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온천동 커피숍 여주인 피살사건
부산 동래구 온천동에는 ‘크리스탈 커피숍’이 있었다. 낮에는 주로 커피를 판매하고 밤에는 술도 팔았다.
2001년 3월 12일 오전 9시쯤 종업원 김아무개씨(여)는 평소와 다름없이 커피숍에 출근했다. 그런데 출입문을 열자마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홀에 화분이 쓰러져 있고, 기둥과 카펫 등에는 시뻘건 피가 묻어 있었다. 바닥에는 여주인 이아무개씨(51)의 옷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김씨는 밤사이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녀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조심스럽게 커피숍 안쪽으로 들어섰다. 화장실과 연결된 내실 쪽으로 걸어가 잠겨 있던 문을 살며시 열었다. 순간 김씨는 기겁했다. 충격적인 현장이 목격됐기 때문이다. 여주인 이씨가 온 몸이 피로 범벅 된 채 참혹한 형태로 숨져있었던 것이다. 아랫도리는 발가벗겨진 상태였다.
김씨는 가까스로 112에 신고했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도 시신의 참혹한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경찰은 곧바로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수사진을 꾸렸다. 우선 피해자의 정확한 사망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시신 부검을 의뢰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숨진 이씨는 무려 54군데나 흉기에 난자당했고, 사용된 흉기는 3개인 것으로 드러났다.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칼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적어 범인은 적어도 2명 이상으로 추정됐다. 사건 현장에서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단서도 확보했다.
커피숍에 있는 쌀 포대에 피 묻은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경찰이 신발 브랜드를 확인한 결과 ‘여성용 랜드로버 구두’였다. 이로써 범인은 최소 2명 이상이며, 이중 한 명은 여성이라는 설명이 가능했다.
커피숍의 몇 개 테이블에서는 전 날 누군가가 술을 마신 흔적이 남아 있었다. 경찰은 테이블에 남겨진 유리잔에서 지문도 채취했다.
피 묻은 신발 자국과 유리잔에 남겨진 지문 등을 확보한 경찰. 이제 커피숍에 누가 출입 했고, 또 마지막 손님이 누군지만 알면 사건은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범인은 십중팔구 ‘마지막 손님’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경찰은 용의자를 특정하기 위해 사건 현장과 주변의 폐쇄회로(CC)TV를 확인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커피숍과 주변에는 CCTV가 설치돼 있지 않아 범인들의 모습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 경찰은 인근을 탐문해 목격자를 찾았으나 사건 당시 상황을 목격한 사람도 없었다. 이렇게 해서 금방 손에 잡힐 듯 했던 범인의 윤곽은 점점 멀어져 갔다.

경찰은 ‘마지막 손님’을 찾는데 수사력을 집중했다. 크리스탈 커피숍은 여주인을 포함해 2명이 일하고 있었다. 한 명은 살해됐기 때문에 마지막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것은 종업원 한 명 뿐이었다. 문제는 여종업의 기억도 희미했기 때문에, 당시 상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경찰은 ‘최면술’을 동원해 여종업원의 희미한 기억을 복원시키기로 했다.
경찰서로 법 최면 전문가를 불러 여종업원 김씨에게 최면을 걸게 했다. 법 최면 전문가 앞에 선 김씨. 그는 최면 전문가의 유도에 따라 서서히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퇴근하던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고, 희미했던 기억이 선명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김씨는 경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테이블에 남아 있던 손님들을 기억해 냈다.
경찰 수사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들이 여주인의 죽음과 관련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경찰은 여종업원이 기억해 낸 손님들을 경찰서로 불러 조사를 벌였다. 커피숍에 들어온 시간과 나간 시간 등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하지만 이들에게서 별다른 용의점이 발견되지 않았다. 사건 당일 밤 커피숍에서 술을 마신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 말고도 손님이 또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수사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경찰은 사건과 관련한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작은 실마리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에서 떠도는 소문도 가볍게 흘려보낼 수 없었다. 그러다 경찰의 정보망에 사건과 관련한 소문이 포착됐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이기는 했으나 내용은 상당히 구체적이었다.
숨진 이씨가 커피숍 운영 외에 대부업에 손을 대며 주변 사람들을 상대로 사채놀이를 했었다는 것이다. 채무자 중 한 명이 사채 빚을 갚지 않기 위해 조폭들을 동원해 이씨를 살해했다는 것이 골자였다. 소문은 이 사건이 ‘청부살인’이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심정이었던 경찰. 즉시 용의선상에 올라 있던 조폭들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일일이 사건 당일 알리바이를 캐물었다. 의심스런 조폭들에 대해서는 압수수색까지 벌였으나 허탕만 치고 말았다. 경찰의 한숨은 깊어지기 시작했다. 보일 듯 말 듯 보이지 않는 용의자.
경찰은 사건 현장인 커피숍에 주목했다. 혹시 미처 발견하거나 챙기지 못한 증거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커피숍을 이 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피해자가 머물던 내실 장판 밑까지 뒤졌다. 역시 현장에서 새로운 단서가 나왔다.
사건 이후 경찰은 손님이 있던 테이블에 집중하면서 빈 테이블은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았다. 그런데 사건 당시 손님이 없던 테이블 아래에서 양주병 뚜껑 하나가 발견됐는데, 코냑의 일종인 ‘헤네시’였다.
경찰은 인근 양주전문점을 탐문해서 이씨가 며칠 전 구입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경찰은 범인들이 범행을 은닉하기 위해 자신들이 앉았던 테이블을 정리했다고 봤다. 병뚜껑이 아래로 떨어지면서 미처 치우지 못한 것이다. 몇 명이 앉아서 헤네시를 마신 것인 지는 파악되지 않았다.
또 다른 단서는 내실에서 발견됐다. 이곳 장판을 들췄더니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고 받은 ‘차용증’ 8장이 나왔다. 소문이 뜬소문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로써 이씨가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사채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경찰은 이씨의 죽음이 ‘돈’과 얽혀 있다고 판단했다. 이씨를 잔혹하게 살해한 이유는 차용증을 빼앗아 없애기 위해 고문한 과정에서 벌어진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씨에게 돈을 빌린 주변인들과 이들의 채무관계, 돈의 액수 등을 파악하면 범인에 대한 실마리가 나올 수도 있었다. 차용증이 나오면서 8명의 신상도 파악할 수 있게 됐다. 경찰은 이들을 한 명씩 차례대로 불러 조사했다. 하지만 8명 모두 당일 행적에 의심할 만한 것이 없었다. 알리바이까지 확인되면서 경찰 수사는 김이 빠지고 말았다.
그런데 채무자 중 미심쩍은 한 사람이 있었다. 커피숍 맞은편에 거주하던 30대 여성 A씨였다. 그녀가 이씨에게 빌린 돈은 원금만 3천400만원이었다. 이자를 합치면 갚아야 할 금액은 이 보다 더 클 수밖에 없다. 더더욱 의심을 뒷받침 하는 것은 사건 당일이 A씨가 사채를 갚기로 한 날이었다. 커피숍 홀에서는 피 묻은 여성용 구두 발자국이 나왔기 때문에 A씨가 유력한 용의선상에 올라가는 것은 당연했다.

경찰 수사는 A씨를 정조준 했다. 문제는 심증은 가득한데 물증이 나오지 않았다. A씨가 사건 당일 밤에 커피숍에 들어갔다는 목격자가 없었고, 그의 주거지를 수색했으나 피 묻은 옷이나 신발 등도 나오지 않았다. 통화기록을 조회해서 보니 사건 다음날 새벽에 누군가와 전화통화한 내역이 있었으나 이것만으로 범인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경찰은 A씨 주변을 집중 조사하기 시작했다. 물증만 확보하면 수사는 급물살을 탈 수 있었다. 이런 와 중에 경찰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일이 터진다. 바로 A씨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단순 교통사고인지 아니면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면서 이를 두려워한 누군가가 사고로 위장해 살해했는지는 알 수 없다.
유력한 용의자인 A씨가 사망하면서 사건은 또 다시 원점으로 가고 말았다. 이 사건과 관련한 제보는 부산경찰청 미제사건전담수사팀(051-899-2570)으로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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