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일반

한국인 노리는 ‘필리핀 범죄조직’ 실체


필리핀에서 한국인 사업가나 관광객들이 범죄의 표적이 되고 있다.

2016년 10월18일, 앙헬레스에 거주하며 사업장을 운영하던 지아무개씨(53)가 자신의 집 근처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됐다. 경찰관인 범인들은 마약 단속을 한다며 가짜 압수수색 영장까지 제시하고, 지씨를 차량에 태워 경찰청 마약 단속국 건물 옆 주차장으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지씨의 목을 졸라 살해했다.
 
증거인멸을 위해 시신을 전직 경찰이 운영하는 화장터에서 소각했다. 범행 2주일이 지난 후에는 지씨의 가족에게 800만 페소(한화 1억9천여만원)를 요구했고 500만 페소(한화 약 1억2천만원)를 받은 후 잠적했다.
 
필리핀 당국은 핵심용의자인 현직경찰 한 명의 신병을 확보하고, 나머지 용의자들에 대해 체포영장을 청구했다. 당시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은 관련자 전원 구속을 지시했다.
 
검거된 범인들은 현직 3명, 전직 1명 등 전현직 경찰관이 주도한 총 8명이었다. 이들은 지씨가 사업에 성공했다는 소문을 듣고는 몸값을 노리고 치밀한 계획을 세운 것으로 드러났다.  


이듬해인 2017년 5월에는 한국인 관광객 황아무개씨(46)가 괴한 2명에게 총격을 당해 목숨을 잃었다. 한식당을 운영한 것으로 알려진 40대 한국인은 2018년 2월 중부 세부섬에서 승용차를 운전하고 가다 오토바이를 탄 괴한 2명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2017년 외교부 자료에 따르면 2012년부터 2016년까지 해외에서 살해된 우리나라 국민은 총 164명이었다. 이중 필리핀에서 살해된 한국인은 48명으로 전체 피해자의 29.3%였다. 2위 미국(21명)보다 2배 이상 높다.

왜 필리핀에서만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끊이지 않는 것일까. 우선 필리핀은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여행지 중 한 곳이다. 필리핀을 방문하는 한국인 관광객은 연간 100만 명이 넘는다. 현지에는 10여 만 명의 교민이 살고 있다.

필리핀은 한국인 범죄자의 도피처로도 유명하다. 7천여 개의 섬으로 둘러싸여 있다 보니 필리핀으로 달아나면 추적이 쉽지 않다. 지금까지 필리핀으로 도주한 한국인 범죄자가 600명이 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필리핀은 또 총기 소지가 허용된 나라다.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돈을 주고 총기를 구입할 수 있다. 가내 수공업 형태의 불법 사제총기도 넘쳐난다. 하지만 치안은 무척 불안하고 부패가 만연해 있다.

사업가 지씨 납치살해사건에서 보듯이 경찰 중에는 범죄 조직과 결탁한 부패 경찰들도 상당하다. 경찰이 마약 단속을 핑계 삼아 무고한 사람을 연행해 돈을 뜯어내는 일이 자주 발생하는 이유다.


경찰관들의 열악한 생계와 처우도 문제다. 대통령이 경찰관 봉급의 2배 인상을 추진하며 급전이 필요하면 자신에게 오라고 할 정도로 경찰관들의 생계가 열악하다. 때문에 필리핀에서는 돈만 주면 얼마든지 경찰도 매수할 수 있다.

수도 마닐라에 있는 경찰청사 앞에 도열하고 있는 경찰관들.

필리핀에서는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해결된다”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그러다보니 청부 납치․살해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사람 한명 죽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재력가나 권력자가 사적으로 고용한 자경단도 활개치고 있다. 두테르테 필리핀 전 대통령도 남부 디바오시 시장 시절 자경단을 운영했던 사실이 전직 단원의 고백을 통해 드러났을 정도다.

필리핀 반군들은 조직 운영자금 마련을 위해 청부 납치‧살해를 마다하지 않는다. 청부살인에 가격까지 매겨져 있다. 전문적인 암살조직이냐, 아니냐에 따라 금액은 달라진다. 또 브로커가 개입하거나 의뢰인이 외국인일 경우에도 가격은 다르다. 보통의 경우 약 50만원~300만원까지 형성돼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외국인이 현지에서 킬러를 고용하기 위해서는 200~300만원이면 가능하다. 참고로 2008년 4월에 살해당한 3백억 대의 자산가 박아무개씨의 경우 청부 금액은 한화 100만원이었다. 필리핀 직장인들의 평균 월급이 30만 원선인 점을 볼 때 적지 않은 금액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한국인 대상 범죄의 배후는 크게 세 곳으로 압축된다. 첫째는 돈을 노린 필리핀 범죄 조직이다. 지난 2004년부터 한국인들의 필리핀행이 러시를 이루었다. 돈 많은 사업가들이 관광이나 투자를 위해 들렀다. 현지인들에게 한국인은 ‘돈이 많은 사람’으로 비춰졌다. 그때부터 돈 많은 한국인들을 노린 범죄가 부쩍 늘었다.


한국인을 노린 배경에는 ‘아는 사람’과 관련이 있다. 한인 사업가의 경우 범죄 조직과 결탁한 현지 고용 운전기사, 회사 경비, 직원, 가정부 등이 동선을 노출하는 등 공모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인 사업가 살해 혐의로 체포된 필리핀 경찰관(왼쪽)과 피해자 지아무개씨(오른쪽).

필리핀 범죄 조직은 사업가나 관광객을 납치해 돈을 빼앗고 풀어주기도 하지만 살해해서 흔적을 지우기도 한다. 지씨의 경우에도 여기에 속한다. 그는 필리핀에서 인력송출업으로 상당한 돈을 벌었다. 지씨를 납치한 주범인 경찰관도 평소 안면이 있었다.

둘째는 국내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도피한 범죄자들이 ‘돈 벌이’를 위해 납치‧살해에 나서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최세용 일당이다. 최세용은 김성곤, 김종석(사망)과 함께 지난 2007년 7월9일 안양에 있는 한 환전소 여직원을 살해하고 1억8000여 만원의 금품을 빼앗은 뒤 곧바로 해외로 도피했다. 이들은 말레이시아와 필리핀을 전전하며 도피생활을 했다.


도피자금이 떨어지자 필리핀에 여행온 한국인을 납치해 금품을 빼앗았다. 심지어 한국에서 알게 된 사람을 필리핀으로 유인해 납치한 뒤 통장과 카드에서 돈을 인출한 뒤 살해했다. 이들은 강도 살인 외에도 2008년부터 2011년까지 필리핀에서 한국인 여행객 여러 명을 납치·감금하고 권총, 흉기 등으로 위협해 1억 원 상당의 금품을 빼앗았다.

현지 교도소에서 자살한 김종석을 제외한 최세용과 김성곤은 국내로 송환돼 재판에서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필리핀 여행 중 최씨 일당에게 납치됐다 살해된 홍석동씨의 경우 사건발생 3년 만인 2014년 11월, 마닐라시 외곽의 한 주택 마당에서 발견됐다.

홍씨 외에도 2011년 필리핀 여행을 갔다가 실종됐던 전직 공무원 김아무개씨의 시신도 함께 발견됐다. 시신이 발견된 주택은 최씨 일당의 은신처였다. 홍씨의 아버지는 아들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자 2013년 1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셋째는 한국인이 현지인을 고용해 청부살해하는 경우다. 2016년 10월 필리핀 파콜로시 외곽에 있는 사탕수수밭에서 현지 농부가 한국인 남녀 시신 3구를 발견했다. 시신은 테이프로 손발이 묶여 있었고, 머리에는 총상을 입은 채 숨져 있었다.

한국인 3명이 숨진 채 발견된 필리핀 파콜로시 외곽의 사탕수수밭.

이들은 박아무개씨의 소개로 필리핀에 10억 원 정도를 투자했으나 이익이 나지 않자 사이가 틀어졌고, 박씨는 경남 창원에 있는 김아무개씨한테 1억원을 주는 조건으로 청부 살해를 의뢰했다. 박씨와 김씨는 세 명을 총으로 살해하고 숙소로 돌아와 피해자들의 돈까지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2008년 4월 필리핀에서 살해된 재력가도 필리핀에서 청부살해를 당했다. 2015년 9월17일 앙헬레스의 한 건물에서는 한국인 사업가 박아무개씨가 청부살해로 목숨을 잃었다. 현지에서 호텔을 운영하던 박씨는 인근 사무실에서 용의자가 쏜 총에 맞은 후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끝내 사망했다.


당시 용의자는 박씨에게 총 5발을 쏜 뒤 건물 밖에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를 타고 달아났다. 경찰 수사에서 박씨는 한국인 동업자들 3명에게 청부살해를 당한 것으로 확인됐다. 범인들은 사건발생 4년 만인 2020년 1월23일 필리핀과 국내에서 모두 체포됐다. 다만, 박씨에게 총을 쏜 필리핀 용의자는 아직 검거되지 않았다.
 
한국인이 즐겨 찾는 관광도시 세부에도 암묵적인 ‘청부 금액’이 정해져 있다. 현지인 등에 따르면 일반인은 ‘1만 페소(한화 약 27만원)’면 청부살인 의뢰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심지어는 ‘5천 페소(한화 약 14만원)’에 청부살인에 나서는 현지인도 있다고 한다.
 
2011년 1월 필리핀의 한 라디오방송 기자가 괴한의 총탄에 맞아 숨진 적이 있었다. 범인 두 명 중 한 명이 경찰에 체포됐는데, 그는 계약금 1만 페소를 포함해 총 작업비용 15만 페소(한화 약 410만원)를 받고 청부살인에 나섰다고 진술했다.
 
현재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에 대해서는 주필리핀 영사관에서 맡고 있다. 한국인 실종사건이 빈번하자 2010년 10월에 필리핀 경찰청과 각 지방청에 한인 관련 강력범죄를 담당할 ‘코리안데스크(Korean Desk)’가 설치됐다. 마닐라, 앙헬레스, 카비테, 세부, 바기오 등에 두고 경찰관 6명을 파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경찰은 수사권과 체포권이 없다. 필리핀의 과학수사 수준도 현저히 낮아 범죄 발생시 처리하는데 애를 먹고 있다. 기본적인 통화내역 조회나 위치추적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범죄 피의자를 발견해도 긴급체포할 수가 없고, 영장 발부를 몇 달씩 기다리다가 놓치는 일도 있다. 경찰과 필리핀 교민사회에서는 여행객들에게 “범죄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우리 정부의 미온적 대응이 문제라는 지적도 많다. 그동안 해외에서 자국민 범죄 피해를 입는데도 우리 정부는 탁상공론만 해 왔다. 외교부는 ‘유감 표명’과 ‘철저한 수사 촉구’만을 남발했다.

해외에서 범죄 피해를 당해도 대사관이나 영사관은 있으나 마나한 곳이 돼 버린 것이다.


<저작권자 ⓒ정락인의 사건추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