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사건미제사건

유명 공인회계사 여행가방 살인사건


서울 도심을 지나는 한강은 예나 지금이나 시민들이 낚시를 즐기는 곳이다.

1990년 11월4일 오전 11시쯤 문아무개씨(31)는 서초구 반포동 반포대교 한강 남단에서 혼자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때 동작대교 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서 둥둥 떠내려오는 여행용 가방 하나가 눈에 띄었다.

문씨는 낚시 바늘을 이용해 가까스로 가방을 끌어당기는데 성공했다. 그는 가방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가 궁금했다. 잠금 장치를 풀고 그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기겁하고 말았다. 가로 1m, 세로 70cm 크기의 여행 가방 안에는 검정색 양복 차림의 중년 남성이 웅크린 채 숨져 있었던 것이다.

문씨는 곧바로 112로 경찰에 신고했다. 신고를 받은 서초경찰서 형사대가 현장으로 출동했다. 신원확인결과 시신은 유명 공인회계사인 임아무개씨(50)였다.

발견당시 임씨의 얼굴에는 비닐봉지가 씌워져 있었으며, 안면부 곳곳에 외상이 있었다. 오른쪽 눈 부위에는 심하게 멍이 들어있었고, 뒷머리는 둔기로 얻어맞은 듯 2cm 정도 찢어진 상태였다. 한 눈에 봐도 타살임을 알 수 있었다.

임씨는 6일 전에 가출신고 된 상태였다. 부인 강아무개씨(43)는 “10월28일 ‘친구를 만나고 오겠다’며 차를 몰고 나간 뒤 연락이 끊겼고, 다음날인 29일 KBS측으로부터 ‘프로그램 녹화에 나오지 않았다’는 전화가 와서 가출인 신고를 했다”고 말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 결과 임씨의 직접 사망원인은 쇠뭉치나 야구방망이 등에 맞아 생긴 ‘뇌출혈’이었다.

시신의 부패 정도와 위속의 음식물이 완전히 소화된 것으로 미뤄 사망일시는 실종된 28일보다 적어도 하루가 지난 29일에서 11월1일 사이로 추정됐다. 타살시 흔히 나타나는 반항흔이 전혀 발견되지 않아 면식범에 의해 살해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내다봤다.

임씨의 마지막은 비참했다. 그의 폐 속에서는 ‘플랑크톤’이 검출됐는데, 이것은 그가 숨이 끊어지지 않은 가사상태에서 물속에 던져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폭행을 당한 임씨가 호흡을 멈추자 사망한 것으로 판단한 범인들이 한강에 던진 것이 된다. 경찰은 신발(구두)이 없었던 것으로 봐서 실내에서 살해된 뒤 2명 이상의 공범에 의해 한강에 버려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충남 공주 출신인 임씨는 국제대 세무학과를 졸업한 뒤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서울 강남 잠원동에 자신의 이름을 딴 ‘세법연구원’을 차려 23년간 회계사로 활동했다. ‘세무사’ 자격도 갖고 있었으나 세무사회에는 등록하지 않고 주로 공인회계사 활동만 해왔다.

임씨는 KBS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에 고정출연하며 유명세를 얻었다. 세무공무원 교육원과 충남대 경영대학원에도 출강했다. 임씨는 또 정치에도 뜻을 두고 10대 총선에서는 공주‧논산에서 출마했으며, 11대 강남, 13대에는 서초을구에서 각각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임씨는 겉으로는 남부러울 것 없이 없었다. 부와 명예를 겸비한 전형적인 사회지도층이었다. 그러나 그의 실제 삶은 외형과는 많이 달랐다. 우선 여자관계가 복잡했다.

임씨는 서울대 출신의 고등학교 교사인 강씨와 1976년 결혼해 2남2녀를 낳았으나 김아무개씨(40)와 동거하며 따로 1남3녀를 두고 있었다.

이밖에도 5~6명의 여자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이러다보니 본부인인 강씨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때문에 임씨의 어머니와 동생 등은 옥수동에서 동거중인 김씨의 집에서 함께 생활했다.


임씨는 공인회계사로 막대한 수익을 얻었다. TV출연 등을 통해 세무관련 전문가로 유명세를 타면서 기업 거래가 줄을 이었다. 10여개의 대기업과 거래를 트면서 상당한 돈을 모았다.

그러나 국회의원 선거에서 연거푸 낙선하고, 여러 여자들과 관계를 맺으며 탕진하는 바람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사건 당시 그의 재산은 1억5000만 원 정도에 불과했다. 서초동 삼풍아파트도 8500만원의 전세에 들어 살 정도였다. 돈에 쪼들리자 일의 관행도 바꿨다. 보통 세무관계 일을 맡을 때는 후불정산 방식이었으나, 그는 거래처에 선금을 요구했다.

경찰은 임씨의 실종이후 행적을 밝혀내는데 주력했다. 그가 직접 타고나간 승용차(로얄 살롱)가 직접적인 단서가 될 것으로 보고 수사력을 집중했다. 이를 위해 차량수배전단 2만 장을 제작해 전국에 배포하는 한편 경찰력을 동원해 서울지역 순찰을 강화했다.

11월29일 오후 6시쯤 강남구 도곡동 영동세브란스병원 구내주차장을 순찰 중이던 서초서 도곡파출소 소속 의경이 동종 차량을 발견했다. 경찰은 차적 조회 끝에 임씨 소유임을 밝혀냈다. 발견당시 차량의 문은 잠긴 상태였으며 트렁크에는 임씨가 평소 사용하던 테니스라켓이 들어있었다.

임씨 사건은 그의 업무와 복잡한 여자관계로 볼 때 다양한 요소가 내제해 있었다. 그러다보니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데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경찰은 우선 임씨가 업무와 관련해 살해됐을 가능성에 주목했다.

임씨는 대기업 10여개를 포함해 100여 곳의 세무관계와 제무제표 작성 등을 도맡아 왔다. 이 과정에서 특정 회사가 업무 기밀이 누설될 것을 우려해 임씨를 청부살해했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또 돈에 쪼들리던 임씨가 기업의 비리를 약점으로 잡아 금품을 요구하다가 청부 살해됐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임씨는 돈 관계, 여자관계 등이 복잡하고 업무에 있어서도 냉철했다.

경찰 조사결과 임씨의 주변 인물들 모두 일정 정도 이상의 원한관계를 품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한 번은 사무장으로 근무하던 친동생이 수익금을 빼돌리다 임씨에게 들통 났다. 임씨는 즉시 해고한 뒤 퇴직금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경찰은 임씨의 본부인 강씨를 의심해 법원으로부터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가택수사를 벌이기도 했다. 사건 직후 강씨의 진술 중 임씨가 집을 나간 경위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경찰은 이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이 부분에 대한 추가조사도 실시했다.

임씨의 자가용을 운전했던 강아무개씨(35)와 여비서 조아무개양(24)도 용의선상에 올랐다. 강씨의 경우 82년부터 8년간 임씨의 자가용 기사로 일해 왔다.

경찰은 강씨가 오랫동안 운전기사로 일하면서 업무상 비리와 여성편력 등 임씨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는 주위의 진술도 확보했다. 유족들도 강씨가 “결혼식을 앞두고 임씨에게 결혼자금을 보태달라고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뒤 불만을 품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경찰은 강씨를 용의선상에 올려놓았다.

얼마 뒤 강씨는 신혼여행지인 강원도 속초에서 전화를 걸어 경찰에 자진 출두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뒤 상경했다. 강씨는 경찰조사에서 “숨진 임씨가 낮에는 거의 차를 이용하지 않고, 밤에는 임씨 스스로 차를 몰아 여자관계 등 개인적인 사정은 잘 알지 못 한다”고 진술했다.

임씨와 가깝게 지내온 은평구 역촌동 소재 술집여주인 최아무개씨(48)도 조사했다. 최씨는 실종 전날인 27일 임씨를 만났다. 그녀는 경찰에서 “28일 이후 임씨를 만나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임씨의 내연녀 중 또 한 사람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한다.

H금은공업 회장 이아무개씨(40)였다. 이 회사 사장으로 일하단 퇴직한 임아무개씨(66)에 대한 집단폭행사건을 수사하다 이씨가 숨진 임씨와 내연관계인 것을 알았다.

경찰에 따르면 이씨는 경기도 이천에 골프장 건설을 추진하면서 임씨와 알게 된 후 내연관계로 발전했다. 임씨는 행방불명되기 직전 이씨에게 ‘부동산임대업무처리비용’을 요구했고, 그녀는 “내연 관계를 가족에게 알리겠다”고 위협하며 7000만 원을 요구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은 심한 말다툼을 해왔다는 것이다.

경찰 조사결과 이혼녀인 이씨는 폭력전과 17범인 오아무개씨(39)를 전무로 고용했고, 임씨가 실종된 후에는 그와 동거하고 있었다. 이씨는 또 회사를 경영하면서 자신의 사업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오씨의 동생(35‧폭력전과 27범) 등 폭력배를 동원해 청부 폭력을 일삼아온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이씨가 주변의 폭력배를 동원, 임씨를 살해했으며 증거를 없애기 위해 사체를 가방에 넣어 한강에 버린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이씨는 임씨의 살인혐의에 대해서는 완강히 부인했다. 그녀를 범인으로 단정할만한 증거도 찾지 못했다.

경찰 수사는 점점 오리무중으로 빠지기 시작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의심가는 인물들을 소환해 집중 조사를 벌였으나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모두 알리바이가 확실하거나 별다른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여기에다 목격자나 사건 해결의 단서를 찾지 못해 영구 미제로 남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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