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화제

절벽에 관을 매달아 놓은 ‘절벽 공동묘지’


중국 남서부의 깊은 골짜기와 험준한 산악 지대에는 오랫동안 독자적인 삶을 지켜온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보족’이라 불렀다. 주변의 큰 세력들이 끊임없이 땅을 넓히며 압박해 올 때도, 이들은 고유의 옷과 언어를 유지하며 산세에 기대어 살았다.

하지만 이들은 강인한 자립 정신 때문에 중앙 정부와 자주 부딪쳤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강렬하게 장식했던 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들이 세상에 남긴 것은 깎아지른 절벽에 위태롭게 걸려 있는 수많은 나무상자뿐이다.

산들의 왕, 거대한 제국에 맞서다

보족은 지금의 쓰촨성과 윈난성이 만나는 국경 지대를 무대로 활동했다. 이들은 험한 바위산과 깊은 계곡을 자유롭게 오가는 사냥과 농사에 능한 민족이었다. 한곳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를 사랑하는 성향은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중원에 자리 잡은 거대 왕조들은 이들을 완전히 지배하기를 원했다. 세금을 걷고 관리를 보내 통제하려 했다. 하지만 보족은 이를 거부했다.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져진 강인한 체력과 독특한 무술 실력은 이들이 오랜 세월 동안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갈등이 폭발한 것은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 중국을 지배한 명나라 시기였다. 당시 조정은 소수민족을 억누르기 위해 지나치게 무거운 세금을 매겼다. 군대를 동원해 이들의 생활 터전을 빼앗는 일도 잦았다. 생존의 위협을 느낀 보족은 무기를 들었다. 이들은 가파른 산세를 방패 삼아 제국의 군대와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전쟁은 수십 년 동안 이어졌다. 계속되는 저항에 화가 난 명나라 황제는 마침내 대규모 토벌대를 조직했다. 기록에 따르면 1573년, 대군이 보족의 마을을 향해 밀고 들어왔다. 군대는 이들의 씨를 말리겠다는 생각으로 마을을 불태웠다. 가옥과 가축은 물론이고 이들이 먹을 식량까지 모두 없애는 방식이었다.

벼랑 끝에 몰린 보족은 마지막 거점인 구등산으로 향했다. 구등산은 사방이 칼로 잘라낸 듯한 절벽으로 이루어진 천연의 요새였다. 이들은 절벽 위에서 돌을 굴리고 화살을 쏘며 저항했다. 정규 군대도 험난한 지형 앞에서는 쉽게 힘을 쓰지 못했다. 싸움은 오랜 시간 이어졌고, 양측 모두 지쳐갔다.

명나라 군대는 정면 돌파 대신 밤을 틈탄 기습 공격을 선택했다. 소수의 특공대가 밧줄을 타고 절벽을 기어올랐다. 이들은 방심하고 있던 보족의 방어선을 뚫었고, 곧이어 대군이 절벽 위로 쏟아져 들어왔다.

하지만 고지를 점령한 군대 앞에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끝까지 저항하던 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절벽 위는 텅 비어 있었고, 주변 마을에 살던 다른 보족 주민들까지 동시에 자취를 감추었다. 수만 명에 달하던 민족 전체가 한순간에 증발했던 것이다.

현대의 역사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은 이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오랫동안 조사했다. 사실 이들이 마법처럼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당시의 비극적인 상황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우선 대다수의 사람들은 마지막 전투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다. 절벽 위에서 포위당한 이들은 항복 대신 아래로 뛰어내리는 길을 택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군대의 추격을 피해 더 깊은 밀림과 험한 산속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생존 방식이다. 제국의 군대는 보족의 핏줄을 이어받은 사람을 찾아내면 무조건 없애려 했다. 살기 위해 도망친 이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성씨를 버렸다. 주변에 살던 다른 소수민족인 이족이나 묘족의 옷을 입고 그들의 무리에 섞여 들어갔다. 일부는 다수 민족인 한족의 성씨로 바꾸어 신분을 숨겼다.

결국 민족의 이름과 문화, 언어를 완전히 지워버림으로써 목숨을 건진 것이다. 한 민족을 구성하는 정체성이 파괴되면서, 역사 기록에서는 이들이 단숨에 사라진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최근 유전자 분석 기술이 발달하면서 이 지역 일부 주민들의 피에 보족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하늘에 매달린 수수께끼, 현관장

보족은 사라졌지만 이들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여전히 남아 있다. 바로 절벽에 관을 매다는 ‘현관장'(懸棺葬) 문화다. 이들은 커다란 통나무의 속을 파내어 관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지상에서 수십 미터 높이의 벼랑에 고정했다.

현재 쓰촨성 궁현 일대의 절벽을 보면, 낮게는 10미터(m)에서 높게는 130미터(m)에 이르는 아찔한 높이에 수많은 나무상자가 걸려 있다. 바위틈에 나무 막대를 박아 지지대를 만들고 그 위에 관을 얹거나, 자연적으로 튀어나온 바위 돌출부에 얹는 방식을 사용했다.
무게가 수백 킬로그램(kg)에 달하는 통나무 관을 장비도 없던 시절에 어떻게 그 높은 곳까지 올렸는지는 아직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절벽 위에서 밧줄로 내려 보냈거나, 물이 불어났을 때 배를 이용했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학자들은 보족의 독특한 현관장 풍습을 두고 다양한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런 배경에는 이들의 뚜렷한 사후 세계관과 생존 전략이 자리 잡고 있다. 고고학계와 인류학계가 주목하는 핵심 원인은 크게 세 가지 갈래로 나뉜다.

가장 먼저 꼽히는 원인은 현실적인 생존과 보호의 목적이다. 보족은 거대 왕조와의 끊임없는 전쟁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 땅에 무덤을 만들 경우 맹수가 시신을 파헤치거나, 전쟁에서 승리한 적군이 무덤을 파헤쳐 훼손할 위험이 상존했다. 따라서 인간의 발길이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깎아지른 절벽이야말로 망자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최적의 천연 요새였던 셈이다.

종교적인 신앙심에서 비롯되었다는 해석도 설득력을 얻는다. 이들은 하늘을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공간이자 영혼의 안식처로 여겼다. 조상의 시신을 지상에서 최대한 높은 곳에 모실수록 하늘나라와 더 가까워진다고 믿은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절벽에 걸린 통나무 관은 망자가 천국으로 걸어 올라가기 위해 딛는 일종의 계단이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후손들의 번영을 기원하는 효심의 발로로 보는 시각도 있다.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조상이 아래를 넓게 내려다볼수록, 지상에 남은 후손들의 삶을 더 세심하게 살피고 큰 복을 내려줄 수 있다는 믿음이다. 조상을 높은 곳에 모시는 행위 자체가 후손들이 바치는 최고의 예우이자 가문의 안녕을 결속하는 수단이었다는 분석이다.

바위벽에 흐르는 침묵

명나라 군대는 보족의 기운을 꺾기 위해 절벽에 매달린 관들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이들은 지지대를 부수어 관을 땅으로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무덤을 파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험한 곳에 위치한 관들은 손을 대지 못해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비바람 속에서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낸 나무 관들은 이제 거뭇하게 변한 채 침묵을 지키고 있다.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기 위해 거대한 세력에 온몸으로 맞섰던 사람들, 그리고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의 이름마저 지워야 했던 사람들의 슬픈 이야기가 그 높은 바위벽에 고스란히 묶여 있다.


골짜기를 따라 부는 바람 소리는 어쩌면 이름을 잃어버린 그들이 세상에 남기고 싶었던 마지막 노래일지 모른다. 흔들리는 나무 관들은 여전히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인간의 영광과 상처가 얼마나 부질없이 흘러가는지를 묵묵히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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