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일반

송파 장애인 형제 동반 자살사건

형제의 마지막은 이승에서의 삶처럼 외롭고 쓸쓸했다.

2012년 2월2일 오후 7시10분쯤 서울 송파구 오금동에 있는 ㅎ아파트에서 형제가 자살하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다.

이 아파트 13층에 사는 신성재씨(가명·46)가 정신지체장애(2급)를 앓고 있던 동생 영재씨(가명·45)와 함께 투신해 목숨을 끊었다. 이날은 영하 17℃를 오르내릴 정도로 몹시 추운 날씨였다.

형제는 아파트 한쪽에 있는 작은 화단으로 몸을 던졌다. ‘쿵’ 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이를 목격한 사람도 없었다. 지나가던 주민이 발견했을 때는 이미 숨이 멎은 뒤였다. 발견 당시 형제의 시신은 바닥에 엎드린 모습이었다.

최초 목격자와 아파트 경비원은 급히 112에 신고했고, 곧이어 경찰과 구급차가 도착했다. 형제는 그렇게 삶을 버렸다. 지병을 완쾌하고 행복하게 살자던 형제의 꿈도 산산조각이 났다. 형제의 시신은 인근에 있는 경찰병원 영안실로 옮겨졌다. 경찰은 집에서 유서가 발견되는 등 타살 혐의점이 없어 자살로 결론지었다.

죽음의 뒤안길도 형제의 아픈 삶을 위로하지 못했다. 시신은 2월4일 유족에게 인계됐으나 빈소는 차리지 않았다. 경찰병원 관계자는 “여기는 다른 곳에 비해 (장례비가) 싼 편이다. 그런데도 빈소를 차리지 않은 것은 경제적 이유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신씨 형제의 자살 소식을 듣고 경찰병원을 찾은 김기정 주거권 실현을 위한 국민연합 대표는 “사고가 난 지 이틀 후에 찾아갔는데 유족이 빈소를 준비하지 않고 시신은 안치실에 놓아뒀다. 그래서 조의를 표할 방법이 없어 돌아왔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신씨 형제는 왜 자살을 선택했고, 누가 형제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것일까. 필자는 이들이 투신한 지 닷새 후인 2월7일 오후 ㅎ아파트를 찾아갔다. 아파트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평온했고,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고요했다.

그런데 주민들은 신씨 형제의 이야기만 물어보면 하나같이 조심스러워했다. 보통의 경우 살인이나 자살 사건 등이 일어나면 아파트 값이 떨어지는 것을 우려해 말하는 것을 꺼린다. 신씨 형제를 기억하는 주민도 별로 없었다. 아파트 주민들과의 교류도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인근의 슈퍼마켓 주인도 “잘 모르겠다”며 더는 말하지 않았다. ㅎ아파트 관리실 직원은 “(신씨 형제를) 우리도 본 적이 없다. 사건이 난 후에야 사진을 보았는데 낯선 얼굴이었다. 그리고 유족(큰형)이 더는 언론에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마라’고 신신당부했다”며 말을 꺼렸다.

하지만 여러 사람의 말을 종합하면 형 성재씨는 180cm 정도로 건장한 체구를 가졌다. 반면 동생 영재씨는 160cm 정도로 왜소했다. 이런 동생의 손을 형은 꼭 붙잡고 다녔다고 한다. 두 사람의 표정도 밝은 편인 것으로 기억했다.

신씨 형제가 살던 ᄒ아파트는 서민형 임대주택이다. 주민의 70%는 65세 이상의 노인이거나 장애인들이다. 형제는 이 아파트 13층에 있는 13평짜리 집에서 월세로 살았다. 관리사무소 직원에 따르면 “우리 아파트는 1996년에 완공돼 이듬해인 1997년부터 분양했다. 형제가 살던 곳은 보증금 841만원에 월세 8만7000천원이다. 명의는 동생 영재씨 이름으로 돼 있었다”고 말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13층 복도는 몹시 길고 추웠다. 복도식 구조였지만 창문이 없어 아래를 보니 아찔하게 느껴졌다. 한눈에 봐도 위험하게 보였다. 일년 전에는 다른 아파트에 사는 여성이 이곳에서 투신 자살한 적도 있었다. 주민들은 “창문이 없어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든다”며 창문 설치를 요구했으나, “여름에 환기가 안 된다”는 일부 주민의 반대에 밀려 성사되지 못했다.

신씨 형제는 13층 복도 끝 비상구에서 몸을 던졌다. 비상계단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형제가 떨어진 화단이 금방 눈에 띄었다. 그곳에는 떨어지는 사람을 막아줄 만한 나무나 풀도 없었다.

주황색 폴리스 라인 안에는 핏자국을 가려놓은 나무 판자와 그 위를 덮었던 것으로 보이는 파란 비닐이 겨울바람에 날려 앙상한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다. 내려가서 나무 판자를 들추자 붉게 응고된 핏덩이가 보였다. 바로 옆에는 형제 중 한 명의 것으로 보이는 끊어진 허리띠와 구두 한 짝이 주인을 잃은 채 나뒹굴고 있었다.

형제가 살던 집 안이 궁금했다. 다시 올라가 살짝 문을 열어봤으나, 굳게 잠긴 채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파트 관리실에 따르면 아직 짐은 그대로 있다고 한다. 유족이 경황이 없다 보니 정리를 못한 듯했다.

관리실 직원은 “사고 다음 날 오전 10시쯤에 집을 찾아갔다. 현관문이 열려 있었고, 집 안은 더럽지도, 그렇다고 깨끗하지도 않았다. 가구는 많지 않았지만 집 안 분위기는 상당히 어두웠다. 신발장에 있는 열쇠로 문을 잠갔다”고 말했다.

나중에 알려졌지만 거실 한쪽에는 500~1000원짜리 동화책 100여 권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고 한다. 성재씨가 동생을 위해 지하철문고에서 사온 것들이다. 1층 우편물 수취함에는 그 흔한 광고 인쇄물 하나 들어 있지 않았다.

신씨 형제는 지독한 가난 속에서 불우하게 성장했다. 부모는 슬하에 3남1녀를 뒀지만 성재씨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막내인 영재씨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어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웠다. 그러자 친척들은 영재씨를 장애인 시설에 보내려고 했다. 그것을 성재씨가 반대했다고 한다. 그는 “내가 동생을 끝까지 책임지겠다”며 자신의 품에 두었다. 그때부터 형의 시계는 오로지 동생에게 맞춰져 있었다.

동생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포기해야만 했다. 학업, 가정, 개인 생활 등은 꿈도 꾸지 못했다. 오로지 동생의 병을 낫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살았다.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일용직 등을 전전하며 온갖 일을 다 했다. 1.5t짜리 트럭은 성재씨의 생계를 지탱하는 살림 도구이자 동생을 태우는 애마였다.

위로는 형과 누나가 있었지만 형편이 그리 녹록지 않아 손을 벌릴 수가 없었다. 성재씨는 동생 영재씨에게 형이자 부모였고 또 유일한 친구였다. 그런 동생을 치료하기 위해 형은 밤낮으로 일했다. 먹이고 입히고 치료하는 일은 오로지 형의 몫이었다.

둘은 한동안 떨어져서 살았다. 성재씨는 경기도 성남에서 지냈고, 영재씨는 오금동 ㅎ아파트에서 혼자 살았다. 형은 성남에서 지내며 건설 공사장과 일용직을 전전했다.

안정적인 수입을 위해 중장비(굴착기·지게차 운전) 자격증을 취득했지만 건설 경기가 나빠지면서 그마저도 쓸 일이 별로 없었다. 일감이 뚝 끊기자 이번에는 인력 시장을 돌아다니며 일거리를 찾았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갔다.

성재씨는 하루가 멀다 하고 동생을 지극 정성으로 돌봤다. 죽기 2~3일 전에는 주소지를 아예 ㅎ아파트로 옮기고 동생과 함께 살았다. 갑자기 주소지를 옮긴 것을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일감이 떨어지고 생활이 어려워진 탓으로 보인다. 영재씨의 집에는 누나가 들러 반찬도 해오는 등 가끔 왕래를 했다고 한다.

동생 영재씨는 병원과 취업센터를 오가며 지냈다. 입원 치료가 아닌 통원 치료를 선택했기 때문에 정기적인 치료를 받고 약도 타 갔다.

오금동 주민센터 직원은 “동생은 정신장애였고, 신체장애는 아니었다. 약물 치료를 꾸준히 하면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생활도 가능했다. 정기적으로 정신병원에서 약을 타 갔다. 출퇴근하듯이 성남에 있는 취업지원센터를 다녔다”고 전했다.

동생 영재씨는 제빵사가 되겠다는 꿈도 꿨다. 이를 위해 1월부터는 은평구에 있는 취업 관련 기관에서 제빵 기술을 배우며 일을 했다.

죽기 전까지 한 달 반을 일했고, 적은 금액이지만 급여도 받았다고 한다. 이 일을 하던 중에 사망한 것이다. 주민센터 직원은 “제빵 기술을 같이 배우는 사람들은 영재씨와 같이 장애로 인해 사회 적응이 필요한 사람들”이라고 귀띔했다.

동생 영재씨는 기초생활수급대상자로 분류돼 연금 등을 포함해 한 달에 약 58만원을 지원받았다. 한 달 병원비가 30만원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5만~6만원 정도였다고 한다.

오금동 주민센터에는 형인 성재씨가 왔기 때문에 동생 영재씨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민센터 직원은 “1월에는 문화 바우처를 신청했고, 찾아가라고 연락해놓은 상태였다”고 말했다. ‘문화 바우처’는 5만원 상당의 카드로 공연이나 영화 등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게 한 것이다.

신씨 형제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왔다. 형제 간의 우애도 깊었다. 그런데 갑자기 ‘동반 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왜 그랬을까. 주민센터 직원의 말을 듣고서야 죽음의 실마리가 풀렸다. 그는 “유족이 말하기를 건강하던 성재씨에게 정신질환이 발병했다. 얼마 전 친척이 갑자기 사망했는데, 정신적인 충격을 받고 많이 힘들어했다”고 전했다.

성재씨는 자신에게도 동생과 같은 정신질환이 발병하자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다 생활고까지 겹치면서 더는 동생을 돌볼 수 없다는 절망에 빠졌을 것이다. 그리고는 ‘희망의 끈’도 동시에 놓을 생각을 한 것 같다.

신씨 형제가 살던 아파트에서는 ‘더 이상 동생을 돌보기가 힘들다. 살고 싶지 않다. 내가 없으면 동생을 보살필 사람이 없어 함께 떠난다’는 내용의 유서가 발견됐다. 성재씨의 통장에는 3년 전부터 잔액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오금동 주민센터 직원은 “아무래도 장애가 있는 동생의 실질적 보호자로서 평생 돌봐야 한다는 정신적 부담감이 컸던 것 같다. 동생이 혼자 거동을 못하는 사람은 아니라서 육체적으로 힘든 것보다는 정신적인 부담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신씨 형제는 불우한 환경에서도 꺾일 줄 모르는 형제애를 보였다. 하지만 살인적인 가난의 굴레를 끊지 못하고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 시대의 또 다른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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