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때문에 아내 시신 짊어지고 12km 걸어간 남편
인도 오디샤주 칼라한디 지역의 깊은 시골 마을에는 다나 마즈히라는 이름의 40대 남성이 살고 있었다. 원주민 부족 출신인 그의 삶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에도 벅찬 나날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진짜 불행은 가난이 아닌, 아내 아망 데이(42)의 몸속에서 조용히 자라고 있었다. 아내는 당시 치명적인 감염병이었던 폐결핵을 앓고 있었고, 제대로 된 약 한 번 먹지 못한 채 병세는 날로 악화했다. 기침 소리는 갈수록 깊어졌고, 제대로 먹지 못해 몸은 뼈만 남을 정도로 말라갔다.
2016년 8월23일, 마즈히는 결단을 내렸다. 집에서 무려 60km나 떨어진 바와니파트나 지역의 종합병원으로 아내를 데려갔다. 교통수단이 마땅치 않은 시골에서 병원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하지만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은 오래가지 않았다. 입원한 그날 밤, 아내는 거친 숨을 몰아쉬다 결국 세상을 떠났다.
마즈히에게는 슬퍼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았다. 병원 관계자들은 시신을 빨리 다른 곳으로 옮기라며 그를 재촉했다. 병상에 다른 환자를 받아야 한다는 이유였다.

돈이 없으면 시신도 걸어야 하는가
가난한 농부였던 마즈히의 주머니에는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사설 구급차를 빌리려면 거액의 비용이 필요했지만, 그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마즈히는 병원 관계자들을 찾아다니며 머리를 숙였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무료 구급차나 병원 차를 한 대만 내어달라고 눈물로 애원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차가운 거절뿐이었다. 규정상 지원이 어렵다거나, 지금 이용할 수 있는 차량이 없다는 핑계가 이어졌다.
마즈히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시골 마을의 전통대로 아내의 장례를 치르려면 하루라도 빨리 고향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는 병원 침대에 있던 담요로 아내의 시신을 꽁꽁 싸맸다. 그리고 단단히 묶은 시신을 자신의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엄마의 죽음을 목격한 12살 큰딸 차울라는 아버지가 짊어진 엄마의 발을 바라보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마즈히는 아내의 시신을 메고, 딸은 엄마의 마지막 모습을 뒤따르며 병원 문을 나섰다.

두 사람이 맨발에 가까운 차림으로 아스팔트 도로를 걷기 시작했을 때, 주변 사람들은 그저 짐을 옮기는 행인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담요 사이로 삐져나온 사람의 발을 본 이들은 이내 충격에 빠졌다. 볏짚처럼 어깨에 얹힌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의 시체였기 때문이다. 딸 차울라는 아버지가 지칠 때마다 엄마의 몸이 바닥에 닿지 않도록 뒤에서 붙잡으며 울부짖었다. 이들은 그렇게 뙤약볕 아래를 걷고 또 걸었다.
부녀의 눈물겨운 행보는 약 12km를 걸었을 때쯤 멈출 수 있었다. 도로를 지나던 지역 언론사 기자가 이 믿기 힘든 광경을 목격하고 차를 세운 덕분이었다. 기자는 즉시 카메라를 들어 이 상황을 기록했고, 동시에 지역 행정 기관에 연락해 거세게 항의했다.
언론의 연락을 받고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공무원들이 움직이면서, 그제야 구급차 한 대가 도로변에 도착했다. 마즈히는 사건이 발생한 지 하루가 꼬박 지나서야 고향 마을에 도착해 아내의 화장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 지역 정부는 화장 비용으로 2000루피(약 3만 원)를 긴급 지원했고, 적십자사에서도 1만 루피(약 16만 원)를 전달했다.
이 사건이 언론을 통해 전 세계로 타전되자 인도의 여론은 들끓었다. 비난의 화살은 병원으로 향했다. 파장이 커지자 병원 측은 황급히 해명을 내놓았다. 마즈히가 정식 퇴원 절차를 밟지 않고 새벽에 시신을 몰래 들고 나갔으며, 구급차가 출발하기 전에 본인이 먼저 가버렸다는 주장이었다. 자신들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책임 회피였다.
그러나 이후 이루어진 행정 조사는 달랐다. 당시 오디샤주 정부는 가난한 이들이 사망했을 때 무료로 시신을 운송해 주는 사후 차량 지원 제도를 시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병원 직원 중 누구도 문맹이었던 마즈히에게 이 제도를 안내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신을 빨리 치우라는 눈치와 압박만을 주었음이 확인되었다. 돈이 없는 취약 계층이 행정 시스템의 사각지대에서 어떻게 방치되는지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전 세계를 울린 눈물, 삶을 바꾸는 씨앗이 되다
비극으로 끝날 것 같았던 마즈히 가족의 이야기는 방송 이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전 세계에서 이들 부녀를 돕겠다는 후원 문의가 빗발쳤다. 가장 먼저 움직인 곳은 중동의 섬나라 바레인이었다.
바레인의 국왕은 마즈히의 사연을 듣고 깊은 슬픔을 느껴 개인 자금으로 약 90만 루피(약 1500만원)를 기부했다. 당시 인도 시골 빈민층의 하루 평균 임금이 약 150~200루피(약 2500~3300원) 내외였던 것을 감안하면, 일요일도 없이 꼬박 12년에서 15년 동안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야야 하는 거액이었다. 여기에 인도 적십자사와 지방 정부의 보조금, 일반 시민들의 성금이 추가로 답지했다.
인도의 대형 교육기관인 칼링가 사회과학연구원(KISS)도 움직였다. 연구원 측은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하던 마즈히의 세 자매에게 대학 졸업 때까지 모든 학비와 기숙사비용을 전액 무상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로써 세 자매는 기숙사가 있는 도심의 현대식 학교에 입학하여 무상으로 글을 배우고 공부를 시작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 대물림될 뻔한 가난의 고리를 끊을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마즈히 본인의 삶도 변했다. 그는 전 세계에서 모인 후원금을 정기예금에 넣어두고, 은행에서 나오는 이자만으로 생활하는 법을 배웠다. 늘 굶주림에 시달리던 그는 고향 마을에 벽돌로 된 튼튼한 새집을 지었고, 얼마 후 새로운 가정을 꾸려 재혼했다. 자전거조차 없던 그가 자가용 자동차를 구입했다는 소식은 지역 사회에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세상을 떠난 아내를 어깨에 매야 했던 한 남자의 이야기는 비극적인 동화처럼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 듯 보인다. 마즈히는 이제 가난에서 벗어났고, 그의 딸들은 어두운 시골 구석이 아닌 현대식 학교에서 펜을 쥐고 미래를 그린다.
그러나 매년 아내의 기일이 돌아올 때마다 마즈히는 여전히 마을 어귀의 화장터를 바라본다. 세상의 온정이 그들의 가난을 구제해 주었을지언정, 12살 딸 아이가 울며 걸었던 그 뜨거운 12km의 아스팔트 길과 담요 틈새로 삐져나왔던 아내의 차가운 발은 그 어떤 달러나 루피로도 지울 수 없는 흉터로 남아 있다.
가난의 무게를 고스란히 짊어졌던 한 가장의 어깨는 가벼워졌지만,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인도 사회의 가장 어두운 단면을 소리 없이 고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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