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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관덕정 여성 살인사건


제주시 삼도2동에는 조선시대 제주 목 관아였던 ‘관덕정’이 있다.

1997년 8월14일 오전 8시쯤, 관덕정 인근에서 피투성이가 된 여성이 행인에 의해 발견된다.

그녀는 인근에서 단란주점을 운영하는 현아무개씨(여·50)였다. 피해자는 현씨 한 명이 아니었다. 그녀가 발견된 곳에서 5m 떨어진 법원 청사 철거공사 현장에 또 다른 여성의 알몸 시신이 있었다.

현씨의 단란주점 종업원인 고아무개씨(여·32)였다. 시신의 상태는 참혹했다. 얼굴과 머리, 목덜미 등에 심한 폭행 흔적이 있었다. 범인은 또 유두를 도려내고 음부를 훼손하는 등 엽기적인 행동까지 했다.

현씨에 따르면 두 사람은 새벽 3시쯤 일을 끝내고 함께 귀가하던 길이었다. 그때 한 괴한에게 동시에 공격을 당했다. 괴한은 돌멩이로 마구 내리 찍었고, 현씨는 피투성이가 돼 그 자리에 쓰러졌다.

괴한은 고씨를 끌고 공사현장으로 가서 살해했다. 현씨는 목숨은 건졌으나 한쪽 눈이 실명되는 치명상을 입었다. 현씨의 집은 도로변에서 골목길로 100m 정도를 걸어가야 했는데, 그 사이에서 범행이 일어난 것이다.

제주 경찰은 관내 파출소에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본격 수사에 돌입했다. 신고보상금 200만원을 내걸고, 제보 전단지를 다량 배포했다. 범행수법으로 볼 때 원한관계나 치정, 금품을 노린 강도일 가능성에 초점을 맞췄다.


특히 두 사람을 함께 공격한 것과 단란주점을 운영하고 있던 현씨가 현금을 많이 갖고 다녔기 때문에 강도에 무게를 뒀다. 사체가 엽기적으로 훼손된 점을 감안, 정신병자나 변태성욕자의 소행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경찰은 피해자들의 주변 인물들을 상대로 탐문에 들어갔다. 살해당한 고씨는 돌아가신 부모를 대신해 가장 역할을 했다.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 생계형으로 유흥업소에 나가 돈을 벌었고, 원한을 살 만한 일도 없었다.

경찰은 사건 전 피해자들의 통화내역을 분석하고 단란주점 손님 등을 상대로 다각적인 수사를 벌였다. 하지만 용의자가 좁혀지기 보다는 점점 미궁에 빠지기 시작했다. 용의자를 특정할 만한 단서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범인은 누구일까.

경찰이 답답함을 토로할 때 가뭄에 단비 같은 전화가 걸려온다.

사건 발생 23일째인 9월6일 새벽, 사건을 전담하고 있던 중앙사수본부 전화벨이 울렸다. 새벽에 걸려온 심상찮은 전화. “감사합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때 상대편은 경찰을 조롱하듯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뛰어다닌다면 나는 날아다닌다. 내가 범인이다.”

경찰은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 장난전화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데 상대방은 한 번에 그친 것이 아니라 같은 전화를 다섯 번에 걸쳐 걸어왔다. 경찰이 전화 발신지를 추적했더니 공중전화였다. 자신을 범인이라고 한 용의자는 제주 시내를 옮겨다니며 각기 다른 장소의 공중전화를 이용했다.


그는 수사본부 앞 비디오방을 시작으로 삼도2동 동사무소 입구, 남문로터리, 보성시장 입구, 제주시청 민원실 앞에서 공중전화를 이용했다. 대담하게도 수사본부에서 제주시청까지 걸어가면서 공중전화가 보일 때마다 5~15분 단위로 전화를 걸어 경찰을 농락했던 것이다.

경찰은 전화 발신지를 추적해 삼도2동 동사무소 입구 공중전화에서 용의자 지문을 채취했다. 국과수 감정 결과 김아무개씨(28)로 특정됐다. 경찰은 김씨를 탑동의 한 술집에서 검거해 수사본부로 압송했다.

김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가 관덕정 사건 발생 전후인 8월3일과 9월23일에 관덕정 인근에서 강간미수와 특수강도를 저지른 사실을 추가로 밝혀냈다. 피해자의 머리를 둔기로 내리친 뒤에 범행을 저질렀는데 이런 수법도 매우 흡사했다.

김씨는 관덕정 사건을 자신이 저질렀다고 순순히 자백했다. 그가 밝힌 범행동기는 이러했다. 범행시간대 관덕정 인근을 지나가던 김씨는 두 여자가 서로 다투는 걸 보고 돈을 훔치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단란주점 주인인 현씨를 돌로 내리친 뒤에 핸드백을 들고 달아났다.

이때 옆에 있던 고씨가 자신을 쫓아와서 핸드백을 돌려달라고 했고, 김씨는 그녀를 인근 공사장으로 끌고 가서 살해했다는 것이다. 현씨에게는 현금 40만원 정도와 휴대전화를, 고씨에게서는 무선호출기(삐삐)를 빼앗았다고 진술했다.


김씨는 고씨를 살해한 뒤 신체를 엽기적으로 훼손한 이유에 대해 “교도소에서 출소한 지난 94년 이후 3년 동안 사귀어온 여인으로부터 배신을 당해 여성에 대한 복수심이 발동, 이빨로 물어뜯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김씨의 진술이 사건의 상황과 부합하는 것으로 판단했고, 현장검증까지 이뤄졌다.

김씨는 범행장면을 태연하게 재연했고, 빼앗은 핸드백을 소각한 장소까지 정확하게 지목했다. 경찰은 김씨를 강도 살인혐의 등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검찰도 같은 혐의로 기소했다. 사건은 이렇게 김씨의 범행으로 해결되는 듯 했다.

그러나 예상하지 않았던 상황이 발생한다. 수사기관에서 범행을 시인했던 김씨가 재판과정에서 말을 바꿨다. 자신은 범인이 아니라며 이전의 자백을 부인했다.

재판부가 수사기관에서 자백한 이유를 묻자 “사건 이전에 폭행을 당해 경찰서를 찾았으나 전과자라는 이유로 믿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앙심을 품고 공중전화로 전화해 내가 범인이라고 말했다. 자백 내용은 TV와 신문에서 본 걸로 대충 진술한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특수강도와 강간미수 혐의도 부인했으나 피해 여성들이 법정에 출두해 증언함으로써 피해갈 수 없었다. 재판부는 김씨의 살인혐의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로 보고 8년형을 선고했다. 그가 무죄를 받은 이유는 김씨의 자백 외에는 확실한 물적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범행에 사용한 혈흔이 묻은 둔기(돌멩이)를 찾지 못했다. 또 현장에서 발견된 용의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담배꽁초에서 나온 혈액형은 A형이었으나 김씨는 O형으로 나왔다. 더욱이 사건현장과 50m가량 떨어진 곳에서 옷과 핸드백 등을 범인이 모두 태워버려 증거가 될 만한 것도 없었다.

여기에 목격자까지 없는 상황에서 범인으로 단정하기에는 증거가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사건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범인을 검거해 사건을 해결했다고 판단한 경찰은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김씨는 8년을 복역한 뒤 2005년 출소했다.

그 후 사건발생 15년이 지난 2012년 4월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이 사건을 다뤘다. 당시 제작진은 범행시간대에 용의자로 보이는 남성을 택시에 태운 택시기사를 찾아냈다.

택시기사의 진술에 따르면 50대로 보이는 남자가 그날 새벽, 관덕정 앞에서 택시를 탔다. 남자는 흰 반팔 티셔츠에 피가 묻은 옷을 입고 있어 술을 마시고 싸웠을 것으로 생각했다. 첫인상이 순해보였고, 나쁘지 않았으며 택시에서 별 말이 없었다.

술은 마시지 않은 것 같았다. 어디까지 가냐고 묻자 ‘대학동’이라고 짧게 말했다. ‘대학동’은 이 지역 주민들만 부르는 동네이름이었다. 그렇기에 경찰은 그가 외지 사람이 아닌 것으로 판단했다. 남자는 옅은 쌍꺼풀, 이마에 굵은 주름이 있었으며 귀가 덮일 정도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


공소시효를 불과 4개월이 남은 시점, 범인을 잡아 처벌할 수 있는 마지막 불씨였다. 경찰은 택시기사의 진술을 토대로 몽타주를 작성했으나, 이마저도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이 사건의 공소시효는 2012년 8월14일 만료돼 영구미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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