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사건

평택 여고생 송혜희양 실종사건


매년 14세 미만 아동 가운데 약 1만명이 실종되고 있다. 이중 일부는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장기 실종자가 된다.

14세 이상 19세 미만의 아동·청소년 중에는 단순 실종이 아니라 범죄피해 가능성이 높은 실종자들이 있다. 이들은 살아 돌아오거나 시신으로 발견되지 않는 이상 ‘영원한 실종’으로 남게 된다.

그중 한 명이 송혜희양(당시 18세)이다.

경기도 평택에 살던 혜희양은 송탄여고(현 라온고)에 다녔다. 맑고 명랑한 성격으로 효녀였으며 전교 1‧2등을 다툴 정도로 공부도 잘했다. 부모에게는 자랑스런 딸이었다.

1999년 2월13일 겨울 찬바람이 가시지 않은 날이었다. 3학년 진학을 앞두고 있던 혜희양은 오전에 반편성이 있어서 송탄시 서정동에 위치한 학교에 갔다가 오후에는 인근에 있는 친구집에 들렀다. 그곳에서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밤 10시쯤 집으로 가는 막차를 탔다.

하지만 이날 혜희양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딸이 귀가하지 않자 부모는 왠지 불안했다. 밤 11시쯤에는 학교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혹시 우리 혜희 못 봤니?” “오늘 함께 버스를 타지 않았어?”라고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버스 타고 집에 갔다”거나 “잘 모르겠다”는 말뿐이었다.

다음날 부모는 버스정류장에서 집으로 오는 길목의 일대를 샅샅이 뒤졌으나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가족들은 불안감을 떨치지 못했다.

아버지 송길용씨(당시 46세)는 경찰서를 찾아가 실종신고를 접수한 뒤 버스 회사로 갔다. 전날 밤 운행했던 기사를 수소문했고, 다행히 혜희를 버스에 태웠다는 기사를 만났다.

그는 당시 상황을 비교적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버스에는 두 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는데, 한 명이 혜희양이고, 다른 한 명은 신원 불상의 남자였다고 한다. 10시15분쯤 평택시 도일동 하리마을 정류장에서 혜희양이 내리자 이 남자가 뒤따라 내렸다.

버스 기사는 그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나이는 30대 초반으로 보였으며 오리털 파카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고, 등산화를 신고 있었다”고 말했다.

아쉽게도 얼굴과 생김새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동네 사람은 아닌 것 같았고, 몸에서 술 냄새가 났다”고 덧붙였다.

버스에서 내린 뒤에는 혜희양이 앞에서 가고 남자는 조금 뒤따라 갈아 걸어갔다. 이것이 혜희양의 마지막 모습이다. 버스 기사의 증언대로 라면 이 남자는 혜희양의 마지막 목격자이자 실종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인 셈이다.


친구 집이 있는 송탄시 서정동에서 평택 하리마을 입구까지는 약 5km, 이곳에서 혜희양 집까지는 1km쯤 떨어져 있었다. 버스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길은 논과 밭, 야산이고, 가로등도 설치돼 있지 않아 주변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정황상 혜희양은 버스정류장에서 집으로 오는 사이 범죄 피해를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마지막 목격자인 이 남자가 혜희양 실종사건의 핵심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경찰이었다. 실종신고를 받고도 ‘단순 가출’로 여기고 수사에 나서지 않았다. 부모가 “버스에서 내린 수상한 남자”가 있다고 알려줬지만 이를 무시했다. 당시 실종 수사가 그런 식이었다.

가족들의 항의로 실종 3일 후에야 수사에 착수했지만 이미 늦은 때였다. 경찰은 인력을 투입해 논밭, 갈대숲, 하수구, 산 등 인근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마을 정류장에서 함께 내렸다는 남자에 대해서도 동네 사람은 아닌 것으로 파악됐지만 그가 누구인지 신원파악을 하는데는 실패했다.

당시 버스 정류장 주변에는 중장비학원과 합숙소가 있었다. 나주봉 전국미아실종자가족찾기 시민의 모임(전미찾모) 회장은 그 남자가 중장비학원 수강생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는 “실종 초기에 경찰이 적극 수사에 나섰다면 그 남자의 신원도 파악할 수 있었고, 혜희 사건도 장기실종으로 남지 않았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혜희양 실종 당시 송씨 부부는 대형 동물농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부부는 딸을 찾기 위해 전 재산을 정리한 후 생계도 뒤로 미뤘다. 송씨는 1톤 트럭에 딸의 사진이 실린 전단지와 현수막을 만들어 붙였다.

조수석에는 아내를 태우고 직접 운전대를 잡고 평택을 시작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딸을 찾아다녔다. 끼니는 1톤 트럭에서 라면으로 해결했다.

국도와 고속도로 휴게소, 대학가, 지방 교차로 등에는 어김없이 ‘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라고 적힌 현수막을 내걸었다. 역전이나 터미널 등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서는 “실종된 제 딸입니다”라며 전단지를 나눠졌다. 가끔 언론과 인터뷰하고 방송에도 출연했지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송씨의 아내는 딸의 실종 상태가 길어지자 몸과 마음이 지쳐 우울증에 심장병까지 생겼다. 결국 2006년 딸을 그리워하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얼마나 딸을 찾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지 실종 전단지를 방바닥에 깔아놓고 농약을 마셨다. 가슴에는 실종 전단지를 꼬옥 품에 안고 있었다.

아내가 떠난 후 송씨는 장례비용이 없어 주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장례를 치러야 했다. 그는 아내의 주검 앞에서 통곡했다. 그리고 약속했다. “여보, 내가 당신 몫까지 우리 혜희 꼭 찾을테니 너무 염려마”라고 말했다.

송씨는 아내의 시신을 집 근처에 있는 송탄공설묘지에 안장했다. 그는 술과 담배를 끊고 거주지인 평택 단칸방에 ‘나의 딸 송혜희는 꼭 찾는다’고 적은 가훈을 붙인 후 홀로 트럭을 몰고 거리로 나갔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에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전단지를 나눠주는 것이 일상생활이었다. 전단지나 현수막 만들 돈이 떨어지면 오뎅과 떡볶이 장사를 하고, 폐품과 폐지를 주워 팔았으며, 노동일까지 해서 벌었다. 차에서 먹고 자고, 굶는 일도 다반사였다.

딸을 찾는데 전 재산을 쏟아부은 탓에 남은 재산은 낡은 트럭 한 대가 전부였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생활하면서도 정부가 주는 지원금 60만원 중 40만원을 전단지와 현수막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 매주 약 4000장의 전단지를 제작해 뿌렸고, 매달 현수막도 300여개를 걸었다.

전국 팔도에 현수막을 걸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지금까지 송씨가 전국에 건 현수막은 1만 개에 이르고 돌린 전단은 1000만 장에 달한다고 한다. 송씨에게는 딸을 찾는 것이 일상이자 직업이었다.

2015년 5월 그에게 큰 위기가 닥친다. 당시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MERS)가 전국을 강타할 때 송씨도 39번째 확진 판정을 받았다. 뇌경색과 허리 통증으로 평택성모병원에 입원했다가 메르스 판정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딸을 찾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병마와 싸워 13일 만에 완치됐다. 그리고 다시 거리로 딸을 찾아 나섰다.

주위에서는 “이미 죽었으니까 포기하라”는 말도 했지만 송씨는 “죽은걸 확인하지도 못했는데 부모가 자식을 먼저 포기할 수 있나”며 손사래를 쳤다. 송씨는 딸이 어딘가에서 꼭 살아있기를 바라지만, 만약 죽었다고 해도 시신이라도 찾을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죽은 아내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송씨는 “사랑하는 내 딸 혜희야, 너무너무 보고 싶구나. 아빠는 너 한 번 만나보고 죽는 게 소원이란다. 꼭 살아만 있어다오”라며 딸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렸다.

몸과 마음이 지칠대로 지친 그는 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혼자 플래카드를 걸다가 몇 번이나 떨어져 허리와 머리를 다쳤다. 몇 차례 허리 수술을 받았고, 뇌경색이 발병하고, 얼마 전에는 급성심근경색증이 찾아와 병원에서 시술을 받았다.


그렇게 딸을 찾아다니던 송씨는 지난 8월26일 오후 실종 전단지와 현수막을 실은 트럭을 몰고 나섰다가 도로에서 마주오던 덤프트럭과 충돌했다. 심정지 상태로 병원으로 옮겨져 심폐소생술을 받았지만 끝내 세상을 떠났다. 향년 71세. 딸을 찾아 거리로 나선 지 25년 만이다. 그가 아픈 몸을 이끌고 마지막까지 달았던 현수막은 한동안 전국 곳곳에 걸려 있었다.

단란했던 송길용씨 가족은 딸의 실종과 함께 일상의 시계가 멈춰버렸다. 이때부터 오로지 실종자를 찾기 위한 일념으로 고통스런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송씨의 아내가 딸을 그리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송씨 또한 그토록 애타게 찾던 딸의 생사를 확인하지 못한 채 거리에서 한많은 삶을 마감했다. 이 모든 것이 장기 실종자 가족들이 겪고 있는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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