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양조 술통에서 나온 여고생의 알몸 시신
1945년 11월 전북 군산에 주류 회사인 백화양조가 설립된다.
이 업체는 소주 공장을 신설하고 위스키 제조・판매 면허를 획득하는 등 군산의 대표기업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다 엽기적인 사건에 휘말리면서 회사 근간이 휘청거린다.
군산 소재 여자상업고교 3학년이던 김아무개양(18)은 백화양조 계열사 사장 아들 강아무개군(18)과 사귀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같은 초등학교를 나온 동갑내기였다. 이후 편지를 주고 받으며 가까워졌다.
가난한 집안의 딸이었던 김양은 강군을 통해 신분 상승을 꿈꾸었고, 상당한 미모를 가지고 있던 김양은 남학생들에게 ‘퀸카’로 불릴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고등학생인 두 사람은 잠자리를 함께 하며 성관계를 갖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군과 같은 반 친구가 그를 불러 “00(김양)이의 남자관계가 복잡하다”고 귀띔했고, 이 말을 들은 강군은 심기가 불편했다. 잔뜩 의심을 키운 강군은 김양이 새벽 과외를 나갈 때마다 미행하며 자기 외에 다른 남자를 만나는지 감시했다.
1978년 4월8일 오전 4시30분쯤, 강군은 과외교사 집으로 가는 김양 앞을 가로 막았다. 그는 “할 얘기가 있으니 따라 오라”며 월명동 백화양조 공장으로 향했고, 경비원이 없는 틈을 타 회사 내 2층 실험실로 데려갔다.
강군은 김양의 복잡한 남자관계를 추궁하며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했느냐고 따져 물었다. 김양은 “나는 너 외에는 사귀는 남자가 없다”고 했으나 강군은 더욱 몰아 세웠다.
평소 급한 성격이었던 김양은 자신의 결백을 보이겠다며 스스로 옷을 모두 벗었다. 그런데도 강군은 김양을 믿지 않았다. 이에 심한 모욕감과 수치심을 받은 김양은 그 충격에 경련을 일으키며 실신한다.
당황한 강군은 김양의 어깨를 흔들었으나 별 반응이 없자 죽은 것으로 착각했다. 얼마 안 있으면 직공들이 출근할 뿐만 아니라 공장 1층에는 사람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기에 범행이 탄로 날까봐 극도로 불안했다.
그는 범행 은폐를 위해 살아있는 김양을 대형 술통에 집어넣었다. 그런 다음 김양의 옷을 가지런히 정돈해 놓아 자살로 위장했다. 현장을 빠져나온 강군은 아무런 일도 없는 듯 평소와 같이 생활했다.
얼마 후 술통에서 김양의 시신이 발견되자 경찰이 본격 수사에 나섰다. 용의자는 20여 명으로 압축됐다. 이중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강군이었다. 모든 정황이 강군을 가리키고 있었다.

경찰 탐문 결과 사건 발생 5일 전 김양은 강군의 집에서 같이 잠을 잤으며, 이후 김양은 자기 어머니에게 “부잣집 아들과 가까워져 이제 나도 잘 살 수 있게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건 전날에는 강군이 김양 집에 전화를 걸어 다음날 만나자고 약속한 사실도 확인됐다.
경찰은 강군을 살인 및 시체유기혐의로 검거해 조사를 벌였다. 강군은 완강하게 범행을 부인했으나 경찰은 객관적으로 확보된 근거를 토대로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법원은 영장을 발부했다. 검찰에 송치된 강군의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러자 검찰은 그를 상대로 거짓말탐지기 조사를 벌였고 ‘거짓 반응’이 나왔다.
당시 거짓말탐지기 검사 문항은 모두 13개 였는데, 강군은 그중 ⯅사건 당일 김양을 만난 사실이 있는가 ⯅김양의 옷을 벗기거나 벗게 하고 술통에 빠트린 사실이 있는가 ⯅김양이 어떻게 백화양조 2층 시험실로 들어갔는지 아는가 ⯅김양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는가 등 결정적인 4개 문항에 대해 “아니오”라고 답변했다.
그 순간 강군의 혈압과 맥박, 호흡량 등의 기록이 비정상적으로 나타나면서 그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을 표시하고 있었다.
더 이상 빠져나갈 수 없다고 판단한 강군은 범행을 자백했다. 검찰은 강군에게 살인죄와 주거침입죄를 적용해 구속 기소했다. 이것은 국내에서 거짓말탐지기의 검사결과를 토대로 기소한 최초의 사건이다.
1・2심 재판부는 거짓말탐지기 검사결과를 보강증서로 인정하며 장기 3년 단기 2년6개월을 선고했다.
그러나 강군 측은 거짓말 탐지기의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고, 강군이 거짓말탐지기 검사후에 자백했기 때문에 ‘자백의 임의성이 없었다’고 주장, 이를 증거로 삼을 수 없다며 상고했다.

대법원은 이 사건판결문에서 “원심이 강 피고인에 대한 거짓말 탐지기의 시험결과 및 그 보고서를 이 사건의 범죄사실을 인정하는 증거로 사용하고 있으나 그 증거능력을 인정할 조건들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검사가 시행됐다는 자료가 없으므로 그 시험결과 및 보고서를 유죄인정의 직접자료로 사용한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 이 사건에서 거짓말탐지기를 통해 채택한 증거들은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이 사건에서 거짓말탐지기의 시험결과 및 보고서를 제외하더라도 다른 증거들에 의해 강 피고인의 범죄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고 판시, 원심형량을 확정했다.
이 사건 이후 군산에서는 한동안 백화양조가 시체로 담근 술(백화소주)을 모르고 팔았다는 괴담이 돌았다. 이로인해 회사 이미지는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회사 측은 김양이 발견됐던 술통을 경찰 입회아래 폐기 처분했다.
그로부터 7년 후인 1985년 12월 백화양조의 경영권은 두산그룹에 넘어갔다가 2009년 롯데주류에 매각됐다. 현재는 롯데칠성 군산공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대표 브랜드인 ‘백화수복’은 차례주인 ‘청주(淸酒)’ 시장 점유율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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