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사건

‘악랄한 제비’ 제천 독신녀 토막살인 사건


2003년 3월16일 비가 오는 쌀쌀한 일요일이었다.

충북 제천시 청풍면 야산 입구 골짜기에서는 농경지 배수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굴삭기 기사 윤아무개씨가 한창 땅을 파다가 이상한 물체를 발견했다.

그는 작업을 멈추고 천천히 물체에 다가갔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주춤거리며 급하게 땅 주인을 불렀다. “형님, 이리와 보세요. 이게 돼지머리인지 사람 머리인지 와 보세요”라고 소리쳤다. 두 사람이 가까이 가서 보니 딱 봐도 사람머리였다.

얼굴은 하늘을 향해 있었다.

김장용 비닐 봉투에 토막 난 여성의 머리 부분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시신은 신원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됐고, 부패 상태도 심했다. 신고를 받은 제천경찰서 형사대가 현장으로 출동했다.

형사들은 토막 난 다른 부분을 찾기 위해 삽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40cm쯤 흙을 파내자 몸통과 팔, 다리, 엉덩이 부분 등이 연이어 발견됐다. 머리와 허벅지가 절단됐고, 다리에만 칼에 베인 상처가 5곳이나 있었다.

그런데 토막 난 시신은 여러 곳에 흩어지지 않고 가지런히 배열돼 있었다. 그러니까 범인은 피해자의 시신을 암매장할 때 토막 낸 신체 부위를 몸통에다 붙여 놓은 상태에서 묻은 것이었다.

시신이 발견된 현장 인근에서는 불에 탄 여행가방과 피 묻은 속옷, 차량 깔판 등이 널브러져 있었다. 범인이 다른 곳에서 피해자를 살해한 후 토막 낸 다음 여행 가방으로 옮겼고, 증거인멸을 위해 불에 태운 것으로 추정됐다.

경찰은 정확한 사망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부검을 의뢰했다. 또 피해자의 신원 파악을 위해 지문 복원 작업도 들어갔다. 그녀는 약 4개월 전인 2002년 12월 경기도 용인에서 실종신고 된 구아무개씨(여‧53)였다. 가출 신고는 2003년 2월3일 서울에 사는 부모가 한 것으로 돼 있었다.

구씨의 사망원인은 교살(목졸림)이었다.


누군가 목 졸라 살해한 후 시신을 토막 내 유기한 것이다. 경찰은 용의자를 특정하기 위해 구씨의 주변 인물을 탐문하기 시작했다. 사건 단서나 실마리를 찾기 위한 것이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번에는 구씨의 휴대전화를 확보하고 통화내역 분석에 들어갔다. 그녀와 마지막으로 통화한 남성이 있었다. 전과 11범의 신명호였다. 그는 서울, 경기, 부산, 대구, 제주도 등 전국을 무대로 사기행각을 벌여온 전문 사기범이었다.

구씨와는 골프동호회에서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구씨가 실종되기 직전인 12월 초 나흘간 40여 차례나 통화한 사실도 드러났다.

이뿐만이 아니다.

같은 달 16일 구씨의 예금 4300여 만 원을 신씨의 내연녀 계좌로 이체시킨 것도 확인됐다. 12월16일을 전후해 구씨의 신용카드로 홈쇼핑과 골프숍, 성형외과 등에서 750여만 원, 가전제품과 현금서비스 등 1700여만 원을 결제하거나 인출한 사실도 드러났다.

17일에는 구씨의 시신이 발견된 지점 인근에서 휴대전화로 통화한 기록이 있었으며, 18일에는 인근 호텔에 투숙했다. 구씨 사망과 관련한 모든 의문의 화살표가 신씨를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경찰은 12월16일에 신명호가 구씨를 살해한 것으로 특정했다. 신씨는 구씨를 살해한 뒤 차고 있던 목걸이(155만원 상당)를 빼앗아 팔아넘기기까지 했다.

경찰은 유력 용의자인 신명호와 구씨의 관계를 집중 조사했다.

신씨의 사기 행각과 범행수법도 속속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신씨는 골프동호회를 운영하면서 돈 많은 여성 회원들을 끌어들였다. 사업가를 사칭하며 주부들을 동호회에 가입시킨 뒤 고가의 명품 선물을 주는 방법으로 피해자들을 유혹해 성관계를 맺고 금품을 갈취했던 악랄한 제비족이었다.

신씨에게 당한 피해자만 수 십 명으로 추정됐고, 일부는 가정이 파탄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신씨는 다른 사람의 명의를 도용해 활동했다. 그의 이름과 직업 등이 한 두 개가 아니었던 것이다. 주로 내연녀 남편의 명의를 도용했다.


최아무개씨(여)는 한때 신씨와 내연관계를 맺었다.

신씨는 김씨 남편 최아무개씨(베트남 공장 운영 사업가)명의를 도용해 휴대전화 등을 개설해 사용했다. 구씨를 살해하기 전 할인매장에서 구입했던 여행용 가방, 쇠망치, 식칼, 톱 등 시신을 토막내는 데 필요한 물건도 김씨의 명의로 구입했다.

신씨는 최씨의 명의로 1억2000만원을 대출 받기까지 했다. 결국 최씨는 신씨와의 관계가 들통 나 이혼까지 당했다. 경찰이 확인한 신씨의 가명만 해도 4개나 된다.

그런데 신명호는 왜 구씨를 살해한 것일까.

그는 독신녀인 구씨가 사채업을 해서 큰돈을 번 사실을 알아챈 뒤 계획적으로 접근했다. 그러나 구씨도 만만치 않았다. 신씨의 문란한 여자관계와 사기행각을 눈치 채고는 “그동안의 사기행각을 동호회와 경찰에 폭로하겠다”고 협박했다. 구씨에게 돈을 뜯어내려고 했던 신씨는 오히려 막다른 길에 몰린 상황이 됐다.

만약 지금까지의 사기행각이 드러나면 모든 것이 끝장인 상황이었다.

그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구씨를 살해하기로 마음먹는다. 신씨는 계획대로 움직였다. 12월16일 구씨가 사는 용인의 아파트로 찾아가 그녀를 목 졸라 죽이고 공구를 이용해 시신을 토막 냈다. 다음날 토막 시신을 여행 가방에 담아 승용차에 싣고 제천으로 와서 배수로 공사장에 유기했다.

사람을 속이는데 남다른 재주를 타고난 신명호는 주도면밀하게 움직였다. 구씨가 실종된 후에는 그녀의 아이디로 동호회에 접속해 다른 회원들과 대화를 나눴다. 구씨가 갑작스럽게 사라진 것을 의심받지 않기 위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연기를 한 것이다.

이에 대해 경찰은 “그동안 사기행각을 벌였던 여성들을 정리하고 범행을 숨기기 위한 시간으로 활용했다”고 밝혔다.

신씨는 도피자금 마련과 도주를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때문에 구씨가 살아있는 것처럼 위장한 다음 도피를 위한 자금을 최대한 끌어 모았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추가 사기피해자가 더 있을 수 있다.

경찰은 구씨의 시신이 발견된 후 신명호를 유력 용의자로 특정하고 검거에 나섰다.

그를 잡기 위해 전국에 지명수배를 내렸지만 허사였다. 신씨는 도피자금을 갖고 이미 도망친 뒤였다. 경찰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되고 말았다. 한때 해외 도피설이 있었으나 국내에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전라도 지역에서 신명호와 비슷한 사람을 봤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2015년쯤 한 남성이 전라남도 지역의 한 원룸을 임대했다. 그는 단기로 임대하면서 임대료는 현금으로 지불했다. 이때 임대계약서에는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를 제대로 적지 않았다. 집 주인에 따르면 그는 멀티모니터를 갖추며 주식투자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가 바로 ‘신명호’였다.


신씨는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자가용이나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았다. 대신 자전거만 타고 다니며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조차 마트에 직접 가지 않고 대량으로 구매한 후 배달을 시켰다. 원룸 주인이 기억하는 그의 마지막 모습은 자전거만 빼고 모든 물품을 둔 채로 도망갔다는 것이다.

신씨의 취미는 낚시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그는 낚시를 하고 다니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했다. 원룸 잠적한 이후로는 이동수단을 오토바이로 바꾸며 여전히 낚시를 다닌다는 제보까지 확보됐다.

경찰은 신씨가 15년 동안 도주행각을 벌일 수 있었던 것에는 ‘조력자’가 있다고 봤다. 신씨의 사기수법으로 볼 때 동호회 등에 가명으로 가입한 뒤 유부녀들을 먹잇감으로 삼아 관계를 맺은 뒤 도피행각에 이용하고 있을 것이란 분석이다.

이렇게 경찰의 추적을 피해 도피 중이던 신명호는 2018년 6월22일 강원도 속초의 한 원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방에서는 약봉지가 나왔다. 경찰은 신씨가 지병으로 숨진 것으로 판단했다.

신씨는 2017년 말부터 속초에 머물렀다. 낮에는 바깥 출입을 삼가하고, 주로 늦은 밤과 새벽 시간에 얼굴을 가리고 외출한 뒤 낚시를 즐겼다. 결국 15년 동안 해결하지 못한 미제사건이 신씨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아 살해된 피해자나 유족들은 더욱 원통하게 됐다.

끊이지 않은 피해자 부모의 고통

신씨가 도피한 뒤 피해자인 구씨의 부모는 이중삼중 고통을 당해야 했다. 딸이 참혹하게 살해된 것도 억울하고 분한 일인데다 유력한 용의자까지 잠적한 상황이었으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런데 신명호가 구씨의 신용카드로 쓴 ‘카드 값’이 문제였다.
2004년 2월24일자 <한국경제> 보도를 보면 카드사는 구씨의 상속자인 아버지(80)와 어머니(77)를 상대로 2천500여만 원의 카드 이용대금을 청구했다. 구씨의 부모는 “범인이 신용카드를 빼앗아 사용한 금액까지 값으라고 하느냐”며 반발했고, 법정 소송으로 맞섰다.


이에 대해 법원은 “사건이후 결제된 금액은 구씨가 신씨에게 비밀번호를 알려줬다는 증거가 없고, 설령 알려줬다고 하더라도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상태에서 말한 것은 회원 규약상 비밀번호 누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며 카드사의 청구를 기각했다.
다만, 사건발생 전 결제된 750여만 원은 “구씨가 신씨와 골프동호회 회원으로 평소 가까이 지내온 점 등으로 볼 때 구씨 의사에 따라 결제한 것으로 보인다”며 “구씨 부모는 이 금액은 갚으라”고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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