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사건

고려시대 최초 무신정변 ‘김훈·최질의 난’ 막전막후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세운 나라인 고려(936~1392)는 474년간 한반도를 지배했다. 이중 100년은 무신정권이 들어선 무인(군인)시대였다.

제18대 왕인 의종은 향락에 빠져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권력은 문신 귀족들이 좌지우지 했다. 문신만이 귀족이 되어 정치권력을 독차지하고, 심지어 군대를 지휘·통수하는 병마권까지 장악했다. 무신은 귀족정권을 보호하는 호위병으로 전락해 있었다.

그러면서 무신들에 대한 차별은 극심했고, 1170년(의종 24년) 8월 의종의 보현원 행차를 계기로 정변이 일어난다. 이후 고려 왕은 실권이 없는 상징성만 있는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그런데 고려 최초의 무신정변은 이에 앞서 156년 전인 제8대 왕 현종 5년(1014년) 11월에 발생한다. 이른바 ‘김훈·최질의 난’이다. 당시는 거란의 3차 침입을 앞둔 때였다.

상장군 김훈과 최질은 1010년에 벌인 제2차 여요전쟁 때 전공을 세워 중앙군의 최고 지휘관인 상장군에 오른다.

김훈은 당시 좌우기의 장군으로 완항령 전투에서 공을 세워 상장군이 됐다. 중랑장이던 최질은 통주(지금의 평안북도 선천)를 지켜내는 데 큰 공을 세워 장군을 거쳐 상장군에 올랐다.

KBS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에서 김훈과 최질.

하지만 이들은 군의 요직을 문신들이 차지하고 문관직을 얻지 못하자 불만이 쌓인다. 고려는 무관들이 종2품 이상으로 승품하는 게 불가능했다.

여기에 계속된 전란으로 나라 재정이 궁핍해지자 중추원사 장연우와 중추원 일직 황보유의가 현종에게 건의해 중앙군인 경군(京軍)의 ‘영업전'(고려시대 양반,서리,군인 등에게 지급했던 토지)을 거두어 녹봉(전시과)에 충당하게 한다. 그러자 무관들은 “우리는 뭘 먹고 사느냐”며 불만이 최고조에 이른다.

결국 김훈과 최질은 박성, 이협, 이상, 이섬, 석방현, 최가정, 공문, 임맹 등과 반란을 일으켜 궁궐에 난입한다. 군사들은 장연우와 황보유의를 포박해 채찍질하며 초주검을 만들었다.

김훈과 최질은 편전으로 들어가 현종에게 거란과의 전공이 높은데도 상을 받기는커녕 영업전을 빼앗긴 억울함을 호소하며 무신도 공이 높으면 문신처럼 높은 품계를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목청을 높였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추가적인 요구사항도 제시한다.

먼저 장연우와 황보유의를 유배보내라고 겁박하자 현종은 마지못해 따랐다. 이들은 또 상참관(편전에서 국왕을 배알하는 조회에 참석할 수 있는 대신) 이상의 무관(6품 이상)은 문관을 겸하게 해달라며 현종에게 요구해 허락받았다. 어사대와 삼사를 각각 금오대와 도정서로 바꿔달라고해 뜻대로 됐다. 그렇게 모든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KBS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의 한 장면.

그러나 이들이 방심한 사이 화주 방어사를 지내고 개경으로 돌아온 이자림은 현종에게 한가지 계책을 제안한다. 그는 중추원 일직인 김맹에게 “왕께서는 어찌 ‘운몽지유'(雲夢之遊)를 본받지 않으시는가”라고 넌즈시 말한다.

중국 전한 고조 때 항우를 공격하여 공이 컸던 무인 한신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돌자 진평이 한신을 운몽 지방으로 유인하여 다른 무사들을 시켜 죽이게 하도록 고조에게 계책을 올린 고사다. ‘운몽의 연회’라고도 한다.

김맹은 이것을 현종에게 전했고, 현종이 이를 받아들인다. 현종은 이자림을 서경유수판관으로 제수하고 무신들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한다.

1015년 3월3일 이자림은 준비를 끝마치고 현종에게 은밀히 아뢰었다. 현종은 김훈과 최질에게 “거란이 압록강 남단에 전진기지를 짓고 상시 대치하기 시작했으므로 우리도 서경에 가서 전방을 예의 주시하자”며 서경으로 행차한다.

3월14일 현종은 무신들을 위로한다며 서경의 장락궁에서 잔치를 베풀고, 반란의 주역인 무관들을 모두 모이게 했다. 무관들이 술에 취하자 이자림은 준비한 군사들을 투입해 김훈과 최질 등 19명의 장군들을 주살한다. 이렇게해서 김훈·최질의 무신정변은 약 4개월 천하로 끝이 난다.

고려사에는 김훈·최질의 난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현종은 유배갔던 장연우와 황보유의를 불러들여 각각 호부상서와 급사중으로 임명한다. 또한 무관들이 만든 관호를 없애는 대신 공이 있는 군사 1만2500명에게는 관급을 높이고 포상했다.

정변 진압의 1등 공신인 이자림은 현종의 신임을 받아 승승장구한다. 그는 이름을 ‘이가도’로 개명했다. 중추원 부사를 거쳐 내사문화성의 서열 3위 직위인 참지정사에 올랐다. 개경의 나성 축조를 총괄해 마무리했다.

장녀가 현종의 후궁인(8비) 원질귀비가 됐다. 덕종이 즉위하자 차녀가 왕과 결혼하면서 국왕의 장인이 된다.

벼슬은 문화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내사문화성 2인자)에 올랐으며 사후에는 태사와 중서령을 추증받았다. 아울러 현종의 묘정에 배향된 ‘배향공신’이 됐다. 나라에 큰 공이 있거나 이름을 떨친 공신들을 왕실의 사당인 종묘에 모셔놓는 것으로 고려와 조선시대에 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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