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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도지사 박중양 ‘법주사 여승’ 성폭행 사건

조선말과 일제강점기 고위관료를 지낸 박중양은 일제를 칭송하고 조선을 혐오했다. 해방 후에는 “이완용은 매국노가 아니다”라며 감쌌다.

그의 일본 이름은 ‘호추 시게오’다.

1897년에 관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1900년에 도쿄 아오야마(靑山) 학원 중학부를 졸업했다. 도쿄 경시청에서 경찰제도 연구생으로 경찰 제도와 감옥 제도를 연구했다.

이때부터 대한제국에서 파견한 밀정의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1904년 귀국 후에는 대한제국 관리서 주사를 시작으로, 평안북도 관찰사, 평안남도 관찰사, 전라남도 관찰사, 경상북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을사늑약으로 한일병합이 되자 “백성의 권리를 지키지 못하는 나라에는 충성을 바칠 필요가 없다”며 일제를 찬양했다.

1923년에는 충북도지사로 부임했다. 그는 산수유람을 자주 다녔는데, 1924년 속리산에 갔다가 도로가 좁아 불편하다며 보은군청을 시켜 농민들을 강제동원해 길을 닦았다. 한창 농번기에 강제노역에 동원된 농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 듯 했으나 박중양은 개의치 않았다.

박중양의 악행은 1924년 12월26일 속리산에 다시 놀러갔다가 절정을 이룬다. 이날 박중양은 충청북도 순시를 나온 조선총독부 사이토 마코토 총독 내외와 감방주사, 각 부장과 신문기자 등 16명을 동행해 속리산 법주사를 찾았다.

일본 해군대장 출신인 사이토 마사토는 제3대 조선총독(1919~1927)을 지낸 인물이다.

이날 오후 5시30분쯤 속리산에 도착한 박중양 일행은 대법당에서 주연을 열었다. 당시 법주사에는 200여명의 여승이 있었는데, 이중 젊고 예쁜 비구니 6명을 선발해 시중을 들게 했다. 이들은 밤새워 질펀하게 술판을 벌였다. 박중양은 맥주 60병을 마시고도 취하지 않았다고 한다.

밤이 깊어가자 총독 부부는 침실로 돌아가고 박중양은 자신의 주도로 주연을 펴기 시작했다.

수행원과 기자들이 뒤섞여 술잔을 비우던 중 이미 취기가 오를 대로 오른 박중양의 눈에 방구석에 꿇어앉아 있던 여승 양순재가 보였다. 당시 그녀는 스무살의 꽃다운 나이였다. 박중양은 양순재를 노려보며 추파를 던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양순재를 가까이 오라해서 옆에다 앉혔다. 새벽 4시쯤 다른 사람들이 취기에 못 이겨 하나 둘 자리에 쓰러져 잠이 들자 박중양은 양순재의 손목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다음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법주사를 떠났다.

이때 양순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며칠 후 양순재는 승방 후미진 구석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박중양에게 성폭행을 당해 분노와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하지만 사건은 흐지부지됐다. 조선총독이 참석했던 술자리였던 데다 당시 거물급인 박중양의 위세에 눌려 수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박중양 여승 사건을 다룬 동아일보 1925년 3월6일자.

하지만 다음해 동아일보의 폭로로 사건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동아일보는 박중양을 ‘색마지사(성행위나 성관계 따위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사람)로 표현했다.

박중양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형성되자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됐다. 하지만 그때 뿐이었다. 박중양은 2년도 안 돼 조선총독부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참의가 됐다.

1928년에는 황해도지사, 1943년 중추원 부의장을 거쳐 일본 패망 직전인 1945년 4월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이 됐다.


광복 후인 1949년 1월 대구 침산동 자택에서 반민특위 수사관들에게 체포됐지만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말년에는 재취 부인인 당시 48세의 일본 여자와 대구 침산동 오봉산 기슭에서 은거하면서 일제를 옹호했다. 1959년 4월23일 86세로 자연수명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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