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어긴 한화갑 의원
김대중 대통령 후보와 물류기자협의회 소속 기자단이 공동인터뷰를 진행한 뒤의 일이다.
한 번은 한화갑 의원실의 신현구 보좌관에게 전화가 왔다. 한 의원이 물류기자단과 점심을 함께 하자는 것이었고, 며칠 후 여의도의 한 식당에서 자리를 같이 했다.
한 의원도 물류기자단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해서인지 한 턱을 쏜 것이다. 얼마 후 신 보좌관한테 전화가 왔는데, 한 의원이 만나 차 한잔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199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의도 맨하탄호텔(현 렉싱턴 호텔) 1층 커피숍에서 한화갑 의원, 신현구 보좌관 그리고 내가 만났다.
한 의원은 내게 “정 기자, 원하는 게 있으면 하나만 얘기해 보라”고 했고, 나는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국회에서 ‘물류정책토론회’를 한 번 열어달라고 했다. 한 의원도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 했다. 사실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다.
내가 ‘물류정책토론회’를 제안한 것은 ‘물류대통령’으로 불린 DJ가 집권 후 물류정책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를 업계와 전문가 등이 모여 깊이 토론해 보자는 의도였다.
그해 12월18일 DJ는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나는 국회 건설교통위 소속 여야 의원들을 초청한 가운데 국회에서 ‘물류정책토론회’를 열 때라고 생각했다. 한 의원실의 신 보좌관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뜻을 전달했다.
그는 “의원실로 직접 와서 의원님께 말해보라”고 했고, 며칠 후 나는 국회의원회관으로 한 의원을 찾아갔다.
의원회관에 들어서자 기이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한화갑 의원실이 있는 층의 복도에 들어서자 웬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뭔일이야”하고 의원실에 들어가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바로 한 의원을 만나거나 인사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리틀 DJ’로 불렸던 한화갑 의원이 아니었던가. 당시만 해도 이런 한 의원에게 ‘눈도장’을 찍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지어 의원회관으로 몰려왔던 것이다. 나는 그 사람들을 뒤로 하고 의원실로 들어갔다.
얼마 후 한 의원이 방에 들어왔고, 나는 “의원님, 지난 번에 약속하신 ‘물류정책토론회’ 건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찾아왔다”고 말했더니, 한 의원의 태도가 싹 바뀌었다.그는 지금 상황이 달라졌다며 말끗을 흐렸다.
나는 “왜 약속이 틀립니까, 지금까지 의원님의 모습이 정권을 잡기 위한 쇼였습니까?”라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한 의원 왈 “이제 우리가 정권을 잡았으니, 말 한 마디 한 마디 조심해야 한다. 그런 차원이니 이해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는 훽하고 돌아섰다. 나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정치인의 신의가 앞과 뒤가 다르다는 것을 눈 앞에서 실감했다.
하루아침에 돌변하는 그 모습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는 복도 저편으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 마디 던졌다. “당신도 역시 (모리배가 득실거리는 정치판의) 똑같은 사람이군요.”

그 뒤 한 의원과는 한 번도 개인적인 만남을 가진 적이 없다. 신현구 보좌관과는 지금도 개인적인 친분을 이어가며 오랫동안 세상사를 나눠왔다.
신 보좌관은 김대중 정부에서는 국회 정책연구위원을 지냈다. 16대 총선에서 민주당 광주 서구 을에서 출마를 준비했고, 경쟁후보와 1.2차 경선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 끝에 근소한 차이로 쓴잔을 마셨다. 제도권 정치인으로의 변신에 실패한 것이다.
그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5.31 지방선거에서는 기초단체장으로 눈높이를 낮췄다. 광주 서구청장 선거에 나서면서 정치인이 아닌 행정가로의 진입을 시도한 것. 그는 일찍부터 민주당 예비후보로 낙점되면서 큰 이변이 없는 한 당선은 따놓은 듯했다. 오랫동안 지역구를 누비면서 기반을 탄탄히 다졌고, 한화갑 대표의 최측근 출신이니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민주당에서 ‘토사구팽’을 당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선거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서 ‘전략공천’이라는 미명아래 민주당 공천에서 밀려난 것이다. 민주당 깃발만 꽂으면 당선이 가능한 지역이어서 ‘전략공천’이 합리화 될 수 없었다.
더욱이 공천 하루 전 까지 민주당이나 한화갑 대표가 신씨에게 거짓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인간적인 배신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는 무소속 출마를 강행했지만 ‘인물’보다 ‘간판’을 중시하는 지역풍토에서 당선은 어려웠다. 그 뒤에도 광주에서 여러 번 국회의원, 기초단체장 등에 도전했으나 번번히 쓴잔을 마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