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사건

전쟁영웅에 가려진 ‘친일파 백선엽’의 실체

우리는 잔혹한 일제강점기와 악랄한 독재정권을 경험했지만 그때뿐이다.

지금까지 숱하게 ‘역사 청산’ ‘과거 청산’을 운운했으나 별로 진척된 게 없다. 친일파들의 여전한 득세와 독립운동가나 그 후손들의 고된 삶은 이젠 상식이 됐다.

‘친일파’를 민족의 영웅으로 받들고, ‘반란 수괴’를 전직 대통령으로 깍듯하게 예우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정치인들의 이중적인 행태는 속도 없고 배알도 없다.

매년 6월이면 언론에서는 친일파 백선엽을 ‘살아있는 전쟁 영웅’으로 화려하게 조명하고 있다. 백씨의 한국전쟁에서의 ‘공’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다만, 역사는 공인인 백씨의 ‘공’과 ‘사’를 명명백하게 기록해야 한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백씨의 삶에서 ‘주홍글씨’로 남아있는 ‘친일행적’은 묻혀왔다. 그를 ‘마지막 생존 친일파’로 명명하기보다 ‘전쟁 영웅’이라며 말 그대로 ‘영웅 만들기’에만 치중해 왔다.

백선엽은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제9기로 졸업하고 만주국 장교로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하다 중위 때인 1945년 광복을 맞았다.

‘간도특설대’는 조선인 독립군을 소탕하기 위해 창설된 기구였으며, 실제 항일 세력 토벌에 투입됐다.

지난 2000년 일본어로 발간된 회고록 <젊은 장군의 조선전쟁>에서 백선엽은 간도특설대에 대해 “일종의 특수부대로서 폭파, 소부대 행동, 잠입 등의 훈련이 자주 행해졌다”고 썼다.

백씨는 지금까지 독립군 토벌에 나섰던 자신의 행적에 대해 “후회한다” “반성한다” “사과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자신의 친일행적을 합리화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뤘다. 1993년 일본에서 출간된 <간도특설대의 비밀>에서 백선엽은 아래와 같이 회고했다.

“간도특설대가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어 커다란 전과를 올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간도특설대가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

그는 회고에서 간도특설대를 ‘우리’라고 표현했는데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 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이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또한 간도특설대의 활동에 대해 “민중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평화로운 생활을 하도록 해주는 것이 칼을 쥐고 있는 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간도특설대의 만행.

백씨는 ‘간도특설대’ 복무에 대해 “어쩔 수 없었다”며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다. 여기에다 자기가 독립군을 토벌했건 안 했던 ‘독립’에 영향이 없었다고까지 말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사람을 ‘전쟁 영웅’으로 떠받들고 있다. 백씨의 친일행적에 대해 역대 어느 정권에서도 그 책임을 물은 적이 없다.

그나마 지난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군(軍) 부문에 수록됐으며,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된 것이 전부라면 전부다. 이런 것에 백씨는 별로 아랑곳하지 않았다.

백씨는 해방 후 간도특설대 복무 경력을 바탕으로 한국군 장교로 변신하는데 성공한다. 미군정이 세운 군사영어학교 를 졸업한 후 육군 중위로 임관했다.

남로당에 연루됐던 박정희를 살려준 것도 백선엽이었다.

박정희는 육군 소령시절 남로당 가입 사실이 드러나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이때 박정희를 구명해 준 인물이 바로 백선엽이다. 1949년 당시 육군 정보국장(대령)이던 백씨는 박정희가 석방되는데 크게 기여했고, 문관으로 육군 정보국에서 일하게 했다.

박정희가 대령에서 준장으로 진급할 때도 육군참모총장이던 백선엽이 도움을 줬다고 한다.

그는 한국전쟁 당시 제1사단장으로 낙동강 전투와 38선 돌파작전 등 결정적인 전투를 지휘했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53년 한국군 최초로 대장으로 진급했다.

두 차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후 합참모부 의장(현 합참의장)으로 1960년 예편했다. 그 뒤에도 승승장구하며 지금까지 누구보다 화려한 삶을 살고 있다. 독립군을 때려잡던 ‘간도특설대’ 행적은 ‘한국전쟁의 영웅’에 가려졌다.

퇴역 후에는 ‘외교관’으로 화려하게 변신했고, 윤보선 정권하에서 주 중화민국 대사, 주 프랑스 대사를 지냈고, 박정희의 5.16 쿠데타 이후에도 박정희 정권하에서 캐나다 대사, 교통부장관, 충주비료 사장, 한국종합화학공업 사장, 호남비료 사장 등 경제인으로 또 한 번 변신했다.

그는 교육에도 관여했다. 친동생인 백인엽과 인천에 인천대학교를 비록한 선인재단의 학교를 설립해 운영했으나, 선인재단은 재단 내부의 비리와 부패행위로 인해 1994년 선인재단의 모든 학교는 공립학교로 전환됐다.

백씨는 1989년에는 성우회 회장에 선출돼 1991년까지 재직했다.

이명박 정권 때인 2008년에는 ‘대한민국 건국 6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고문으로 위촉됐으며, 2009년에는 2010년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을 기념하여 백선엽을 ‘명예 육군 원수’로 추대하려고 했으나, 언론과 시민단체 등의 반발로 통과되지 못했다.

일본에서 출간된 백선엽의 회고록과 회상록.

백씨는 2003년 11월 국방부 산하 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으로 위촉된 후 2013년까지 차량과 운전병, 보좌관 지원 등 과도한 특혜를 준 것이 드러나 국회에서 문제가 제기됐다.

백씨는 평일과 주말 내내 개인적으로 차량 등을 이용했는데, 이는 군 차량의 개인적 사용을 금지한 국방부의 ‘군 승용차 운용 훈령’을 위반한 것이다.

2013년 국방부는 백씨의 이름을 딴 ‘백선엽 한미동맹상’까지 제정했다. 계룡대에는 백씨의 이름을 딴 개인 기념실인 ‘백선엽 장군실’까지 만들었다.

한국전쟁 당시 백씨가 사단장으로 근무했던 육군 1사단은 백씨의 동상을 세웠다. 심지어 문화재청은 한국전쟁 당시 백씨가 입었던 옷을 문화재로 등록하려다 독립운동 단체 등의 항의를 받고 포기한 일도 있다.

백씨는 2020년 7월10일 100세로 사망했다.

사람은 누구나 순간적인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런 후에는 무엇보다 처신이 중요하다. 잘못을 뉘우치고, 반성하고, 참회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에게 손가락질 하거나 돌을 던질 사람은 없다.

만약 백씨가 그런 모습을 보여줬다면 역사는 그를 ‘용기있는 진정한 영웅’으로 묘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백씨는 지금까지도 ‘반쪽짜리 영웅’ ‘삐뚤어진 영웅의식’으로 살아왔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안중근 의사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마지막 소원을 남겼다.

“국권이 회복되는 날 나를 고향땅에 묻어 달라”고 당부했다. 그런데도 안 의사의 소원은 허공에 맴돈 지 100년이 훨씬 넘었다.

대신 전국 곳곳에서는 ‘안중근 없는 기념식’만 형식적으로 치르는 실정이다. 안 의사가 지하에서 통곡할 일이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비춰주는 오늘의 거울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명심해야 한다.■

<저작권자 ⓒ정락인의 사건추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