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도 억울한 죽음 ‘화성 장현웅씨’ 사망사건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에는 신경대학교(현 화성의과학대학교)가 있다.
2012년 6월27일 신경대학교 앞 공사장 물웅덩이에서 20대 남성의 시신이 발견된다. 실종된 지 5일만이다. 그는 회사에 갓 입사한 새내기 신입사원인 장현웅씨(28)였다. 경찰은 장씨가 공사장 낭떠러지에 떨어져 익사한 것으로 보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부검을 의뢰했다.
필자는 장씨가 시신으로 발견된 지 6일 만인 7월3일 오후 현장에서 취재를 시작했다. 이곳에서 장씨의 아버지와 친구 임동진씨를 만났다. 현웅씨의 시신을 발견한 것도 친구 임씨였다.
대학을 중심으로 사방 1km 안에는 건물 하나 없이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택지 개발 공사로 인해 주변은 온통 공사장으로 변해 있었다. 이곳저곳에 땅이 파헤쳐져 있고, 군데군데 흙더미가 쌓여 있었다.
학교는 방학 중이어서 학생들의 발걸음도 뜸했다. 장씨가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필자는 장씨가 실종된 후 시신으로 발견되기까지 117시간의 행적을 추적해 나갔다.
현웅씨는 경기도 화성시 북양동에 있는 ㅅ기업에 다녔다. 이 회사는 장씨가 실종되기 전날인 금요일에 일과를 마치고 근처 ㅊ식당에서 회식을 했다. 이때 장씨 회사의 동료가 그의 모습을 촬영했는데, 붉은색 계통의 남방셔츠에 검은색 청바지 그리고 검은색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장씨를 포함한 회사 동료 4명은 화성시 남양동에 있는 한 카페로 자리를 옮겨 2차로 술을 마셨다. ㅊ식당에서 승용차로 10분 정도의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한창 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동료들끼리 말다툼이 있었다. 장씨는 술에 취한 데다 말다툼까지 벌어지자 먼저 카페를 나왔다.
그 뒤 실종됐고, 연락도 끊겼다.

장씨의 본가는 경기도 성남이다.
그는 취업하면서 화성시 남양동 우림아파트에 있는 회사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매일 저녁 기숙사에 들어오면 어머니와 전화 통화를 했다. 주말에는 성남에 있는 부모님 집에 가서 지냈다.
그런데 회식한 날 이후부터는 연락이 없었다. 토요일에는 절친인 임동진씨와 만나기로 약속까지 한 상태였다. 친구 임씨에게도 가타부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휴대전화의 전원은 꺼져 있었다.
친구 임씨는 “금요일 저녁에 현웅이와 마지막으로 통화했다. 그 후 연락이 없어서 ‘잠수를 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요일에 현웅이 어머니로부터 ‘연락이 안 된다’라며 전화가 왔다”고 말했다. 장씨 부모와 친구들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수십 차례 통화를 시도했으나 여전히 먹통이었다. 다음 월요일에는 회사에도 출근하지 않았다. 장씨 아버지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아들의 신용 카드 사용 내역을 알아봤다.
실종 당일 이후 사용한 흔적이 전혀 없었다. 가족들은 더는 기다릴 수가 없었다. 장씨 아버지는 실종 3일째 아들 회사 부서 팀장(과장)과 함께 화성 서부경찰서를 찾아가 실종 신고를 접수했다. 휴대전화 연락이 안 되고, 카드를 사용한 흔적이 전혀 없다는 말까지 했다.
그런데 경찰은 ‘단순 가출’에 무게를 두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장씨 아버지는 119에 전화를 걸어 휴대전화 위치 추적을 했다. 마지막으로 신호가 잡힌 곳은 ‘ㄴ성당’으로 나왔다. 그는 남양파출소를 찾아가 아들이 실종된 날을 전후로 ‘신원 불상자’나 ‘주취자’ 신고가 들어왔는지를 물었다.
파출소에서는 “그런 사람이 없다”고 했다.
아들의 흔적이라도 찾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버지는 허탈했다. 혹시 교통사고가 났나 싶어서 ㄴ성당에서 기숙사가 있는 아파트까지 길을 따라 걸었지만 별다른 것이 없었다. 친구들도 현웅씨를 찾는데 합류했다. 동진씨와 두 명의 친구들은 성당 근처에서부터 인근의 하천을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현웅씨의 흔적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
이날부터 장씨 아버지와 친구들은 함께 움직였다. 화성 서부경찰서와 남양파출소를 오가며 수사를 촉구했다. 현웅씨가 머물렀던 동선의 CCTV와 119에 확인을 했느냐는 말에 경찰은 “우리가 모두 확인했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한 가닥 희망마저 무너지는 순간이다.
가족들과 친구들은 현웅씨와 회사 동료들이 2차로 술을 마셨던 ㅂ카페-휴대전화 신호음이 마지막으로 잡힌 ㄴ성당-회사 기숙사 방향의 동선을 집중적으로 살폈다. 그러다 현웅씨가 카페를 나가는 것을 본 목격자를 찾았다. 그는 “오전 1시쯤 큰길로 나갔다”고 알려줬다. ㅂ카페에서 장씨의 기숙사까지는 걸어서 15~20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27일 오전부터 경찰의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됐다. 당초 경찰에서는 ‘기동타격대’가 온다고 했으나 오전 9시30분쯤 형사 4명이 왔다. 성당에서부터 수색을 시작했다. 역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동진씨는 ‘혹시나’해서 현장에 나온 서부경찰서 여성청소년계 계장에게 농협 CCTV를 한 번 보자고 했다.
그런데 그곳에 현웅씨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실종 당시의 복장과 걸음걸이가 현웅씨와 똑같았다.

경찰에서는 분명히 “CCTV를 모두 확인했다”고 말했지만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현웅씨가 2차로 간 카페에서 나와 기숙사를 가려면 반드시 농협을 지나가야 한다. 그런데 경찰은 가장 중요한 CCTV를 확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현웅씨의 모습을 확인했으니 경찰이 곧바로 수사에 들어갈 줄 알았다. 그랬는데 경찰은 대뜸 ‘점심을 먹자’고 했고, 2시간을 기다렸다. 그때까지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동진씨는 친구들과 함께 현웅씨의 동선을 따라 CCTV가 있는 식당, 자동차 정비소 등을 찾아갔다.
그런데 동진씨와 친구들은 그곳에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곳에 있는 CCTV도 경찰은 확인하지 않았고, 해당 영업점을 통해 이것을 알게 됐던 것이다. 그러니까 경찰은 여러 곳의 CCTV 중 ㅂ카페와 버스 정류장 근처에 있는 방범 CCTV 그리고 기숙사 CCTV 정도만 확인한 것이었다. “우리가 다 찾아봤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더 이상 경찰을 믿을 수 없었던 가족과 친구들은 119에 전화를 했다. 실종 당일 전후로 “주취자 신고가 들어온 것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여기서 또다시 충격적인 말을 듣는다.
6월23일 토요일 오전 1시37분쯤 ㄴ식당 앞에서 ‘주취자 신고’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ㄴ식당 앞 도로변에 장씨가 쓰러져 있었고, 지나가던 한 시민이 119에 신고했던 것이다. 당초 “주취자가 없었다”던 경찰의 거짓말이 또 다시 들통 난 순간이다.
그런데 119가 장씨를 이송한 곳은 다름 아닌 남양파출소였다.
장씨 아버지가 25일 남양파출소를 찾았을 때는 “신고가 없었다”고 말한 그곳이다. 장씨 아버지와 친구들은 남양파출소를 찾아갔다. 경찰관에게 ‘근무일지를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그곳에는 ‘신원 미확인자’라고 적혀 있는 기록이 있었다. 당시 근무자는 “(신원 미상의 주취자를) 신경대학 기숙사에 내려줬다”고 했다.
계속된 경찰의 거짓말에 장씨 아버지와 친구들은 격앙했다.
27일 오후 동진씨와 친구 2명 그리고 경찰관 1명이 순찰차를 타고 신경대학으로 찾아갔다. 학교 관계자에게 현웅씨가 실종됐던 날을 전후해서 특이 사항이 없었는지를 물었다. 그랬더니 “이상한 일이 없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 관계자는 “이 근처가 위험하니 여기저기 한번 찾아보라”고 했다.
동진씨와 친구들은 서로 분산해서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한다. 동진씨는 학교와 공사장의 하천을 둘러봤다. 그리고 얼마 후 학교와 공사장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수로 옹벽 아래에서 그토록 찾아 헤맸던 친구의 시신을 발견한다.
바로 현웅씨였다. 장씨 아버지도 뒤늦게 현장에 도착해 아들의 주검을 확인했다.

최초 발견 당시 현웅씨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버지에 따르면 “현웅이가 있었던 곳에만 물이 고여 있었다. 깊이는 약 30cm쯤 됐다. 엎드려 있는 상태였고, 머리는 물에 반쯤 들어가 있었다. 오른쪽 이마에 작은 타박상이 있었고, 왼쪽 팔목에도 살짝 멍이 들어 있었다.
머리 오른쪽에도 약간의 타박상이 보였다. 얼굴은 잔뜩 부어올라서 몰라볼 정도였다. 특이한 것은 운동화에 흙이 전혀 묻어 있지 않은 것이다. 오른쪽 뒷주머니에서 지갑과 신분증이, 왼쪽에서는 휴대전화가 나왔다”고 설명했다.
필자가 시신 발견이후 현장을 찾아가서 보니 옹벽은 약 5m 정도의 높이였고, 낮에도 경계가 구분이 안 됐다. 특히 밤에는 칠흑같이 어두워 멀쩡한 사람도 옹벽 아래에 추락할 수 있는 곳이었다. 당시 사고 현장에는 안전 펜스가 설치돼 있지 않았다.
장현웅씨의 시신은 검시를 위해 남양동에 있는 병원에 하루를 안치했다가, 서울 강남 성모병원으로 옮겨 3일장을 치렀다. 그리고 성남 화장장에서 화장해 분당에 있는 납골당에 안치했다. 국과수 부검결과 익사로 결론났다.
필자는 장씨가 지내던 우림아파트 기숙사에 찾아갔다. 그가 사용하던 물건은 깨끗하게 정리돼 한쪽에 놓여 있었다. 접이식 책상 한 개, 여행용 가방 두 개, 청소기 하나, 야구 모자 등이 전부였다. 스물여덟 살의 꿈 많은 청년은 이렇게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한 채 한 줌의 재로 사라졌다.
장씨의 유족들과 친구들은 어이없는 죽음에 비통해 했다. 그의 아버지는 “우리 집안의 아이들 가운데 현웅이가 유일한 남자였다. 그런데 이제 자손이 끊기게 됐다. 억울하게 죽은 현웅이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야 한다”며 눈물을 훔쳤다.
그런데 장현웅씨는 어떻게 신경대 앞에서 숨져 있었던 것일까. 장씨는 신경대와는 아무런 연고가 없다. 그는 성남에 있는 신구대를 나왔고, 여자 친구도 없었다. 필자는 좀 더 추적해 들어갔다.
장씨를 신경대 앞까지 데려간 것은 다름 아닌 경찰이었다.
경찰은 술에 취한 장씨를 왜 이런 곳에 데려다 놓은 것일까. 이에 대해 화성 서부경찰서는 “도로변에 장씨가 쓰러져 있었고, 순찰차가 출동하니 근무자에게 ‘(나는) 신경대학교 학생이며 기숙사에서 살고 있다’고 말해 신경대 현관 앞에 내려주고, 근처 벤치에 앉는 것을 본 뒤 ‘괜찮다’고 해 혼자 갈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 귀소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말은 금방 모순이 드러난다.
신구대를 나온 장씨가 ‘신경대를 나왔다’거나 이미 졸업해 회사에 취업했는데 ‘학생’이라고 했을 리 만무하다. 더욱이 장씨는 신경대 기숙사가 아닌 정반대에 있는 회사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경찰은 ‘ㅅ업체 기숙사에 살고 있다’는 말을 ‘신경대 기숙사’로 착각해 장씨를 이곳으로 데리고 와서 내려주고 갔던 것이다.
장씨는 ㅂ카페에서 나와 기숙사가 있는 우림아파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필자가 인터넷 지도 검색을 통해 장씨의 동선 거리를 재보았다. 장씨가 쓰러져 있던 곳에서 기숙사(아파트)까지는 불과 500m에 불과하다. 장씨는 기숙사가 있는 아파트 바로 앞까지 걸어간 것이 된다.

그런데 순찰차는 기숙사와 정반대쪽인 4~5km나 되는 신경대 앞에 장씨를 내려놓았다. 당시 학교는 방학 중이었고 학교 앞은 공사장이었기 때문에 칠흙같았고,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결국 술 취한 장씨는 거리 감각을 잃고 헤매다가 공사장 물웅덩이에 빠져 사망했던 것이다.
만약 순찰차가 장씨를 기숙사에 제대로 데려다 줬거나 그것도 아니면 장씨 혼자 걸어가게 뒀더라면 지금까지도 살아있을 것이다. 장씨의 바지 주머니에는 휴대전화와 명함도 있었다. 경찰의 주취자 상대 매뉴얼에는 연락처를 확인해 보호자나 가족에게 연락하거나 인계해야 한다. 경찰은 이런 절차도 지키지 않았다.
결국 경찰이 장씨를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런데도 경찰은 “근무 수칙을 지켰고, 매뉴얼 대로 따랐다”며 책임을 회피하는 데에 급급했다. 이런 가운데 계속해서 말을 바꿨고, 해명에는 모순이 있었다.
심지어 ‘근무일지’와 파출소의 ‘범죄 신고 접수 처리표’는 조작된 정황까지 드러났다. 순찰차의 블랙박스도 마찬가지다. 경찰 순찰차에는 블랙박스가 장착돼 있다. 그런데 장씨를 태웠던 순찰차에는 블랙박스가 장착돼 있었으나 켜놓지 않았다며 존재를 부인했다.

고인과 유족에게 사과 한 마디 없었다.
유족은 필자의 기사를 토대로 청와대와 대검찰청, 국민권익위원회 등에 진정서와 탄원서를 제출했다. 그 후 권익위에서 조사를 실시했으나, 사실상 경찰에 면죄부를 줬다. 권익위는 “주취 상태인 고인에 대한 보호 조치를 미흡하게 처리했다”며 경찰관 두 명에게 시정 권고 조치를 내린 것이 전부다. 즉 ‘앞으로 조심하라’는 충고 정도에 그친 것이다.
결국 죽은 자와 유족들만 억울하게 됐다.
고인의 아버지는 “당시 경찰이 근무 수칙을 지키고, 회사 기숙사에 제대로 데려다 줬다면 내 아들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경찰이 없었다면 멀쩡하게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경찰은 당사자가 죽었다는 것을 악용해 상황을 꾸며대고 말을 바꿨다. 고인과 유족들을 두 번 죽인 것이다.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세상 살기가 싫어졌다”며 울분을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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