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생활

한국물류기자협의회 결성

입사한 지 약 한 달쯤 됐을 때다.

월간 기계기술을 담당하던 선배 기자가 ‘과학기술기자모임’이 있다며 함께 가자고 권유했다. 출입과 취재 분야가 달랐지만 다른 기자들과 교류할 겸 해서 동행했다.

회사 근처인 용산경찰서 인근 식당에서 모임이 있었는데, 기계와 기술 쪽의 전문지 기자들 15명 정도가 나왔다. 이들은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 교류해 오고 있었다.

여기서 해사프레스(현 한국해운신문) 김성종 기자를 처음 만났다. 김 기자는 물류 분야였지만 이전에 기계 관련 전문지에서 일할 때부터 이 모임에 나왔다고 했다.

나는 과학기술기자모임에 참석한 후 ‘물류분야도 기자들이 모이면 좋을텐데…’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햇병아리였던 나는 업계의 많은 기자들과 교류를 원했지만, 변변한 친목모임 하나 없었다.

그러다보니 기자들 간의 정보교류나 소통이 꽉 막혀 있었다. 취재현장에서 마주쳐도 서먹서먹하게 있다가 명함만 교환하고 헤어지기 일쑤였다. 또 경쟁 매체를 의식하는 풍토가 있었다. 물류 바닥에서 ‘너 따로’, ‘나 따로’ 모두 따로따로 놀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김성종 기자에게 만나자고 연락했다. 소주 잔을 비우며 “김 기자, 물류 쪽 기자들 모임이 있어야 한다고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냐?” 고 물었더니 그도 “필요하다”며 공감을 표시했다.

그러면서 “필요는 한데 누가 추진할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다른 사람한테 미루지 말고 내가 직접 그 일을 맡겠다고 했다. 내가 나설테니 김 기자가 도와달라고 했고, 우리는 서로 의기투합했다.

왼쪽이 김성종 기자, 오른쪽이 필자.

나는 먼저 어떤 성격의 기자 모임을 만들지 고민했다. 단순한 ‘친목모임’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처음의 순수성이 변질될 수 있고, 술판이나 벌이다가 흥청망청 할 우려도 있었다.

그러다 ‘사이비 집단’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약’이 아니라 ‘독’이 될 게 뻔했다. 그래서 물류기자들을 대표하는 ‘공식 기자단’을 출범시키기로 했다.

초대 회장에 누가 좋을 지 김 기자와 의논했다. ‘기자단’의 명분과 위상을 감안해 종합물류지에서 맡아야 할 것 같았다. 그 대상이 3대 물류종합지로 좁혀졌다.

당시 물류종합지로는 내가 소속되어 있던 ‘월간 물류정보’를 포함해 ‘월간 물류시대(현 물류와경영)’, ‘월간 물류매거진’이 있었다.

현장을 뛰는 기자 중에 가장 연장자는 물류매거진의 이상직 차장이었다. 그에게 전화를 걸어 취지를 설명했다. “이 선배께서 회장을 좀 맡아 줄 수 없느냐”고 물었더니, 반응이 시큰둥했다.

그는 “나는 아닌 것 같고, 다른 사람을 물색하라”며 기자단 출범 자체를 반기지 않는 뉘앙스였다.

물류시대의 이명윤 과장(기자)에게 전화를 했다. 보통 언론사에서는 평기자 다음에 차장인데 물류시대는 일반 회사 직제를 따르고 있었다.

이 과장에게 동참해 줄 것으로 요청하고, 회장을 맡아달라고 했지만 역시 냉담했다. 이상직 차장이나 이명윤 과장이나 경쟁지인 그것도 신출내기 기자가 기자단을 만든다니까 탐탁치않게 여겼을 수도 있다.

이제는 굳이 ‘물류종합지’를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범위를 넓혔다. 김 기자와 둘이서 기존 선배들 중에서 신망 있는 사람을 물색했다.

그랬더니 공통적으로 한 사람을 꼽았다. 운송신문에서 발행하는 코리아쉬퍼스저널의 김성우 차장(현 물류신문 본부장)이다.

김 기자와 난 용산의 운송신문으로 찾아가 김성우 차장을 만났다. 커피숍에서 “초대 회장을 맡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김 차장도 처음에는 고개를 흔들며 고사했지만 “후배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생각으로 맡아 달라”고 했더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단 “출범식 때 회장 추천을 받고, 회원들 다수가 동의할 때”라는 단서를 달았다.

기자단의 명칭은 ‘(가칭)한국물류기자협의회’로 정했다. 1996년 4월12일을 D-day로 잡았다. 장소는 용산경찰서 앞의 한 식당이다.

그때부터 물류기자단에 참여할 매체를 선별하고 기자이름이 포함된 리스트를 만들었다. 약 20곳 정도가 됐다. 기자단 출범을 알리고 참석해 달라는 공문도 직접 만들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이메일이 활성화되지 않아 일일이 팩스를 통해 공문을 전송했는데, 작업이 단순하지 않았다. 팩스에 오류가 많아 한 곳에 몇 번씩 재전송하는 일이 반복됐다. 팩스도 모뎀 수준이어서 전송에 걸리는 시간도 꽤 오래 걸렸다. 팩스를 보낸 후에는 해당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수신여부를 일일이 확인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회사 선배들로부터 핀잔도 많이 들었다. 팩스 앞에 앉아있으면 선배들이 지나가면서 어깨를 툭툭 쳤다. “이제 기자생활 석 달 밖에 안 된 놈이 뭘 한다고 그러고 있냐”고 했다. 여기에는 “수고한다”는 말은 안 했지만 격려의 의미도 담겨있었다.

드디어 약속한 날이 됐다. “얼마나 많은 기자들이 나올까”하는 마음에 하루종일 설렘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날 비가 내렸다.

나와 김성종 기자는 미리 약속장소에 나가 선배나 동료 기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빗줄기가 굵어지는 만큼 참석률도 신통치 않았다. 저녁 8시30분쯤 됐을 때 6개 매체 8명 정도가 모였다.

궂은 날씨에도 이 정도가 모였다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모인 것도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물류기자단’ 출범을 선언하기에는 부족했다. 원래 모임을 추진하면 사람들이 북적북적해야 신이 나는 법인데, 좀 아쉬웠다.

출범을 한 달 뒤로 미뤘다. 나는 명단에 있는 기자들에게 일일이 전화해서 참석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한 달 뒤 같은 장소 같은 시간. 이 날은 날씨가 참 좋았다. 미리 단단히 약속을 받아서인지 참석자도 11개 매체 15명 정도가 나왔다. 기자들이 하나 둘씩 식당 문을 열고 들어올 때마다 모두 일어나서 명함을 꺼내고 악수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때의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예정대로 식순에 의해 회의를 진행했고, 기자단 운영방안도 논의해 결정했다. 회장은 김성우 차장이 만장일치로 추대됐다.

나는 기자단의 모든 것을 총괄하는 대외사업국장을 맡았다.

기자단이 주도적으로 대내외 사업을 진행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직함이었다. 사실상 물류기자단의 모든 업무는 나를 거쳐야만 진행될 수 있었다. 기자단 윤리강령도 정했다. 이렇게 해서 1996년 5월10일 비로소 ‘한국물류기자협의회’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기자생활 4개월 만에 물류기자단 결성을 이끌었다.

물류기자협의회는 물류업계의 기생충이 아니라 신호등을 지향했다. 적극적으로 사업을 추진했다. 물류단체장이나 기업의 CEO가 바뀌면 관례적으로 인터뷰를 한다.

이전에는 매체들이 개별적으로 인터뷰를 추진하다보니 여간 비효율적이지 않았다. 단체나 기업 입장에서도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여러 번 인터뷰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물류기자협의회 취재요청 공문.

여기에 소요되는 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물류기자협의회가 출범하면서 달라졌다. 개별인터뷰는 ‘공식인터뷰’로 대체했다.

인터뷰 내용도 회원들에게 질문을 미리 받아서 공식질의서를 만들었다. 인터뷰 내용이 천편일률적으로 같을 수 있어, 현장에서 돌발 질문을 통해 차별화 하도록 했다. 말 그대로 ‘인터뷰 공동화’를 이룬 셈이다.

당시만 해도 일부 단체나 기업에서는 인터뷰 후 촌지를 주는 관행이 있었는데, 우리는 이것을 공식 거부했다. 물류기자협의회는 이런 낡은 관행들을 하나 둘씩 타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