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영화같은 ‘100억 위조수표’ 사기사건
100억 위조수표 사기단은 진화된 신종 은행털이범들이었다. 총이나 흉기를 들고 은행 창구에서 돈을 강탈한 것이 아니라, 진짜 수표를 위조해 금액을 부풀린 뒤 은행에서 돈을 빼내 유유히 사라졌다. 영화 같은 일이 현실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2013년 6월14일 대부업자 박아무개씨(45)는 수원 정자동에 있는 KB국민은행을 찾아갔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액면가 100억원짜리 수표를 은행 창구에 내밀며 현금 지급을 요청했다. 은행측이 수표에 적힌 일련번호를 확인해보니 ‘이미 지급한 수표’라고 나왔다.
은행측은 박씨에게 “인출된 수표여서 지급이 안 된다”고 거절했다. 박씨는 펄쩍 뛰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게 진본인데, 벌써 지급했다니 무슨 말이냐”며 따졌다. ‘100억 가짜수표’ 사건은 이렇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박씨는 경찰에 신고했다. 경기경찰청은 즉시 수사에 들어갔고 전후 사정 파악에 나섰다.
그랬더니 6월12일 오전 11시쯤 최영길(60)이 KB국민은행 수원 정자점을 찾아 100억원짜리 자기앞수표를 제시한 뒤 서울 명동과 연지동 시중 은행 2개 계좌에 50억원씩 분산 입금한 것을 확인했다. 경찰은 은행 CCTV를 통해 당일 창구에서 돈을 찾는 모습을 확인했다.
이날 최씨는 위조한 가짜 100억원짜리 수표를 제출하고 전액 현금으로 찾아갔다. 국민은행 수원 정자점은 수표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수표에 적힌 일련번호를 통해 은행에서 발급한 수표가 맞는지를 확인했으나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다시 수표 감별기를 통과시켰더니 이번에도 이상 반응이 없었다. 지점장은 최씨가 내민 수표가 진짜라고 믿고 100억 수표에 대한 현금 지급을 허락했다. 이렇게 해서 최씨는 흉기 한 번 들지 않고 은행에서 100억 원을 빼낼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최영길이 대부업자 박씨에게 접근한 것은 5개월 전인 지난 1월 초순이다. 최씨는 브로커를 통해 박씨를 소개받았고, “회사를 인수하려 하는데 자금력을 증명해야 한다. 100억원짜리 수표를 갖고 있다가 내가 연락하면 국내 5대 로펌 중 한 곳에 맡겨 달라”며 일종의 예치 증명인 에스크로 방식을 제안했다. 그리고 돈을 쓰는 기간을 4일로 정했고, 1일 수수료 1800만 원씩 7200만원을 먼저 지급했다.
하지만 그 후 최씨는 박씨에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박씨가 은행을 찾아갔다가 자신의 수표를 도용한 가짜 수표를 현금으로 전액 찾아간 것을 확인한 것이다.
주범 최영길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최소 7개월 이전부터 치밀하게 계획했고, 나름대로 인출책과 환전책 등 조직책을 두고 활동했다. 그리고 주도면밀하게 움직였다. 돈을 입금 받은 다음 날 단 하루 만에 서울 지역 은행 10여 곳을 돌며 100억원을 모두 인출했다. 이들은 인출된 자금에 대한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달러 67억원, 엔화 30억원, 원화 3억원 등으로 나눠 인출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최씨의 위조 수법은 첨단을 달렸다. 진짜 수표처럼 위장하기 위해 진짜 수표를 사용했다. 그는 1월11일 국민은행에서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1억110만원권 수표를 발급받은 후 일련번호와 금액을 위조해 100억원짜리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1억원짜리 진짜 수표를 100억원짜리로 액면가를 부풀린 것이다.
경찰은 사건 발생 후 수사관 17명이 참여하는 전담수사팀을 꾸렸다. 그리고 공모자 2명과 환전책 4명, 인출책 3명 등 총 9명을 검거했다. 주범인 최영길 등 3명의 행방을 찾지 못하자 경찰은 최영길, 김영남(47), 김규범(47) 등을 전국에 공개 수배했다. 그런데 이 중 김영남이 심적 부담을 느껴 자수하면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당초에는 최영길을 주범으로 특정했으나 ‘나경술’이라는 이름이 새로 떠올랐다. 자수한 김영남은 “나는 나경술에게 이용됐다. 그가 모든 것을 지시했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나경술을 이번 사건의 몸통으로 지목한 것이다.
김영남은 경찰에서 “2010년 4월쯤 나씨와 같은 구치소에 수감됐던 인연으로 2012년 말부터 2013년 초까지 나씨에게 모두 6천800만원을 빌려줬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김씨가 돈을 빌려준 시기로 미뤄볼 때 이 돈이 100억원짜리 수표를 위조하는 데 사용된 1억110만원짜리 수표를 발급하는 데 쓰인 것으로 추정했다.
이와 관련해 김씨는 나씨에게 빌려준 돈을 갚으라고 독촉하는 과정에서 범행 당일인 6월12일 서울에서 이자를 포함해 1억원을 건네받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경찰은 김씨가 2013년 초 나씨와 수차례 만난 점, 범행 과정에 대해 모두 알고 있던 점 등으로 볼 때 주범 격인 인물로 판단했다.
이런 가운데 또 다른 인물이 용의 선상에 올랐다. KB국민은행 서울 용산 한강로 지점에 근무하는 김아무개 차장(42)이다. 경찰은 김차장이 나경술에게 1억110만원짜리 수표를 부정 발급해 범행에 공모한 혐의(특경법상 사기)를 적용해 긴급 체포했다.
나경술의 추가 범행도 드러났다. 나씨는 2012년 8월 위조한 어음을 담보로 47억원을 대출받은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돼 경찰의 추적을 받아온 인물이다. 경찰은 나씨가 이번 100억원 사기사건 당일 서울 명동 커피숍에서 공범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CCTV 화면에서 찾아내 관련 진술을 확보했다. 수법도 비슷했다.
경찰은 또 당초 주범으로 알려졌던 최영길이 전직 경찰 출신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최씨는 1982년 경찰에 특채된 후 1990년 서울경찰청 기동단에서 해임됐다. 그는 서울경찰청 형사기동대 근무 시절 친구에게 서울 강서구 소재 국유지를 불하받게 해주겠다며 3140만원을 챙겨 해임됐다. 최씨는 경찰에 있을 당시 김포공항에서 2년 동안 출입국 관련 업무를 담당한 사실도 드러났다.
경찰은 주범 격인 나경술과 최영길, 김규범 검거에 전력을 기울였다. 출입국 기록을 조회해본 결과 아직 국내를 빠져나가지 못한 것으로 파악됐다. 하지만 이들이 해외로 달아났을 가능성도 있었다. 치밀한 범행 수법 등으로 볼 때 위조 여권을 이용하거나 밀항 등을 통해 이미 중국 등 해외로 빠져나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특히 경찰 출신인 최영길의 경우 김포공항에서 출입국 관련 업무를 봤던 것으로 미뤄볼 때 밀입국 등에 대한 지식이 상당할 것으로 보였다. 얼마든지 해외로 빠져나갔을 수 있다는 뜻이다.
공항에서 밀입국 수사 업무를 오래 전담했던 전직 경찰관은 “내가 봐도 최소한 나경술이나 최영길은 국내에 없는 것 같다. 100억원을 빼낸 후 97억원을 달러나 엔화로 환전했다는 것은 이미 범행 계획을 세울 때부터 해외로 빠져나갈 계산을 끝마쳤다는 것이 된다. 그러니까 ‘출입국 기록’만 보고 ‘국내에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과연 이들은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 정작 이들은 멀리 도주하지 않았다. 해외 밀입국 등의 우려와는 달리 국내에서 숨어 지내고 있었다. 경찰은 사건발생 약 한 달 만인 7월12일 오후 7시10분쯤 서울 강남 역삼동의 한 호텔 인근에서 격투 끝에 나경술을 검거했다.
나씨는 범행이후 의정부, 부산 등의 모텔에서 숨어 지냈던 것으로 드러났다. 약 7시간 뒤에는 최영길 등도 잇따라 검거했다. 최영길은 부산의 친척집에 은신해 있었다.

주범들이 검거되면서 범행 전말도 드러났다. 이 사건의 최대 미스터리는 대부업자 박씨가 가지고 있던 진본 수표의 일련번호 등을 최영길이 어떻게 알아냈냐는 것이었다.
박씨는 처음부터 최씨에게 수표를 건네주지도 보여주지도 알려주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경찰 조사결과 박씨가 최씨에게 알려준 것으로 드러났다. 박씨는 일련번호 중 끝에서부터 3자리가 가려진 100억원 수표 사본을 최씨에게 넘겼다. 최씨는 나씨에게 이를 넘겼고, 퀵서비스를 이용해 위조책에게 전달됐다.
위조 기술자는 1억100만 원 수표의 일련번호를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해 감쪽같이 지우고 100억 원 수표 사본의 일련번호를 덧씌웠다. 나머지 비워 있던 금액란에는 ‘₩10,000,000,000 ※일백억원 이하’를 컬러 프린터를 이용해 새겨 넣었다. 이렇게 진짜 수표를 이용해 금액을 부풀려 감쪽같이 사기를 성공시킨 것이다.
이들은 범행 후 각각 역할에 따라 돈을 분배했다. 총책인 나경술은 100억 원 중 19억9000만 원을 챙겼다. 그리고 또 다른 범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사기금액에 1천억원대에 달한다. 나경술은 국민은행 김차장을 통해 가짜 통장을 만든 뒤 잔고증명을 빌미로 재력가로부터 800억∼1000억원을 입금 받아 가짜통장을 내주고, 진짜 통장을 빼돌렸다가 돈을 인출한다는 계획이었다.
영화 보다 더 영화 같은 희대의 사기범들은 모두 재판에 넘겨졌다. 재판부는 나경술에게 징역 15년과 벌금 30억원, 공범인 국민은행 김차장은 징역 12년과 벌금 10억원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번 범죄는 고도로 정교한 수법으로 수표를 위조한 뒤 미리 포섭한 은행원에게 이를 제시, 은행으로부터 100억원을 입금받아 편취한 뒤 사채시장에서 이틀 만에 전액을 현금으로 바꾼 대형금융사기”라고 밝혔다.
이어 “범죄로 인한 은행의 피해복구가 희박한 점, 자유시장경쟁의 근간과 공공 신용에 심각한 훼손이 발생해 엄중한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판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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