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북한 프룬제 군사대학 출신 쿠데타 사건


프랑스어인 ‘쿠데타'(coup d’etat)는 무력으로 권력을 찬탈한다는 뜻이다.

1851년 12월2일 루이 나폴레옹 3세는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하고 대통령의 임기를 10년으로 연장한 후 이듬해 황제에 올랐다. 이때부터 근대 국가에서 불법과 폭력적 수단으로 권력을 차지할 경우 쿠데타로 정의했다.

소련시절인 1918년 군인이자 혁명가인 미하일 바실레예비치 프룬제의 이름을 딴 ‘미하일 프룬제 군사대학’이 설립된다. 여기에는 동유럽 공산 국가들의 장교들이 유학했고, 북한도 항일투사 자녀 등 출신성분이 좋은 엘리트 장교들을 선별해 보냈다.

북한 유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소련을 비롯한 공산 국가에서 온 유학생들과 ‘사회주의’에 대해 토론할 기회가 많았다. 처음에는 북한 사회주의 우월성에 대해 자랑삼아 얘기했으나 ‘우상화와 개인숭배에 기반을 둔 독재국가’라는 비판을 받는다.

이들은 또 동독, 헝가리, 불가리아 등 동유럽 공산 국가들의 붕괴과정을 지켜보며 ‘김일성식 사회주의’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다. 1991년 김일성이 김정일을 최고사령관에 추대하자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냈다. 봉건시대처럼 자식에게 권력이 세습되는 것에 반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프룬제 유학생들은 북한으로 돌아간 후 끈끈한 유대관계를 맺었다. 정기적인 만남을 가지면서 ‘이너서클’을 형성하고 세력화한다. 그러면서 남한의 하나회와 같은 군내 비밀 사조직이 된다. 유학생 신분 때 받았던 특혜가 사라지면서 처우에 대한 불만도 싹텄다.


급기야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이 붕괴되자 김일성을 일본 천황과 같은 상징적 인물로 세우고 강력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로 뜻을 모은다. 자본주의에 맞서러면 강력한 군대를 육성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를 바탕으로 제2의 한국전쟁을 일으켜 남한을 적화시키려고 했다.

거사는 프룬제 출신인 인민군 부총참모장(상장)인 홍계성이 주도했다. 그는 현재 북한의 2인자로 자리매김한 최룡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매부였다.

김일성의 외가 친척으로 인민무력부 작전국 부국장을 맡고 있던 강영환, 인민무력부 작전부처장 겸 전투훈련국장인 안종호, 평양방어사령부 땅크(땡크)사단장 김일훈 소장도 동참한다. 프룬제 출신의 사단장 5명도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인민군 창군 60주년 행사가 열리는 1992년 4월25일을 디데이로 정했다. 열병식에 동원된 땡크로 주석단에 있는 김일성과 김정일을 제압한 후 쿠데타군이 군과 노동당 등 권력기관을 장악한다는 계획이었다.

거사는 착착 진행되는 듯 했으나 돌발 변수가 생긴다. 열병식 행사계획을 살펴보던 김일성의 고종사촌이자 인민무력부 국장이었던 박기서가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는 인민무력부 행사에 평양방어사령부 탱크가 동원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며 반대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지면서 1차 쿠테다 시도는 허무하게 실패로 돌아간다. 프룬제 유학생들은 땅을 쳤지만 계획의 전면 수정이 불가피했다. 이들은 2차 거사를 위해 기회를 엿봤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기밀이 새어나갔고, 결국 김정일의 귀에까지 들어간다. 김정일은 대노하면서 군내 방첩기관인 인민군 보위국을 통해 반동분자들의 색출을 명령했다. 보위국장인 원응희(중장)는 쿠데타 주동자들을 한곳으로 모이도록 작전을 짠다.


1993년 2월8일 주모자인 홍계성 등에게 인민무력부 8호동 회의실로 모이라는 인민군 총참모장 명의의 지시가 하달된다. 겉으로는 ‘중대회의’를 한다고 했지만 원응희가 판 함정이었다.

회의가 시작되자 완전 무장한 보위국 대원들이 회의장으로 들어왔다. 원응희는 참석자 중 쿠데타 모의에 참여한 간부들의 이름을 한 명씩 호명했다. 이걸 신호로 보위국 대원들이 다가와 훈장과 견장 등을 떼고 수갑을 채워 끌고 나갔다.

이날 쿠데타 주모자 등 70여 명의 지휘관들이 체포됐다. 김정일의 ‘발본색원하라’는 명령에 따라 군부 뿐 아니라 권력기관, 행정기관, 모스크바 내 북한대사관 등 프룬제 유학생 출신들은 모두 조사를 받았다.

1985년까지 5년간의 조사를 거치는 동안 지휘관이나 군관 등 200여 명이 총살됐다.

프룬제와 6군단 사건의 수사를 맡았던 보위국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인민군 보위사령부로 승격되고, 원응희는 초대 보위사령관을 맡아 상장을 건너 뛰고 대장으로 승진했다.

이 사건 이후 지금까지 북한은 해외에 군사 유학생을 보내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평양이 철옹성은 아니다. 평양 내부에서 무너뜨리는 방법도 있다. 친위부대인 호위사령부 등이 반란을 일으켜 김정은을 비롯한 북한 정권 수뇌부들의 신병을 확보하면 상황은 달라진다.■

<저작권자 ⓒ정락인의 사건추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