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직 걸고 “생존권 지켜주겠다” 주민들과 약속
1999년 3월30일 나는 충남 연기군 동면 명학리(현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명학리) 마을로 현지취재를 갔다.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청주가는 고속버스를 타고가면서 취재할 내용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수첩 메모를 살펴보고 현장에서 펼쳐 볼 지도 한 장도 챙겼다.
약 1시간30분 정도 지나자 버스는 어느 새 청주고속터미널에 도착했다. 충북도청과 충북개발연구원 관계자 두 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충청북도는 중부권 물류기지 유치를 도민숙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나는 이들과 함께 명학리로 갔다.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주민 대표와 마을주민 몇 분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명학리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로 내 고향 같은 느낌이었다. 나를 본 주민들은 “지금까지 몇 년 동안 주민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찾아온 기자는 처음”이라며 안내를 자청했다.
나는 가방에서 미리 준비해 간 지도를 꺼내서 펼치려고 했다. 그랬더니 충북도 관계자가 “그럴 필요없다. 초등학생 눈으로 봐도 확인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꺼낸 지도를 가방에 넣고는 취재수첩과 펜을 들었다.
주민들의 안내로 물류기지가 들어설 입지를 차근차근 돌아봤다.
보면 볼수록 기가 막혔다.
정말 초등학생 눈으로도 세 곳의 입지후보지 중 1위로 평가된 ‘명학지구’는 최악이었다. 세상에 이런 곳을 최적의 입지로 평가하다니, 또 충남도나 자민련, 지역구 국회의원, 언론은 왜 침묵하고 있는지 물음표가 떠나질 않았다.
명학리 마을은 황폐했다. 1995년 물류기지 입지로 지정된 후 4년 동안 객토나 건축 증개축 등을 하지 못했던 탓이다.마을이 곧 없어질 위기에 있는데 새로 건축하고 보수하고, 또 땅을 기름지게 할 사람은 없었다. 주민 대표는 나를 안내하면서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주민들은 생계를 포기하다시피 하며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싸워왔다. 주민들은 비상대책위원회(위원장 임헌민)를 구성했고, 여기에는 명학리 상주인구 4천700여명 중 2천438명이 참여했다.
주민대책위는 감사원장에게 탄원서를 제출하고, 용역을 맡은 교통개발연구원(현 한국교통연구원)이 주민여론을 무시한 채 공정성이 위배된 용역을 진행했다며 감사원에 감사를 요청했다. 1998년 9월에는 건교부장관과 농림부장관에게 물류기지 건설에 대한 부당성을 탄원했으나 소용없었다.
사정이 이런데도 지역구 국회의원도, 지역 언론도 주민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주민들을 이간질하고 몰아세우는 등의 비상식적인 행태를 보였다. 주민들은 마을을 지키기 위해 절박한 심정이었고, 누구도 주민편이 되지 않아 막막한 상황이었다.
물류기지 입지를 돌아보고 나자 주민들은 나를 마을회관으로 떠밀다시피 데리고 갔다. 그곳에는 마을 어르신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제발 조상 대대로 살아온 우리 마을을 지켜달라”고 절규했다.

당시 나는 유력 언론사 기자가 아니었다. 신생지, 그것도 이제 갓 창간한 이름없는 전문지 기자였다. 내가 소속했던 매체를 제대로 알지 못했을 주민들이었다. 그런데 얼마나 절박했으면 이들은 내게 “마을을 지켜달라”고 애원했다.
나는 한참동안 주민들의 말을 듣고는 그들 앞에 서서 한 가지 약속했다.
“제 기자직을 걸고 여러분들의 생존권을 반드시 지켜드리겠습니다. 만약 이 엉터리 같은 정책이 바뀌지 않는다면 저도 기자생활을 그만 두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기자생활을 시작한지 3년 밖에 안 된 기자, 그것도 이름 없는 전문지 기자가 국책건설사업을 바꾸고 마을주민들의 생존권을 지켜주겠다고 했으니, 당시만 해도 너무 무모한 약속이었다.
“기자직까지 걸 필요가 있었느냐”며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이게 ‘정의’라고 생각했다. 정말 이 엉터리 같은 국책건설사업이 바뀌지 않으면 기자직도 그만 둘 각오였다. 나는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 정신으로 싸우겠다고 결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