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여행가방’ 여성 살인사건
인천 부평구에 사는 전아무개씨(71)는 부평의 한 재래시장 상인이었다. 평생 시장에서 채소를 팔아 자식들을 키워냈고 생계를 이어왔다.
2014년 12월20일 오후 4시쯤 전씨는 같은 시장에서 장사하는 딸에게 “잔칫집에 다녀오겠다”며 시장을 나섰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틀이 지나도록 전씨가 귀가하지 않았다.
가족들에 따르면 전씨가 종종 집을 비웠지만 이틀 동안이나 집을 비운적은 없었다고 했다. 더구나 휴대전화 통화도 되지 않았고, 또 어떠한 연락도 없었다. 가족들은 예사롭지 않다며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이틀 후인 12월22일 오후 인천 삼산경찰서를 찾아가 가출 신고를 접수했다.
가족들은 애타게 전씨를 기다리면서도 불안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이런 와중에 비보가 날아들었다. 가출신고 한 지 얼마되지 않아 전씨는 인천 남동구 간석동의 한 빌라 주차장 담벼락 밑 여행용 가방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된 것이다.
전씨의 시신을 발견한 건 길을 지나가던 고등학생(17)이었다. 전씨의 주검은 처참한 모습이었다. 오른쪽 옆구리와 목 등 5군데에 흉기로 찔린 흔적이 있었고, 머리는 둔기로 맞아 일부 함몰된 상태였다. 누가 70대 노인을 이렇게 잔인하게 죽였을까.
경찰은 시신이 발견된 인근의 폐쇄회로(CC)TV 확보에 나섰고, 전씨가 마지막으로 시장을 나선 뒤 용의자와 함께 손을 잡고 걷는 장면을 포착했다. 또 용의자로 보이는 남성이 모자와 장갑을 착용하고 여행용 가방을 끌고 가는 모습과 시신을 유기한 뒤 장갑을 골목에 버리는 장면 등도 추가로 확보했다.
경찰은 CCTV 화면을 갖고 시장 상인들을 대상으로 탐문해보니 한 사람이 유력한 용의자로 부각됐다. 그가 바로 정형근(55)이었다. 경찰은 정씨의 거주지에서 피 묻은 바지 등을 확보했다. 그리고 국과수를 통해 DNA 검사를 한 결과 전 할머니의 것과 동일한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정씨를 전씨의 살인범으로 특정하고 그의 행적 추적에 나섰다. 용의자의 신상이 드러났기 때문에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경찰은 전씨가 시장을 나섰던 당일 정씨 집에서 살해된 것으로 추정했다. 전 할머니는 “잔칫집에 간다”고 했던 그날 정씨에게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그런데 수사가 꼬이기 시작한다. 정형근을 금방 검거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이를 눈치 챘는지 그는 이미 잠적한 뒤였다.

경찰이 정씨의 주거지를 덮쳤을 때는 인천을 벗어나 휴대전화를 껐다 켰다를 반복하다가 아예 꺼버렸다. 정씨 추적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수사는 벽에 부딪쳤다.
수사를 맡은 인천 남동경찰서는 공개수사로 전환하고 정씨의 신원과 인상착의를 공개했다. 경찰에 따르면 정씨는 키 165~170cm에 보통 체격이었다. 노란 지퍼가 달린 검정 점퍼, 등산 바지를 입고 검정 신발을 신은 것으로 추정됐다. 걸음걸이는 약간 저는 듯하다.
정씨의 본적은 전남 화순이지만 인천에서 오랫동안 살아왔다. 일용직 근로자로 목수 일을 주로 했지만 직업이 일정하지는 않았다. 주거도 마찬가지다. 정씨와 전 할머니는 평소 아는 사이였다.
정씨는 평소 피해자인 전씨에게 “엄마” “엄마”라고 불렀다고 한다. 같은 시장에서 주류를 판매하는 할머니의 딸과도 친분이 있었다. 정씨는 또 10차례 정도 절도 전과가 있었다.
경찰 관계자는 “용의자가 가끔 시장을 찾아 전씨와 함께 술을 마시고 가는 등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어온 것으로 확인됐다. 최근 두 사람이 다퉜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고, 채무관계나 돈 거래 여부는 확인된 게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경찰은 나중에 놀라운 사실을 하나를 발견한다. 정씨는 전씨가 사라진 다음 날 할머니의 딸과 한 교회 예배당에 나타났던 것이다. 이 날은 일요일로 주일 예배를 보러 갔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을 죽이고, 그것도 자신이 살해한 할머니의 딸과 교회에 가서 주일예배를 봤다니, 이런 인면수심이 또 있을까. 정씨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 다음날에도 시장에서 일하는 전씨 딸을 찾아갔다. 이것은 정형근이 피해자 가족의 상황을 살펴봤다는 정황이다.
정씨는 도대체 어디로 숨은 것일까. 경찰은 정형근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 정씨가 서울 을지로5가 훈련원공원 인근 편의점에서 자신의 체크카드로 막걸리와 소주를 산 것이 경찰 정보망에 걸렸다.
정씨의 금융거래 내역을 확인한 경찰은 곧바로 현장에 형사대를 급파했다. 정씨는 공원 인근에서 노숙자 2명과 술을 마시다 경찰에 체포된다. 사건 발생 9일 만이다. 당시 정씨의 소지품은 휴대전화, 지갑, 사용한 체크카드, 현금 200원 뿐이었다.
정씨는 곧바로 인천남동경찰서로 압송됐다.
그는 수배 전단에 나온 복장 그대로 노란 지퍼가 달린 검정 점퍼, 갈색 카고 바지를 입고 검정 신발을 신고 있었다. 정씨는 전 할머니를 살해한 동기를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잘 모르겠다. 기억이 안 난다”며 가방에 유기한 이유로는 “무서웠다”고 답했다.
경찰의 추궁이 시작됐다. 정씨는 “술을 마신 뒤 우발적으로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프로파일러가 투입되자 구체적인 범행 동기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정씨는 숨진 전씨와 술을 마시다 욕정이 생겨 성폭행을 시도했고, 전씨가 반항하자 물컵으로 머리와 얼굴 등을 수차례 때려 살해했다. 또 숨진 전씨를 여행용 가방에 담으려는 순간 살아 있는 것 같아 흉기로 목과 복부 등을 수차례 찔렀다.

정씨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위반(강간 등 살인)과 사체유기 혐의로 기소됐고, 1심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재판부는 “살인은 중대한 범죄로 강간으로 인한 살인은 죄질이 더욱 무겁다”며 “범행의 잔혹함을 봤을 때 피의자를 사회로부터 격리시켜 피해자 유가족들에게 반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정씨는 이에 불복했으나 2심에서도 원심을 인용했고, 대법원은 1‧2심 판결을 받아들여 무기징역을 확정했다.■
<저작권자 ⓒ정락인의 사건추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