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괘법동 다방종업원 살인사건
경상남도가 고향이었던 채송이씨(여·22)는 부산 사상구 괘법동에서 태양다방 종업원으로 일했다.
채씨는 알뜰하고 검소하게 생활하며 매달 100만 원 이상을 저축했다. 적금도 꼬박꼬박 넣었다. 그녀에게도 꿈이 있었다. 돈 벌어서 좋은 학교에 들어가 ‘멋진 쉐프’가 되고 싶었다. 채씨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알뜰살뜰하게 돈을 모았다. 그녀에게 통장은 자신의 미래를 책임져줄 보물이었다.
2002년 5월 21일 오후 10시쯤, 채씨는 평소와 다름없이 다방 문을 나서며 퇴근했다. 그녀는 바로 집으로 가지 않았다. 오후 11시쯤 후배 정아무개양과 통화한 채씨는 “서면에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행방불명됐다. 다음날 다방에도 출근하지 않았다.
채씨의 언니는 동생이 연락두절 되자 걱정이 됐다. 혼자 살고 있던 집을 찾아갔으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방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언니는 수소문 끝에 동생이 일하는 다방을 찾아갔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동생의 행방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채씨의 언니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실종된 지 9일 만인 5월30일 사상경찰서에 동생의 실종 신고를 접수했다.
다음날인 31일 공공근로자 조아무개씨는 강서구 명지동 성창목재 앞 바다 근처에서 쓰레기를 치우고 있었다. 그러다 해변가에 떠밀려온 이상한 마대자루 하나를 발견한다.
조씨는 자루의 끈을 풀었다.
그랬더니 검은 비닐봉지가 나왔다. 겹겹이 싸인 포장을 떼어낸 뒤에야 마대 안에 있던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씨는 마지막 6장의 비닐봉지를 풀어내고는 기겁했다. 그 안에는 청테이프로 결박당한 여성의 시신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10일 전 행방불명된 채씨였다.

경찰이 출동해 채씨의 시신을 마대 자루에서 꺼내놓았다. 시신은 검은 비닐봉지에 6번, 마대자루에 2번 더 포장돼 있었다. 참혹한 모습이었다. 온 몸에 수 십 군데를 흉기로 찔린 상태였다. 이미 부패가 진행되고 있었다.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채씨의 시신 부검을 의뢰했다. 몸에는 총 40개의 자창(찔림)이 있었고, 이중 2~3개가 치명상을 입힌 것으로 나왔다. 성폭행 흔적은 없었다.
누가 채씨를 이렇게 잔인하게 살해한 것일까.
시신이 발견된 곳은 낙동강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하구둑(강의 하류에 해수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쌓은 둑)이었다. 문제는 범인들이 시신을 유기한 장소가 확실치 않았다. 낙동강 줄기를 따라 떠내려 온 것인지, 아니면 바다에서 조류를 타고 거슬러 올라온 것인지가 정확하지 않았다. 부산 강서경찰서에서도 아주 가까웠다.
경찰은 채씨의 실종 전후를 탐문하기 시작했다. 채씨와 마지막으로 통화한 후배 정씨에게 당시의 상황을 캐물었다. 정씨는 채씨에게 잠시 짐을 맡겨뒀는데, 그걸 찾기 위해 전화했다고 진술했다. “언니가 ‘대박사장 오빠 개업식 보러 서면에 간다’고 말했던 것 같다”고 전했다.
경찰은 채씨의 주변인물부터 원한관계가 있는지를 파악했다. 잔혹하게 살해된 것으로 봐서 원한관계에 의한 살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채씨가 원한을 살만한 정황은 없었다. 대박사장의 경우 당일 알리바이가 입증돼 용의선상에서 벗어났다.
그렇다면 다방 손님 중에 범인이 있는 것은 아닐까.
경찰은 다방 손님부터 시작해 채씨의 주변인물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다. 당시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건 다방의 단골손님이었던 A씨였다. 그는 채씨가 실종되던 날 함께 점심을 먹은 인물이었다.
A씨는 채씨 실종 당일 “서면에서 혼자 영화 보고, 혼자 술을 마시고 집에 갔다”고 진술했지만, 휴대전화 기지국을 수사해보니 거짓으로 나왔다. 더욱이 A씨는 경찰의 거짓말 탐지기 조사까지 거부했다. A씨는 “몸도 안 좋고, 술도 덜 깨서 안 한다”고 했지만 그의 행동은 경찰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실종 당일 알리바이가 확실하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반전이 생겼다. 경찰이 채씨의 금융거래를 확인하다가 전혀 다른 곳에서 유력한 용의자가 포착된 것이다. 채씨가 실종된 다음 날 그녀의 통장에서 296만원이 인출된 것이 확인됐다. 은행은 다방에서 불과 1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경찰은 즉시 은행으로 가서 폐쇄회로(CC)TV를 확인했다.
그랬더니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뉴욕양키스 모자를 눌러쓰고 돈을 인출해간 화면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남성은 이전 용의선상에 올랐던 A씨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경찰은 이 남성(이후 ‘B씨’로 표기)의 신원을 파악하는데 주력했다. B씨는 현금인출기(ATM)에서 돈을 인출하려다 비밀번호 오류가 나자 창구에서 ‘보호자’라고 속이고 돈을 찾았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고객정보 보안이 철저하지 않아 ‘보호자’나 ‘대리인’이라고 하면 예금을 찾을 수 있었다.
경찰이 B씨의 신원파악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그가 이 은행에서 현금을 인출한 지 20일쯤 지난 6월12일 이번에는 여성 용의자 2명이 피해자의 적금을 깨서 500만원을 인출해가는 일이 있었다. 1차 때와는 달리 채씨가 일하던 다방과 멀리 떨어진 북구 덕천동에 위치한 동일한 은행이었다.
경찰은 해당 은행으로 찾아가서 CCTV를 확보했다. 여기에는 공범들의 얼굴이 확연하게 찍혀 있었다. C씨(뚱뚱한 체형)와 D씨(보통 체형)였다. CCTV에는 이들의 역할까지 파악할 수 있는 장면이 포착됐다.
D씨가 채씨의 신분증을 가지고 비밀번호 재발급을 신청했다. 이때 C씨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은행 청원경찰에 따르면 CCTV에는 포착되지 않았지만 일행으로 보이는 남자 1명이 더 있었다고 한다.

이 남성은 B씨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당시 은행 창구 여직원은 “C씨가 내민 채씨의 적금 통장은 만기가 6개월 정도가 남아 있었다. B씨는 이것을 해지하겠다고 했고, 그가 내민 신분증이 실물과 달라 ‘본인이 아닌 것 같다’고 했더니 옆에 있던 D씨가 자신이라고 우겨서 비밀번호 변경서류를 접수해 돈을 내줬다”고 진술했다.
이때 C씨가 마치 D씨를 조종하듯 했고, 주도적으로 행동했다. 이런 것을 볼 때 D씨는 C씨의통제에 따랐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나이 등으로 유추해보면 용의자 중 B씨가 주범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들은 돈을 찾은 후 유유히 사라졌다.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이 남는다.
범인들은 무슨 감정이 있었기에 채씨를 무려 40번에 걸쳐 난도질했을까. 또 채씨는 언제까지 살아있었을까. 이 사건을 접한 범죄 심리학자들은 범인들이 채씨의 통장 비밀번호를 알아내기 위해 고문했고, 그 일환으로 수많은 자창이 생긴 것으로 내다봤다.
가슴 흉복부 정면에 다발성 자창이 있었는데, 이것은 제압된 상태에서 비밀번호를 알아내기 위한 상처들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범인들에 의해 제압돼 결박된 채씨가 통장 비밀번호를 실토하라는 범인들로부터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말이다.
채씨는 최소한 1차 현금이 인출될 때까지는 살아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B씨가 1차로 ATM에서 인출을 시도할 때 2번이나 오류가 있었다. 틀린 비밀번호로 나온 것이다. 그러자 B씨는 누구에겐가 연락했고 밖에 나갔다가 들어왔다. 경찰은 이것이 채씨를 협박해서 비밀번호를 알아내려고 했던 행동으로 추정했다.
이 과정에서 협박이나 고문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실제 1‧2차 비밀번호 입력에 실패하자 어딘가에 전화한 후 올바른 비밀번호를 알아낸 것을 보면 이런 추론을 뒷받침 한다. 때문에 이때까지는 채씨가 살아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채씨는 항상 통장을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그녀에게 통장은 전 재산이자 자신의 꿈을 이룰 밑천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범인들에게 순순히 통장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았던 것 같다. 다급해진 범인들은 고문을 통해 비밀번호를 알아내려다 채씨의 몸에 수많은 자창을 낸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경찰의 초동수사 실패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피해자의 금융거래를 중지(지급정지)시키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만약 금융거래를 중지시키고 범인들이 피해자의 통장으로 돈을 인출하려고 할 때 바로 신고가 들어갔다면 이 사건은 곧바로 해결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경찰이 지급정지를 하지 않아 한창 수사 중인 상황에서도 범인들이 피해자의 적금통장을 들고 은행에 들어와서 현금을 찾도록 사실상 방조했다. 경찰은 은행 CCTV에 찍힌 용의자들의 얼굴을 전단지에 인쇄해서 ‘공개수배’령을 내렸지만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 말았다.
결정적인 제보도 없었다.
그러다 15년이 지난 2017년 4월 한 시민의 결정적 제보가 접수됐고, B씨(당시 31세)를 검거하는데 성공한다. 또 은행 현금 인출을 도와준 공범 C씨(당시 23·여)와 D씨(당시 26·여)도 검거했으나 현행법으로 처벌 가능한 공소시효 기간이 지난 상태였다.
이들은 B씨와 평소 알고 지내던 주점 여종업원이었다. 경찰에 따르면 B씨는 2002년 5월21일 오후 10시쯤 다방에서 일을 마치고 퇴근하던 여종업원 채씨를 납치해 흉기로 수십 차례 찔러 살해하고 시신을 마대자루에 담아 인근 바다에 유기했다.
그는 또 채씨에게 빼앗은 적금통장을 이용해 모두 2차례에 걸쳐 현금 796만원을 인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B씨는 범행 당시 일을 그만둔 이후 도박에 빠져 카드 연체료 등 채무가 많은 상황이었다.
1·2심에서는 검찰의 공소사실을 인정해 B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B씨를 범인으로 확신할 정도로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원심을 파기 환송했다.

2019년 7월11일 부산고법은 파기환송심 선고 공판에서 원심인 무기징역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파기환송심에서 새로운 증거나 진술이 제시되지 않았고 기존 증거에서 대법원이 제기한 의문이 완전히 해소되지 못했다고 봤다. 이에 따라 이 사건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미궁에 빠졌다.
결국 경찰의 초동수사 실패가 유력한 용의자를 두고도 미제로 남게 된 것이다. 죽은 피해자만 더 억울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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