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대의 패륜범 박한상 존속 살인사건
자신의 부모를 죽이는 ‘존속살인’이 끊이지 않으면서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존속살인은 ‘가정불화’와 ‘정신질환’이 가장 큰 원인이다. 또 부모의 유산을 노리고 죽이거나, 돈 때문에 죽이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 존속살인이 주목받게 된 것은 일명 ‘박한상 살인사건’이다.
1994년 5월19일 새벽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 고급 주택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관할 소방서에는 다급한 목소리의 한 남성이 “집에 불이 났다”며 119에 신고했다. 신고자는 불이 난 집 주인의 큰 아들 박한상(23)이었다.
소방차가 출동해 화재를 진화했으나 처음 불길이 솟았던 지하 1층은 완전히 전소됐다. 이 집은 지상 2층, 지하 1층 구조였으나 당시 지상 층이 내부 수리 중인 관계로 가족들은 지하에서 임시로 생활했다.
소방과 경찰은 화재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감식에 나섰다가 시꺼멓게 탄 박순태‧조순희 부부의 시신을 발견한다. 그런데 시신이 심상치 않았다. 화상 상처와는 다르게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신을 뒤척거려 봤더니 40~50여 군데 찔린 흔적이 있었다.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 부검결과 기도와 폐 속에서 이산화탄소와 연기를 흡입하지 않은 것으로 나왔다.
숨진 부부는 화재가 나기 직전 흉기에 찔려 사망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 화재로 봤던 경찰은 시신과 부검 결과를 토대로 ‘살인 사건’으로 규정하고 곧바로 수사에 착수했다. 살해 용의자를 탐문하기 시작했다.
우선 화재 현장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박한상을 상대로 조사를 벌였다. 그는 “자다가 불이 난 것을 알고 급히 빠져나오느라 부모님을 구출하지 못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경찰은 친 아들이 부모를 잔혹하게 죽이고, 방화까지 했을 리는 없다며 박씨를 용의선상에서 배제했다.
한약재상을 크게 했던 피해자 박씨는 100억 원 대의 재력가였다.
당시 대한한약협회 서울시지부장을 맡고 있을 정도로 업계의 영향력도 컸다. 경찰은 처음에는 원한 관계나 사업상 갈등에 의한 ‘살인극’에 초점을 맞췄다. 숨진 박씨 주변을 탐문했으나 원한이나 사업 갈등은 없는 것으로 나왔다.
용의자를 특정할 만한 사람도 없었고, 수사는 난항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박한상의 화상을 치료했던 병원의 한 간호사로부터 유력한 제보가 들어온다. “(박한상이) 머리에 피가 많이 묻어 있어 다친 줄 알았는데, 상처는 없었고, 발목에 물린 듯한 이빨 자국이 있다”는 얘기를 경찰에 전한 것이다. 경찰은 이때부터 박씨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부모가 수 십 차례 흉기에 찔릴 동안 집 안에 있던 박씨가 몰랐다는 것도 이상했다. 특히 맨발로 나온 박씨의 발은 금방이라도 씻은 듯 너무 깨끗했다. 집 안에서 도난당한 귀중품도 없었다. 유학 문제로 부모와 갈등이 있었다는 주변의 진술도 확보했다.
경찰은 박씨 머리에 묻어 있던 혈흔을 채취해 유전자 검색(DNA)을 했더니 부모의 것으로 나왔다. 오른쪽 종아리에 난 상처는 어머니가 이발로 문 자국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이런 증거를 토대로 박씨를 추궁했고, 사건 발생 1주일 만인 5월26일 자백을 받아냈다.

다음날 언론은 박씨가 범인이라며 대서특필 했다. 당시 일간 신문의 머리기사는 박씨의 기사로 장식됐다. 범행 동기는 ‘유산 상속’과 ‘아버지에 대한 앙갚음’이었다.
박씨는 경찰 조사에서 “유산 상속을 받아 유학생활 중 도박으로 날린 돈을 갚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 평소 아버지로부터 ‘너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놈이다. 그렇게 말썽을 피우려면 호적을 파라’는 등 꾸중을 자주 들어 앙심을 품게 됐다”고 진술했다.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난 박씨는 어릴 적부터 ‘부잣집 아들’로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아버지는 장남인 박씨에게 한약재상 사업을 물려주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그러나 박씨는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다. 오히려 부모의 기대와 지나친 교육열에 늘 위축됐다. 당시 박씨의 고교였던 압구정 현대고등학교 교사는 “한상이의 성적은 반에서 40등 정도로 좋지 않았지만, 숨진 부모들은 유독 성적에 관심이 많았다”고 말했다.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던 박씨는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가업을 이으라며 ‘한의대’에 진학하라고 했지만, 박씨는 지방의 소도시에 있는 대학 토목과에 입학했다. 여기서도 친구를 제대로 사귀지 못하고, 학교생활에도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방위병 복무 후 복학을 포기했다. 박씨는 “미국 유학을 보내 달라”고 부모를 졸랐다. 아들의 계속된 성화에 못 견딘 아버지는 자신이 다니던 교회 목사와 아들의 미국 유학을 상의했다.
그리고 박씨는 1993년 8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로스앤젤레스 근교에 있는 어학원에 등록하고 여기서 실시하는 8개월 과정의 영어연수프로그램을 듣기 시작했다. 박씨는 보증금 300달러에 월세 530달러 짜리 8평 규모의 아파트에서 자취하며 혼자 생활했다.
박씨의 유학 목적은 ‘공부’가 아니었다. 부모의 “공부하라”는 잔소리로부터의 도피였고, 혼자만의 자유를 위한 탈출구였다. 미국 생활이 정상적일 리가 만무했다. 어학원은 형식적으로 등록한 것이었고, 주로 아파트에 틀어박혀 폭력 비디오에 빠져 지냈다.
미국에 건너간 지 두 달 후 부터는 또래의 한국 유학생들과 어울려 도박장을 출입하는 등 방탕한 생활을 했다. 박씨는 심심풀이로 시작한 도박에 점점 빠져들었고, 잃은 돈을 회복하기 위해 라스베이거스까지 진출했다. 하룻밤에 1천300달러를 날렸고, 부모가 매달 생활비로 보내주는 2천 달러도 모두 도박으로 탕진했다.
아버지가 준 승용차 구입비 1만8천여 달러도 도박으로 날렸다. 돈이 떨어지자 박한상은 유학을 떠난 지 8개 월 만에 부모 몰래 귀국한다. 은행에서 신용카드를 만들었고, 사채업자한테까지 손을 벌리며 막다른 길에 다다르고 있었다. 호텔 나이트클럽을 전전하다 친척에게 들켜 3일 만에 미국으로 도망가기도 했다.

귀국 후 아버지와의 사이는 더욱 멀어졌다. 장남의 방탕한 생활이 못마땅했던 아버지는 “호적을 파가라” “너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놈이다”라며 멸시했다.
이 와중에 동생이 ‘한의대’에 입학하자 장남에게 걸었던 기대는 차남에게 옮겨갔다. 박씨는 부모의 유산을 상속받지 못할 수 있다는 불안감도 커져갔다. 도박이나 사채 빚이 쌓이면서 경제적으로도 몰려 있었다. 결국 박한상은 부모를 죽이고, 유산을 상속받기로 결심한다.
범행을 위해 철저한 준비를 했다. 서울 종로에서 범행에 사용할 25cm 등산용 칼을 구입하고, 신사동의 한 주유소에서 휘발유 8리터를 추가 구입했다. 미국 유학생활 중 폭력 영화에 심취했던 박씨는 범행도 영화를 모방했다. “미국에서 경찰관인 아버지가 살인사건을 저지른 아들을 죽이는 영화를 봤는데, 그 수법을 모방했다”고 진술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범행준비를 모두 끝낸 박씨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 3일 후 실행에 옮겼다. 부모가 잠든 틈을 노려 준비한 흉기를 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옷에 피가 묻어 범행이 발각될 것을 우려해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었다. 박씨는 양손에 칼을 쥐고 자고 있던 어머니부터 찌르기 시작했다.
고통을 견디지 못한 어머니는 박씨의 종아리를 힘껏 물었다. 잠에서 깬 아버지가 박씨의 손을 잡고 반항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렇게 박씨는 부모를 각각 40~50차례씩 찔러 난자했다.
범행 후에는 몸에 묻은 피를 없애기 위해 샤워하고, 증거인멸을 위해 집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박씨의 범행은 완전 범죄가 되지 못했다. 기자들이 ‘수 십 차례에 걸쳐 (부모를) 난자한 이유’를 묻자 박씨는 “유산을 받아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거나 국내에서 사업을 해볼 생각이었다. 아버지가 하던 한약상은 너무 복잡해 이어 받을 생각이 없었다”고 말했다.
범행이 밝혀진 후 심정을 묻자 “모든 것이 밝혀져 후련하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괴로웠다. 자수도 생각해봤지만 일이 너무 커져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밝혔다.
박한상은 ‘존속살해’와 ‘방화’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고, 1‧2심에서 사형이 선고됐고, 1995년 8월 25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했다. 재판 과정에서 실시한 박씨에 대한 ‘정신감정’은 정상으로 판명됐다.

부모의 100억대 재산은 모두 박씨의 동생에게 상속됐다. 민법 제1004조는 ‘고의로 직계존속, 피상속인, 그 배우자 또는 상속의 선순위나 동순위에 있는 자를 살해하거나 살해하려 한 자는 상속받을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박씨에 대한 상속권은 박탈됐다. 박씨의 동생은 재판 진행도중 구치소로 형을 한차례 면회를 갔다가 참회는커녕 “나는 무죄다”라고 주장하는 모습을 보자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기도 했다.
부모를 참혹하게 죽인 패륜범 박한상은 사건 이후 전혀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30년 넘게 서울구치소 교화위원을 지낸 양순자 심리상담소장은 ‘용서 못할 사형수’로 박한상을 꼽았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6년 동안 상담하면서 느꼈던 참담한 심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부모를 살해하고도 반성은커녕 빠져나갈 생각만 하면서 끝끝내 (범행을) 부인했다”며 “사형수들을 상담하며 이야기들을 듣다보면 동정이 가는 경우도 있는데 박한상 만큼은 지금도 용서할 수가 없다. 결국 상담을 포기했다”며 치를 떨었다.
박씨는 양순자 소장에게 수 십 통의 편지를 보냈지만 내용은 늘 한결 같았다고 한다. 일말의 반성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작권자 ⓒ정락인의 사건추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