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륜으로 사기 친 선배 기자 긴급수배
물류신문 창간을 준비할 때인 1997년 6월쯤이었다.
어느 날 오전 물류월간지 선배 기자인 A가 용산으로 찾아왔다. 평소 친했던 선배는 아니었다. 당시 나는 기자생활 2년차였고, 그는 9년차쯤 됐으니 대 선배였다. 그는 대뜸 “급한 일이 있다”며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때 내 수중에는 월간 물류정보를 그만두고 받은 퇴직금 150만 원 정도가 있었다. 그걸 노리고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곧 갚겠다” “급하니 부탁한다”는 말에 현금으로 100만원을 빌려줬다.
그런 뒤에 그 선배는 내게 계속 접근해왔다. 자꾸 일을 만들어서 나한테 찾아왔다. 그렇게 1년 정도가 지났다.
1998년 8월쯤 그는 울먹이며 내게 전화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지금 올 수 없느냐”는 것이었고, 나는 곧바로 장례식장으로 갔는데, 조문객 중 제일 먼저였다. 나는 그 선배 부친의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수시로 그곳에 들러 선배를 챙겨줬다.
선배 아버지 발인이 끝나고는 내게 한강에 가고 싶다고 했고, 우리는 여의도 고수부지에 갔다. 당시에는 한강 바로 위에 가두 판매대가 있었다.
우린 점심 때 쯤부터 그 중 한 곳의 판매대에 있는 캔 맥주를 마시기 시작해 저녁 때 쯤에는 그곳에 있던 캔 맥주를 모두 비웠다. 졸지에 아버지를 잃은 선배에게 옆에서 같이 술을 마셔주는 것만으로도 작은 위로가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왼쪽 팔에 찬 시계를 보여주며 ‘아버지의 유품’이라면서 눈물을 흘렸다.

얼마 후 A는 내게 전화해서는 근로복지공단에서 아버지의 산재처리를 못해준다며 도움을 청해왔다.
그 선배의 아버지는 화물차 운전기사였고, 뜨거운 여름날 차량을 정비하다가 뇌출혈로 쓰러진 후 사망했는데, 그게 산재처리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가깝게 지내던 국회의원 보좌관에게 이런 사정을 얘기했다. 그는 얼마 후 “근로복지공단에 잘 얘기해 놨다”며 내게 확인전화까지 해 줬다.
다음날 오전 여의도 전경련 회관에서 행사 취재를 하고 있는데, A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근로복지공단에서 7천 만 원 정도가 통장으로 입금됐다”며 좋아했다.
나는 내심 놀라웠다. 어제까지만해도 처리가 안 된다던 것이 ‘국회의원 실’ 전화 한 번에 해결됐다. 그것도 하루도 되지 않아 통장으로 돈이 입금됐으니 ‘권력의 힘’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얼마 뒤 내게 이상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물류업계 종사하는 그는 “정 기자, A기자 아버지가 위독하셔?” 라고 묻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소리예요, 얼마 전에 돌아가셨는데…”라며 말 꼬리를 흐렸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자초지종을 좀 더 자세히 말해보라 했더니 “A기자가 나한테 전화해서 ‘아버지가 위독해서 수술을 받아야 하는데 수술비가 없다’며 돈을 빌려달라고 했고, 통장으로 100만원을 입금해 줬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돌아가신 아버지 수술은 뭐고 수술비는 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더욱이 A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유산을 상속받았고, 산재로 사망처리가 돼 근로복지공단에서 약 7천만 원 정도의 돈도 받았다.
그의 사정이 좋아졌으면 좋아졌지 더 나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돌아가신 아버지를 두 번 죽이는 패륜을 저질렀다고는 상상이 가지 않았다. 곧바로 A에게 전화했더니 받지 않았다. 회사로 전화했더니 며칠 째 무단결근이라고 했다.
그때부터 탐문을 시작했다. 또 다른 피해자가 있는지를 찾았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알아봤더니 하나 같이 같은 방법으로 돈을 빌려줬다고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아는 사람한테는 멀쩡한 어머니가 위독하다며 ‘수술비 명목’으로 돈을 빌렸다. 액수도 상당했다. 돈을 빌려준 사람들은 기자인 A에게 밉보일까봐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사기 행각은 기자 생활하면서 받은 명함이 밑천이었다. A는 무척이나 뻔뻔했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아도 명함이 있으면 무조건 전화를 걸었다. 돈을 빌려줄 때까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달라붙었다. 눈물까지 글썽이는 연기를 했다. 그에게는 죽은 아버지까지 사기의 밑천이 됐던 것이다.
그의 연극이 통했던지, 어떤 단체의 간부는 은행대출을 받아 1000만 원을 빌려 줬고, 또 다른 단체는 회사의 공금을 내주기도 했다. 모 기업의 팀장은 회사 공금에서 100만원을 빌려줬다가 연락이 끊기자 자신의 사비로 채워 넣기도 했다. 100만원~200만원씩 빌려줬다는 사람은 상당히 많았다. 이런 방식으로 이씨가 끌어 모은 돈은 확인된 것만 1억 원이 넘었다.
문제는 A가 자취를 감춘 후 남아 있던 동료 기자들이었다. 선‧후배 기자들이 이씨가 저지른 사기 행각으로 인해 도매금으로 매도되는 참담한 현실을 겪어야 했다. 나는 이런 상황을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1999년 2월17일자 물류신문 ‘기자수첩’에 ‘기자명함을 밑천으로 한 사기행각을 막자’는 글을 실었다.

A의 사기행각을 솔직하게 밝히고, 동료기자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사과한다는 내용이었다. 내 글이 보도된 후 업계 기자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져 대립각을 세웠다. “감히 선배를 씹느냐”며 나를 욕하는 고참 기자들과 “할 말을 했다”는 젊은 기자들로 편이 갈렸다.
그렇게 두 달 쯤 지났을까. 다시는 볼 수 없을 것 같았던 A가 모습을 나타냈다. 모 신문사에 입사원서를 내고 면접까지 봤다. 참으로 뻔뻔한 사람이었다. 우리 기자들은 A의 복귀를 막기 위해 해당 신문사 간부에게 ‘반대의 뜻’을 전했으나 그 회사는 A를 기자로 채용했다.
A가 출근하는 날 나는 그에게 전화를 했다. “무슨 낯을 들고 뻔뻔하게 다시 돌아올 생각을 했느냐?” 고 강하게 따져 물었다. 그런데 A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난 돈을 빌렸을 뿐이고 갚으면 되지 않느냐”며 오히려 내게 화를 냈다.
‘제 버릇은 개 못 준다’는 말이 있다. A는 입사 두 달도 채 안 돼 또다시 무단결근하는 방식으로 잠적했다. 그가 모습을 감춘 뒤 이전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돈을 빌려줬다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A가 머물렀던 그 곳에서도 사기행각은 계속됐던 것이다. 나는 한 선배 기자와 A를 찾기 위해 그의 집 근처에서 잠복했다.
그가 나타나기를 한참동안 기다렸지만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집에 가 보니 세들어 살던 곳은 이사하고 집안은 텅 비어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급하게 이삿짐을 쌌다”고 했다.
도저히 용서가 안 됐고, 용서할 수도 없었다. 그의 행적을 다시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어떤 방식으로든 A의 사기행각을 막아야 했다. 그의 행적을 쫓다가 퀵서비스 업계에서 일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A의 사진 한 장을 구해서 수배 전단 100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륜특송협회 정기총회가 열리는 장소에서 수배 전단지를 뿌렸다. 그곳에서도 사기행각을 벌였다는 것을 현장에서 알았다.

그 후 지금까지 A는 감감무소식이다. 서울 근교에서 퀵서비스 라이더로 일하는 것을 봤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지금은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현재 그의 삶이 궁금하다.
그는 왜 죽은 아버지와 살아있는 어머니까지 이용해 패륜 사기를 저지른 것일까. 대체 그 돈은 어디에 썼을까. 지금까지 의문이다. 공든 탑은 쌓기는 어렵지만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