했거나 사건 앞뒤로 전역을 한 장병들도 유족들에게 “세혈수류탄으로 교육받았다”는 증언도 했다.

또 국방부가 국회나 언론에 발표한 KG14의 수류탄 모양도 쇠구슬로 돼 있다. 530GP 사건과 2008년 11월 181GP에서 발생한 ‘수류탄 사건’ 당시 국방부는 기자들에게 “1000여개의 쇠구슬로 구성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국회 국방위 회의록을 보면 181GP 사건이후인 2008년 11월26일 당시 육군 참모차장이던 한민구 현 국방부 장관은 KG14 수류탄 절개모형까지 보여주며 “1000여개의 구슬로 이루어 졌다”고 보고했다.
5.시신의 상처가 진실을 말한다
530GP사건은 국방부의 발표와는 너무 많은 차이가 있다. 국방부는 김동민 일병이 내무실에 수류탄 1발을 투척하고 K1소총(구경 5.56mm)을 난사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다보니 사망자의 상처를 소총에 의한 것이거나 수류탄 파편상으로 검안했다. 그런데 군 당국의 검안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K1 소총 총알이 인체를 관통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0.03초다. 5.56mm 보통탄이 1회 정도 회전할 시간이다. 때문에 사출구도 총알의 직경과 같거나 약간 크게 형성된다. 그런데 530GP 사망자와 부상자의 상처는 전혀 달랐다.
군 당국은 GP장인 김종명 중위의 목 부분 상처를 총상으로 검안했는데, 상처에 화약감입 흔적과 상처 크기상 총알에 의한 상처일 수가 없다. 유족들은 “미상화기 파편이 위에서 사입되어 아래 목부분으로 스친 자국”이라고 보고 있다. 또한 오른쪽 손목의 상처의 사입구와 사출구도 K1 소총에 의한 것으로 보기에는 너무 크다.

일본 최고의 법의학자인 가미야마 시케타로 교수(도쿄 의과대학 명예교수)도 김 중위의 “목의 상처와 손목의 상처는 K1 소총에 의한 것이 아니다”는 소견을 밝혔다.
조정웅 상병의 경우 군 당국은 총알이 오른쪽 옆구리(20☓8mm)로 들어가서 오른쪽 종아리(15☓10mm)로 나왔다고 밝혔다. 관통거리가 너무 길고 상처 또한 일반적인 상처보다 큰 것을 알 수 있다. 조 상병의 허벅지에 흘러내린 혈흔은 넘어진 상태에서는 불가능한 자국이다.

이태련, 전영철, 김인창 상병의 상처 또한 총상으로 검안됐지만 일반적인 K1 소총에 의한 상처보다 사입구가 매우 크다. 총상으로 사망했다는 장병 모두 사입구와 사출구가 2cm~10cm로 일반 K1 소총에 의한 총상(0.5mm) 보다 그 크기가 5~10배 정도다.
차유철 상병의 경우 머리 맹관총상(탄환이 관통하지 않고 체내에 잔류되어 있는 창상)이라고 검안했으나 X-ray 어디를 봐도 맹관 된 탄두가 없다. 머리의 사입구는 그 크기가 무려 65☓50mm다.
대신 차 상병의 머리에서는 수많은 미세파편에서부터 큰 파편형상이 존재하는데, 총알 부스러기도 수류탄 파편 현상도 아니었다.

이건욱 상병은 몸 곳곳에 10cm 이상의 꿰매 놓은 긴 상처가 있는데, 군 당국은 총상이나 수류탄 파편창이라고 검안했다. 총상이나 수류탄 파편창으로 보기 힘든 것이다.
국방부 발표에 의하면 530GP 내무실에서 수류탄으로 사망한 병사는 박의원 상병 한 명이다. 8명의 사망 장병 중 박의원 상병의 시신이 가장 참혹했다. 군 당국은 “김동민 일병이 던진 수류탄이 박 상병의 품안에서 터진 것 같다”며 “60~70%의 수류탄 파편을 흡수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만약 그랬다면 박 상병의 몸은 흔적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훼손됐어야 한다. 내무반 천정과 관물대와 사물함 등에는 살점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박 상병의 몸은 의외로 깨끗했으며 수류탄 파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열화(熱火, 뜨거운 불길)에 의해 나타나는 검게 그을린 화상의 흔적만이 남아있다.

군 발표대로 박의원 상병이 수류탄 파편의 60~70%를 흡수했다면, 박 상병의 몸에는 수 백개의 쇠구슬 모양의 구멍이 있어야 정상이다. 박 상병의 배 쪽은 검게 그을리고 탄 흔적이 참혹했지만 등 쪽은 깨끗하다. 수류탄을 온 몸에 흡수했다는 증거가 없는 것이다.
6.조작이 의심스러운 사건현장
530GP 사건에서는 현장을 보존하기 보다는 훼손하고 조작을 의심할만한 정황이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국방부 발표대로 김동민 일병이 수류탄과 총기를 난사했다면 내무실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돼 있어야 한다.
하지만 530GP 내무실 천정의 석고판은 깨지지 않았다. 형광등 1개만 깨진 반면, 선풍기 날개는 파편하나 맞지 않고 멀쩡했다. 내무실 천정에는 혈흔이 일부 있다고 발표됐으나 혈점은 없었다. 관물대에서 수류탄 파편이 박힌 현장사진이나 혈점이 나오지 않았다.

소대원들 진술에 따르면 파편자국을 본 사람이 없고, 수류탄이 터졌다고 해서 터진 줄 알았다는 내용이 있다. 현장에는 수류탄의 세열파편이 없으며 취침 위치상 생길 수 없는 부위와 상처크기 그리고 화상 등의 상처가 있었다.

군 당국은 범인인 김동민 일병이 상황실, 체력단련실, 취사장에서 19발을 연발로 총격했다고 발표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는 당연히 총알이나 총알부스러기 등이 발견돼야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 수거된 탄두의 파편이 하나도 없다. 김동민 일병이 두 번이나 연발 총격을 했다는 취사장에도 단 한발의 총탄 부스러기도 발견되지 않았다.

군 수사기록의 현장검증조서를 보면 최초 현장 기술내용에는 김종명 중위가 사망했다는 체력단련실에서 4곳(좌측 출입문쪽 3개, 우측벽면 1개)에서 총탄흔(총탄을 맞은 흔적)이 발견됐다고 했으나, 수사 발표 시에는 6곳으로 최초 현장에는 없던 총탄흔 2개가 갑자기 나타났다.

거울에 총탄이 맞았다면 바닥에는 거울이나 총알 부스러기가 발견돼야 하는데 이것도 없었다. 내무실에서 사망한 사병들의 위치도 이상하다. 내무실 안에는 복도가 있고, 그 사이에 양쪽 침상이 있다. 각자의 관물대가 병사들의 자리이고 이곳에서 취침하는 게 기본이다.
그런데 530GP 내무실의 사망자 위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수류탄 폭발지점이라고 하는 박의원 상병은 자신의 자리 반대편인 조정웅 상병 자리에서 취침했다.
더 이상한 것은 취침자세다. 머리는 내무실 복도 쪽이 아닌 관물대쪽 그러니까 잠을 거꾸로 잔 것으로 돼 있다. 후송 중에 사망한 이건욱 상병도 자신의 자리가 아닌 반대편 침상(조정웅 상병 자리)에서 잠을 잔 것으로 돼 있다.

정말 믿기지 않는 상황은 또 있다. 530GP는 내무실이 아닌 체력단련실에만 TV가 있다. 군 수사 발표에 의하면 사건 당일 조정웅 상병은 혼자 오전 1시까지 체력단련실에서 세계 청소년 축구 경기를 봤다.
조 상병도 그렇지만 GP장인 김종명 중위도 이 시간에 운동을 하려고 체력단련실에 왔다. 530GP가 오합지졸 부대였던가. 상병이 체력단련실에서 혼자 새벽 2시가 넘을 때까지 TV를 보고 GP장은 그 시간에 운동하려고 나왔다.
2시10분이면 김 중위가 상황실에서 나와 체력단련실로 온 시각이다. 조 상병은 GP장이 체력단련실에와서 마주쳤는데도, 내무실로 들어가서 취침하지 않고 2시36분까지 TV를 보고 있었다. 조 상병은 김 중위가 운동을 시작한 후 26분 동안이나 혼자 유유히 TV를 봤다.
둘이 체력단련실에 있는데 김 일병은 GP장인 김종명 중위에게만 총을 발사했다. 전등도 환하게 켜졌는데, 조 상병에게는 총을 쏘지 않았다. 일부러 살려주려고 마음먹기 전에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조 상병은 김 중위가 총격에 쓰러지자 체력단련실과 식당을 잇는 문을 통해 식당을 거쳐 취사장으로 왔고, 이곳에서 김 일병에게 총격을 당했다.


최초 현장사진을 보면 체력단련장 바닥에 있던 김종명 중위의 운동화가 나중에는 발에 신겨져 있다. 범인이 사용했다고 발표한 탄창의 위치도 좌우로 바뀌어 있다. 심지어 시신을 이동한 단서까지 포착됐다.

후임GP장인 이인성 중위는 취사장에 김인창 상병이 쓰러져 있다고 진술했는데, 최종 군 수사발표에는 취사장에 조정웅 상병이 쓰러져 있었다는 것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부상자인 박준영 일병도 “후송시 취사장에는 조정웅 상병이 없었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차단작전 중 실외 발생사고를 조작하는 과정에서 조정웅 상병 자리에 박의원 상병을 배치하였으므로 조정웅은 내무실로 사망위치를 설정하기 곤란해지자 취사장에 있던 김인창을 내무실로 이동하고 취사장에 조정웅을 배치한 것이다”고 주장한다.
군은 김종명 중위가 체력단련실에서 김동민 일병에게 피격을 당하고 대각선으로 이동했다고 발표했다.
만약 총을 맞고 쓰러진 상태에서 피를 흘린채 이동했다면 손자국 혈흔이나 이끌린 혈흔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없었다. 피를 흘리면서 선 채로 이동했다면 발자국 혈흔도 있어야 하는데 이것도 없다. 체력단련실 바닥의 피는 뿌려진 듯한 형태다.

군 수사기록상 조정웅 상병은 체력단련실에서 김 중위와 함께 있다가 김 중위가 총격을 당하자 식당에 피 발자국을 남기며 2회 이동 후 취사장으로 갔다 나오다 총격을 당했다. 체력단련실에서 식당으로 통하는 문틀에 혈흔이 있으나 밟고 지나간 흔적이 없다.
군은 식당 내부에 조 상병이 2차례 이동한 피 발자국이 있었다고 했다. 이것이 성립되려면 세 가지가 충족돼야 한다. 조정웅 상병이 부상을 당해 피를 흘린 상태거나 체력단련장에서 김 중위가 흘린 피를 밟아야 한다.
하지만 조 상병은 부상도 입지 않았고, 체력단련실에서 바닥 혈흔을 밟은 흔적도 없다. 식당에는 조 상병의 슬리퍼 피 발자국이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생존 사병들의 진술서도 조작된 정황이 드러났다. 사건 이후 생존 사병들은 진술서를 작성해 군 수사기관에 제출했다.

그중 조작이 의심되는 진술서가 발견된다. 김00 상병이 작성했다는 1차, 2차 진술서를 비교해 보면 동일인인데, 필체가 확연하게 다르다. 이것을 보면 둘 중 하나는 김 상병이 쓰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거인 셈이다.
7.사라진 사망자 총기와 전투복
‘530GP의 부대일지(05. 6.9(목)~18(목)’를 보면 사고 발생 하루 전날인 6월18일의 인원은 총 36명(간부 3명, 의무병 1명, 소대원 26명, 배속병 6명)이다. 부대 일지를 근거로 하면 당시 530GP K-1(14정), K-2(20정), K-201(6정), K-3(2정) 등 총 42정이다.

사건 발생 후 군 수사대는 보유무기를 점검하기 위해 GP에 있는 모든 무기를 연병장에 진열해 놓았다. 당시 촬영된 것을 보면 소총은 모두 20정에 불과했다. K1 소총 7정, K2 소총 11정, K201 유탄발사기 4정이 부족했다. 특히 차단작전시에 휴대하는 K-3(기관총) 2정이 없다. 나머지 총기의 행방이 묘연하다.
그런데 2006년 6월18일, 81연대 본부 중대원이 인터넷에 올린 글에서 총기 행방의 단서를 찾았다.
익명을 사용한 이 사병은 “사고 후에 폐기한다고 그곳에서 가지고 내려온 총과 방독면은 피로 물들어 있었고…”라고 적었다.
2007년에 열린 국방부 국감에서 국방부 관계자는 “일괄 수거해서 정비 또는 폐기 처리하는 상황이 있었다”고 밝혔다.

총과 방독면에는 왜 피가 묻어 있었고, 군에서는 왜 폐기 해야만 했을까. 군 수사발표대로 내무실 취침 중 당한 사고였다면 모두 평상복 차림이었고, 모든 전투복에 피가 묻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런데도 군은 왜 전투복을 모두 소각했을까.
사고 후 부대에서 보내온 사망자의 유품에 전투복이 빠진 것도 이상하다. 일반적인 관례에 따르면 사망자가 입었던 옷이나 평소 쓰던 물건들을 가족들에게 보내준다. 그런데도 부대에서는 전투복을 보내지 않았다.
8.진짜 범인인지 의심스러운 김일병
현재까지 김동민 일병이 범인이라는 유일한 증거는 자백뿐이다. 김 일병의 범행을 목격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생존 사병들도 수류탄 폭음과 총소리만 들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김일병이 범행에 사용한 총이나 수류탄 고리에도 지문이 없었다. 국방부는 김 일병이 정은총 상병의 총을 가지고 범행을 했다고 발표했다. 김 일병은 후방 초소 근무 중 후번 근무자를 기상시킨다는 명분으로 내무실로 내려왔다. 내무실에 들어오자마자 정 상병의 K-1 소총을 꺼낸 후 수류탄과 25발 탄창 두 개를 사용하여 총기를 난사했다.

사건 정황상으로 보면 김 일병의 지문은 총기 곳곳에 묻어 있어야 한다. 또 김 일병이 투척했다는 KG14 세열수류탄은 원기둥 형태의 수류탄 곽에 테이프로 봉해져 있고, GP장의 사인이 들어간 종이로 봉인돼 있다.
수류탄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테이프를 뜯고 뚜껑을 열고 꺼내 안전핀을 제거한 후 던져야 한다. 수류탄 관이나 안전핀 등에서도 지문은 나오지 않았다.
군 수사당국은 유족들의 요구에 따라 김동민 일병에 대한 ‘거짓말 탐지기’ 검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를 2005년 7월5일 유족에게 보냈는데, 수류탄 투척, 박의원 상병 취침위치에 대한 내용이 ‘판단 불능’으로 나왔다.

검사관의 의견을 보면 “김동민 일병은 꼭 제3자의 입장에서 타인의 행위를 목격한 대로 전달하는 듯이 얘기하고 있었음”이라 되어 있다. 검사 외 상황에서도 계호병들과 자연스럽게 웃으며 대화하는 등 피검사자인지 의문이 갈 정도로 검사관이 당혹했다고 나와 있다.

김동민 일병에게는 장병들을 죽일 범행동기가 없다. 국방부는 “김 일병이 평소 선임병들로부터 잦은 질책과 욕설 등 인격모욕을 당한 데 앙심을 품고 선임병 등을 살해했다”고 밝혔다.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당시 530GP의 내무실 분위기는 좋았다. 생존 소대원들도 진술서에 내무실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고 밝혔다. “사병 상호간에는 존중과 경어를 사용했다. 휴가 때에는 계급 관념을 두지 않고 서로 반말을 사용했다.

휴가 가서 함께 놀기도 했다. 휴가를 마치고 복귀할 때는 위계질서, 선·후임병에 맞는 호칭을 사용했다. 김 일병도 휴가지에서 상병급에게 반말을 하기도 했다. 소대원들의 진술서에는 “김 일병과 소대원들의 분위기는 좋았다”고 적고 있다.
사건 이후 김동민 일병을 괴롭혔다는 질책사병들은 모두 ‘불기소’ 처분을 받았으며, 조기 전역은 물론 ‘국가유공자’라는 혜택까지 받았다. 국방부가 발표한 김 일병의 범행동기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다. 수류탄 1발을 투척하고, GP 여기저기를 다니며 8명을 죽이고, 4명을 부상시켰다지만 김 일병의 범행을 목격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9.질책 사병들에게 ‘국가유공자’ 특혜 준 이유
김동민 일병에게 질책과 욕설, 폭행 등을 한 사병들은 어떻게 조치됐을까. ‘2005년 군 검찰의 수사 보고서’에는 7명의 사병(상병 신재희·정은총·김동업·유민호·임창용·일병 김유학·성천옥)들의 입건 여부를 조사했다가 모두 불입건 처리했다.

국방부는 이들 질책 사병들을 군법으로 처벌하지 않고 모두 조기 전역 혜택을 주고 국가유공자로 둔갑시켜 죽을 때까지 매달 연금(보상금)을 타 먹도록 했다. 군에 따르면 이들은 군 복무규정을 위반하고 8명을 살해한 동기를 제공한 사병들이다.
국가유공자 등 예우와 지원에 관한 법률 제4조 6항(제외사유)에 의해 국가유공자로 지정될 수 없다. 그런데도 국방부는 왜 이들에게 ‘유공자 지정’이라는 특혜를 주었을까.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국가 유공자 혜택 받은 생존병사
[7급 20명]
① 정은총(상병) ② 신재희(상병) ③ 김동업(상병) ④ 임창용(일병) ⑤ 성천옥(일병) ⑥ 유민호(일병) ⑦ 신주현(병장) ⑧ 신태준(상병) ⑨ 문진환(일병) ⑩ 유재현(병장) ⑪ 이강찬(상병) ⑫ 이병삼(상병) ⑬ 이상석(이병) ⑭ 손석민(이병) ⑮ 정영진(상병) ⑯ 문진환 (일병) ⑰ 지상록(일병) ⑱ 천원범(일병) ⑲ 최재욱(병장) 현규대(일병)
[6급 2명]
① 김유학(일병) ② 박준영(일병)
▶국가 유공자 혜택 거부한 생존병사
① 김영진(상병) ② 홍성기(일병)
그리고 생존소대원 24명(질책사병 포함, 김일병 제외) 중 3명을 제외한 전원에게 ‘국가유공자’로 지정하고 조기 전역시켰다. 국가유공자 혜택을 거부한 3명의 생존대원 중 2명은 “부끄러운 국가유공자는 싫다”면서 거부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왜 국가가 수여하는 국가유공자라는 혜택을 거부하고 ‘부끄럽다’라는 말을 했던 것일까.
참고로 2002년 서해교전 때 6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부상당했다. 실제 교전이 일어난 사건이었는데도 당시 일부 부상자들은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2008년 11월23일 강원도 철원 181GP에서도 내무실 수류탄 1발 투척사건이 발생해 5명이 중경상을 입었지만, 이들에게는 조기전역과 국가유공자 혜택이 없었다.
10.중징계 받은 지휘관이 없다
530GP 사건은 최전방 GP에서 8명의 장병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당한 대형 사건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부대의 지휘계통 누구도 구속되거나 그에 상응한 중징계를 받은 사람이 없다. 이 사건으로 입건된 사람은 범인으로 지목된 김동민 일병과 부GP장인 최충걸 하사 뿐이었다.
그나마 최하사는 구속됐다가 곧바로 풀려나 중사로 진급한 후 전역했다. 그동안 군에서 일어난 총기사고와 비교해보면 전혀 딴판이다.
530GP사건 지휘관들인 군단장과 사단장은 감봉 3개월(10%)의 형식적인 처벌에 그쳤다.
연대장(감봉 3개월 포함)과 수색 중대장만 보직해임 됐을 뿐이다. 연대장의 경우 얼마 후 주한미군기지이전 사업단 기획총괄팀장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사실상 영전이다.
2008년 11월에 발생한 철원 181GP에서는 이병이 내무실 수류탄 투척으로 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사단장, 연대장, 대대장이 보직해임된 것과는 너무도 비교된다. 530GP사건이 사건의 규모나 사회적인 파장, 인명피해가 훨씬 컸는데도, 중징계 받은 지휘관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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