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독립운동가 20년간 추적한 김세걸 선생
2015년 1월쯤 애국지사 김진성 선생의 장남 세걸씨를 만났다.
김진성 선생은 18살의 나이에 만주지역 독립군 체포에 앞장선 일본 밀정을 처단했다. 1934년 일제 경찰에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1948년 광복 때까지 악명높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꼬박 11년의 옥고를 치렀다.
그후 중국 심양에 머물다 한국전쟁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1961년 타계했다. 당시 한중사이에는 국교가 없어서 선생은 물론 자손들도 한국에 들어올 수 없었다.
중국에서 태어난 김세걸씨는 중국 최고 명문대인 북경대학교 의대를 나와 1970년부터 중국인민해방군 육군 병원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1988년 어느 날 김씨는 심양의 한 노래방에 갔다가 반주 화면에 나온 국립서울현중원 애국지사 묘역 영상에서 부친 이름과 같은 ‘김진성’이라는 묘비를 발견한다. 김씨는 국가보훈처에 팩스를 보내 확인을 요청했고, “부친과 성함이 같은 동명이인”이라는 답변을 받았다.
그는 뭔가 석연치 않다고 판단하고 한중수교가 이뤄진 이듬해인 1993년 직접 한국에 와서 문제의 묘소를 확인했다. 더욱이 묘비에 적힌 이력을 보고 깜짝 놀란다. 부친과 생몰연대만 다를 뿐 공적과 활동내용이 거의 같았기 때문이다. 김씨는 가짜 김진성이 부친의 공적을 가로채 ‘진짜’로 둔갑해 있다고 판단했다.
대개 가짜는 호적을 위변조한 후 실제 인물과 똑같거나 혹은 비슷하게 만든 후 여기에 애국지사의 항일투쟁 공적을 가로채 독립유공자로 둔갑하는데, 가짜 김진성도 이와 비슷한 수법을 사용했다. 중국이나 북한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의 기록이나 후손들을 확인할 방법이 없는 것을 악용한 것이다.
김세걸씨는 부친의 독립운동 증거자료를 모아 보훈처에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서를 제출하면서 애국지사 묘역에 있는 김진성은 가짜라고 알렸다. 그러나 보훈처는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았다. 근거자료까지 만들어줬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씨는 김진성이 가짜라는 추가 증거들을 직접 찾아나섰고, 공훈이 조작됐으니 서훈 취소 등의 조치를 하라고 요청했다. 관계기관에 민원도 계속해서 제기했다. 정부는 1995년이 돼서야 가짜 김진성의 서훈을 취소했다.
중국에 있던 김씨 가족은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이를 위해 1996년부터 노모와 5형제, 여기에 딸린 식구 16명은 순차적으로 영구 귀국한다. 김세걸씨는 한국 국적 취득을 위해 군병원 주임의사(대령)로 복무하다 연금 등 모든 혜택을 버리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가짜 김진성의 묘는 서훈이 취소된 이후에도 약 3년동안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묻혀 있었다. 현행 국립묘지법상 유족의 동의없이는 파묘나 강제이장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1998년에서야 김진성의 파묘가 이뤄졌다. 진짜 김진성 선생에게는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고, 유해는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부친의 묘가 현충원에 안장된 후 우연히 애국지사 묘역에 있던 김정수의 묘비 뒤를 봤더니 ‘가짜 김진성’의 조카들이 아들로 올라가 있었다. 이를 토대로 보면 가짜 김진성(1913년)이 김정수(1909년)의 동생이었던 것이다. 김씨는 여기에 의문을 품고 이들의 관계를 확인해나갔다.
국가유공자 공훈록에 올라있는 김정수의 공적을 봤더니 ‘정범’이라는 이명으로 활동했다고 나와 있었다. 김씨는 김정수가 김정범 선생의 공훈을 가로챘다고 확신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가짜 김진성과 김정수 뿐만 아니라 김정수의 할아버지 김낙용(1860~1905), 아버지 김관보(1882~1924), 큰아버지 김병식(1880~미상) 등 일가 3대 5명이 독립운동가 공훈록에 올라 있었는데, 이들 모두 가짜일 가능성이 높았다. 일가가 조직적인 신분세탁을 통해 독립운동가로 둔갑했던 것이다. 대한민국 최초로 국가를 상대로 한 ‘가짜 독립운동가 가족’의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김세걸씨는 이런 사실을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판단하고, 보훈처에 민원을 넣거나 담당자에게 전화해서 ‘김정수’가 가짜라는 꾸준히 의혹을 제기하며 조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보훈처는 그때마다 ‘검토 중’이라며 오히려 짜증을 내거나 무시로 일관했다.
혼자 힘으로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김씨는 언론사에 제보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필자와 만났던 것이다.
나는 김씨를 적극 도와 여론화를 시켜 나갔다. 먼저 시사저널 제1350호(2015년 8월27일자)에 김정수 뿐 아니라 김씨 일가족을 고발하는 기사를 1차로 보도했다. 필자는 당시 시사저널 객원기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김세걸씨 등과 함께 수차례 현충원 김정수 묘소에서 ‘가짜 독립운동가의 파묘’를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SNS를 통해서도 여론화와 이슈화를 시켜나갔다. 나는 계속해서 보훈처에 전화를 걸어 진행상황을 파악하고, 압박해나갔다.

그러다 2017년 8월 담당자와 통화하면서 “김정수와 일가족에 대한 서훈 취소 절차를 밟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와 관련해 <시사저널>제1453호(2017년 8월22일자)에 단독보도를 내보냈다. 김정수 일가와 관련한 2차 보도였다.
그리고 2018년 8월15일 정부는 대통령령으로 가짜 독립운동가인 김정수, 김낙용, 김관보, 김병식의 서훈을 모두 취소했다. 이런 사실은 8월27일 관보에 게제했다. 김세걸 선생이 최초 문제를 제기한 지 20년 만이었다.

김씨는 필자에게 “너무 힘든 세월이었다. 가짜 독립운동가를 직접 조사해 알려줬는데도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러 바로잡혀야 하는 현실이 통탄스럽다”며 보훈처를 질타했다. 이후 많은 언론에서 김세걸 선생의 사연을 보도했다. 이것으로나마 혼자 고군분투하며 외롭게 싸웠던 세월에 대해 조금이나마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오랜 숙원사업을 끝낸 김세걸 선생은 가족과 편히 살고 싶어했다. 그러면서 여러 사회활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독립운동가 후손들과 교류했으며,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여유를 즐기면서 취미로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생활은 얼마가지 못했다. 2020년 5월8일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만다. 향년 72세. 안타까운 것은 필자도 고인의 비보를 뒤늦게 접하면서 빈소를 찾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여담이지만 2017년 어느 날 저녁 김세걸 선생에게 전화가 왔다. 대뜸 집에서 가까운 지하철역을 물어보시더니 “노트북 화면을 오래 보고 있으면 눈 건강에 아주 안 좋다”며 “우리 집에 PC 모니터가 두 대 있다. 하나는 쓰지 않고 있는데 정기자 갖다 줄테니 썼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다음날 오전 모니터를 직접 들고 오셨다. 지금도 그 모니터를 쓰고 있는데, 이걸 갖고 오셨을 때의 김세걸 선생 모습이 눈에 선하다. 다시 한 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