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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복서 김득구 선수 사망사건


그는 불꽃처럼 살다간 파이터다.

1956년 8월10일 전북 옥구군 옥산면 당봉리에서 아버지 이동석, 어머니 양선녀씨의 4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름은 ‘이덕구’로 지었다. 2살 때 아버지가 타계했다. 1967년 어머니가 강원도 고성의 김호열씨에게 재가해 그의 호적에 올리면서 ‘김득구’로 개명한다.

이로 인해 그의 출생일자와 출생지가 다소 복잡하다.

호적상으로는 1955년 1월 전북 군산에서 태어난 것으로 돼 있지만, 묘비문에는 1956년 8월10일 강원도 고성 출생으로 돼 있다.

그의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하루하루 어렵게 입에 풀칠만 할 정도였다. 김득구는 거진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대신 속초에 있는 과자공장에서 돈을 벌었다.

첫 월급을 손에 쥐자 서점으로 달려가 고입 검정고시 교재를 샀다. 그에게는 3명의 이복형이 있었는데 잦은 갈등이 생겼다. 배고픔에 찌들고 눈칫밥까지 먹고 앞길도 캄캄했던 그는 15세 때인 1972년 초여름 가출해 무작정 상경한다.

김득구는 버스 안에서 책을 파는 외판원을 시작으로 구두닦이, 중국집 배달원, 도너스 공장 등 20여 곳을 전전했다.

그러던 1976년 8월 운명적인 동아체육관 광고를 본다. “권투관원 모집, 꿈이 있는 자여 오라.” 김득구의 가슴은 들끓었다. 그는 곧바로 체육관을 찾아가 김현치 관장을 만난 후 권투에 입문했다.


당시 한국 프로복싱은 동아체육관과 극동프로모션이 양대 산맥을 이루며 국내 프로복싱 시장을 주도했다. 동아체육관에는 박종팔, 황준석, 유명우, 김환진 등이 몸 담고 있었다.

김득구는 배움에 대한 열망을 잃지 않았다. 그는 특유의 성실함과 끈질긴 집념으로 중학교 과정 검정고시에도 합격했다.

1977년 3월, 김득구는 복싱에 입문한 지 7개월 만에 서울 신인대회에 출전했다. 그는 뛰어난 기량을 선보이며 웰터급에서 4연승(2KO)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천호상고 복싱부에서 스카웃 제의가 오자 이를 받아들이고 입학한다.

당시 이 학교는 전수학교라는 이름의 특수학교로 이후 세 번(1983년 위례상고, 1999년 위례정보산업고, 2007년 동산정보산업고)에 걸쳐 교명이 변경됐다.

김득구는 1978년 제2회 김명복배 학생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후 그해 12월 프로로 전향한다. 이어 승승장구했다. 1980년 여름 필리핀으로 건너가 라이트급 동양 1위인 토니 로르제스를 상대로 9라운드에 KO승을 거둔다. 같은 해 12월 국가대표 출신의 이필구에게 판정승을 거두면서 한국 라이트급 정상에 올랐다.


1981년 12월에는 일본의 오꾸보 가스히로를 3회 KO로 꺾었다. 1982년 2월 OPBF(동양·대평양권투연맹) 동양 챔피언 전에서 국가대표 출신의 김광민을 판정으로 누르고 동양 라이트급 챔피언이 됐다.

경기 전에는 김득구를 ‘절대 열세’로 평가했으나 ‘땡’ 경기 시작종이 울리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그는 치고 빠지는 전법을 구사하며 9회에는 한 차례 다운을 빼앗으며 일방적인 판정승을 거뒀다.

이 경기 후 WBA는 김득구를 세계 랭킹 1위로 정한다. 이후 그는 두 차례의 방어전을 치르고 꿈에 그리던 라이트급 세계챔피언 도전 자격을 얻는다.

사각의 링에서 투혼을 불사르던 김득구에게도 사랑이 찾아온다. 한 여성을 운명적으로 만나 집요하게 구애했다. 결국 21살의 이아무개씨는 김득구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1982년 6월5일 약혼식을 올린다.

그해 김득구는 WBA라이트급 세계챔피언 미국의 레이 맨시니(21)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운명의 대전을 앞둔 김득구는 강도 높은 트레이닝에 들어간다.

2평 남짓 조그만 자취방에 ‘가난은 나의 스승이다’라는 문구를 써 놓고 독하게 마음먹고 훈련에 매진했다. 하루에 남산 순환도로를 14km 뛰었고, 해머로 타이치기를 100회 이상하고, 턱 강도를 높이기 위해서 입으로 10kg 바벨 들기를 쉼 없이 했다. 출국 전까지 150라운드의 실전과 같은 스파링까지 마쳤다.

그는 김포공항을 떠나던 날 가진 인터뷰에서 “패하면 링에서 살아서 내려오지 않겠다”는 비장한 말을 남겼다. 그는 목숨 걸고 타이틀을 빼앗아 오겠다는 의지의 표시로 성냥갑으로 만든 ‘모형 관’을 가지고 태평양을 건넜다.

드디어 11월14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 호텔 특설 링에서 WBA라이트급 세계타이틀매치가 열렸다. 챔피언 맨시니는 24승(19KO) 1패, 도전자 김득구는 17승(8KO) 1무 1패의 전적이었다.


당시 도박사들은 맨시니의 압도적인 우세를 예상했다. 경기는 맨시니의 일방적인 우세 속에 싱겁게 끝날 것으로 짐작됐다. 그러나 김득구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회전 공이 울리자 김득구는 맨시니의 공격을 맞받아치며 몰아치기 시작했다.

예상외의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지자 8천의 관중들은 열광했다.

9회까지 김득구가 승기를 잡는듯 싶었으나 10회부터 균형이 깨졌다. 맨시니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면서 엉겨 붙자 김득구는 상대 뒤통수를 가볍게 쳤고 주심은 반칙을 선언했다.

주심의 어이없는 파올 선언 후 김득구는 자신의 페이스를 잃기 시작했다. 여기에 맨시니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김득구는 주춤거렸다.

결국 기력을 소진한 김득구는 14회 19초에 터진 맨시니의 회심의 라이트에 무너졌다. 다리 힘이 완전히 풀린 그는 링에 눕기 직전 로프를 붙들고 안간힘을 썼지만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키 169cm의 작은 거인은 그렇게 링에 쓰러졌다.

더 이상의 진행이 어렵다고 판단한 주심은 경기를 중단하고 맨시지의 KO승을 선언했다.

이때까지 정신력으로 버티던 김득구는 KO패가 선언되자 바로 의식을 잃고 라스베이가스 대저투스프링 주립병원으로 옮겨져 뇌출혈에 대한 처치와 혈전 제거를 위해 두 시간 반에 걸친 뇌 수술을 받았으나 결국 뇌사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이후 병상에서 4일간의 사투가 이어졌지만 더 이상의 가망이 없었다. 인공호흡기를 떼어내는 데 가족 동의가 필요하게 되자 그의 어머니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김득구는 심장과 신장을 미국인에게 주고 이국땅에서 세상과 작별했다. 그의 나이 26세였다.


가난으로 배우지 못한 한을 두 주먹으로 풀려고 했던 복서. 챔피언 벨트를 매고 금의환향 하려던 그의 야망도 끝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김득구의 장례는 국내에서 권투인장으로 치러지고 체육훈장(백마장)이 추서됐다. 비운의 복서 김득구는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반암리에 묻혔다. 김득구 생애 통산전적 20전 17승(8KO) 1무 2패.

그의 죽음은 한국 프로복서의 투혼의 상징으로 세계프로복싱사에 값진 이름을 남겼다. 그는 비록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산화했지만 복싱계의 문제를 드러내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김득구가 링에서 죽음을 맞은 후 세계 복싱계와 스포츠계에 큰 충격을 줬다. ‘선수 보호’에 대한 거센 논쟁이 일었다. 미국 하원에서는 복싱의 안전을 위하여 청문회까지 열렸다.

세계 복싱 양대기구인 WBA와 WBC는 15라운드 경기를 12라운드로 줄였고, 매 라운드 후 휴식시간을 60초에서 90초로 늘렸다. 아울러 스탠딩다운제를 도입해 선수보호에 대한 자구책을 마련했다.

레이 맨시니.

비극은 계속 이어졌다.

당시 주심을 맡은 리처드 그린은 선수가 위험한 상태인데도 계속 시합을 강행시킨 끝에 김득구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7개월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득구의 어머니도 “내가 가난해서 아들이 복싱을 시작했다. 결국 내가 아들을 죽인 것이다”라고 쓴 유서를 남긴 채 농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김득구가 사망했을 때 약혼자 이씨는 임신 3개월이었다. 1983년 6월에 유복자 김지완이 출생했다. 아들 김씨는 치대를 나와 치과의사가 됐다.

강타자 레이 맨시니는 김득구와의 시합 이후로 자책감에 빠져 슬럼프에 빠졌고, 1992년 링에서 은퇴했다. 이후에는 영화배우로 데뷔했고, 현재는 영화제작자로 활동하고 있다.

맨시니는 평생 김득구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김득구를 소재로 한 영화 ‘챔피언’이 개봉할 당시인 2002년 한국을 찾은 맨시니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득구는 강하고 투지 넘치는 전사였다. 당시 운이 좋아서 승리했을 뿐, 김득구가 죽은 이후 오랫동안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2011년 6월에는 김득구의 유족(약혼자‧아들)과 30년 만에 만나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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