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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군사반란 주역들의 ‘화려한 휴가’

반란 성공 후 승승장구하며 무소불위 권력 행사
문민정부 때 법의 심판대 올랐으나 줄줄이 사면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살해되자 비상계엄이 선포된다.

계엄법에 의거해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소장)이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았고, 이를 빌미로 군내 비밀 사조직인 ‘하나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신군부가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을 장악했다. 이 과정에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불법 연행해 걸림돌을 제거한다.

신군부는 이듬해인 1980년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통해 헌정을 중단했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주시민들을 무력진압했고, 이 과정에서 수 백명이 사망한다. 또한 최규하 대통령을 압박해 하야시키고 전두환이 대통령에 올라 제5공화국을 출범시키면서 반란을 완성한다.

1980년 9월1일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했다(국사편찬위원회 제공).

전두환은 ‘7년 단임제’를 선언한 후 권력을 지속하기 위해 운명공동체나 다름없는 노태우에게 대통령을 승계한다. 그러나 김영삼 문민정부가 출범한 후인 1995년 전두환과 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 세력들은 12.12 군사반란 및 5.17 내란을 주도한 혐의 등으로 줄줄이 구속된다.

두 전직 대통령과 반란 가담자들은 재판에서 각각 반란수괴죄, 반란가담죄, 살인, 뇌물수수 등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는 듯 했으나 1997년 12월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사면이 실시되면서 반쪽짜리 단죄에 그친다. 그러면서 반란세력들은 호화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12.12 군사반란의 주역들, 이들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군과 정부 요직 거친 후 정계진출

전두환은 재판에서 반란수괴와 뇌물수수 등 13가지 죄목이 유죄로 인정돼 무기징역과 함께 추징금 2205억원을 선고받았다. 전씨는 재임 당시 기업 등에서 약 9500억원을 끌어모은 것으로 파악됐다.

추징금은 이것의 4분의 1에 불과했다. 특별사면으로 자유로운 몸이 되면서 유일한 법적 책임은 추징금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재산을 무기명 채권 등으로 교묘히 숨기면서 추징금을 내놓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전재산이 29만원 밖에 없다”고 말해 국민 분노를 일으켰다. 그러면서 반란 주역들인 측근들과 골프를 치고, 고급 식당에서 자축 오찬을 즐기는 모습이 포착되는 등 호화로운 삶을 이어갔다. 전씨의 손자 우원씨는 연희동 자택 영상을 공개하며 “방 한 개 규모 비밀금고가 있다. 벽에 현금이 가득했다”고 폭로했다.

전두환이 측근들과 파티를 하거나 골프장에서 골프치는 모습을 임한솔 서울 서대문구 의원이 촬영해 공개했다.

전씨는 2021년 8월 악성 혈악암의 일종인 다발성 골수종 확진 판정을 받았고, 약 3개월 후인 11월23일 향년 90세로 사망한다. 죽기 전까지 어떠한 사과나 반성도 없이 생을 마감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환수되지 못한 추징금 867억원은 영원히 추징이 불가능하게 됐다. 다만 전씨의 유해는 유족이 장지를 구하지 못해 현재까지 서울 연희동 자택에 임시 보관돼 있다.

신군부의 2인자였던 노태우 제9보병 사단장(소장)은 반란이 성공한 뒤 전두환의 보안사령관 자리를 이어받았다. 이후 대장으로 진급한 뒤 정계에 진출하며 후계자의 길을 걷는다. 체육부장관,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 내무부장관 등을 거치며 집권당인 민주정의당 대표가 된다.

1987년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고,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후 1988년 2월 제6공화국을 출범시켰다.

대통령 퇴임 후에는 전두환과 마찬가지로 구속기소돼 반란모의참여죄 등으로 징역 17년을 선고받았다. 헌정사상 첫 번째로 구속된 전직 대통령이 됐다.

노태우는 퇴임 이후인 2002년 전립선암이 발병해 수술을 받았고, 이후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됐다. 희소병인 소뇌위축증을 앓으면서 거동조차 불편해졌고, 2004년부터는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죽기 전까지 활발하게 대외활동을 이어갔던 전두환과는 달리 병마와 싸우며 고통스런 나날을 보냈다. 2021년 10월26일 향년 88세로 병상에서 세상을 떠났다. 파주 동화경모공원에 안장된 뒤 윤석열 정권이 들어선 후 국가보존묘지로 지정됐다.

12.12 당시 반란에 참여한 장성들 중 전두환의 선배(중장급)는 세 명이었다. 황영시 제1군단장, 차규헌 수도군단장, 유학성 국방부 군수차관보다. 이중 전두환을 적극 지지했던 황영시 중장은 반란 직후 육군참모차장으로 영전한 뒤 6개월 후 대장으로 진급해 제3군사령관에 올랐다.

이후 육군참모총장을 꿰차며 화려한 군 생활을 마친다. 전역 후에는 감사원장을 맡는 등 영화를 누리다 2022년 4월23일 사망했다.

육사 8기로 5‧16군사정변에도 가담했던 차규헌 중장은 육군사관학교장과 육군 참모차장을 거쳐 대장으로 진급해 제2군사령관을 지냈다. 예편 후에는 비상기획위원장과 교통부장관을 역임했다. 2011년 5월10일 폐렴으로 82세에 세상을 떠났다.

유학성 중장은 군내 요직인 제3군 사령관을 차지했다가 대장으로 진급한 뒤 전역한다. 전두환은 자신이 맡고 있던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유학성에게 물려준다. 그가 재직 시절에 중정이 국가안전기획부로 개명되면서 초대 안기부장을 지냈다.

1982년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의 책임을 지고 안기부장에서 경질되지만 민정당 국회의원으로 12대, 13대, 14대 등 3선 의원이 된다. 1996년 12‧12 군사반란 및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기소돼 재판을 받다가 이듬해인 1997년 사망하면서 공소 기각 판결을 받았다. 이로 인해 반란세력인데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10.26 사태로 중앙정보부장 자리가 공석이 되자 현역 육군 중장인 이희성이 참모차장이 서리를 맡았다. 10.12 군사반란으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이등병으로 강등돼 강제 예편되자 그 뒤를 이어 육군참모총장에 올랐다.

이 총장은 이듬해인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사령관으로서 공식적인 지휘계통에 있었다. 육군 대장으로 예편한 이후에는 방직협회장, 교통부장관, 주택공사(현 한국토지주택공사) 이사장을 지냈고, 2022년 6월6일 향년 97세로 사망했다.


제20보병사단장이던 박준병 소장도 승승장구했다. 육군인사참모부장을 거쳐 노태우의 뒤를 이어 보안사령관으로 영전했다. 대장으로 예편한 뒤에는 정치인으로 변신해 집권 여당인 민정당과 민자당의 사무총장을 맡으며 3선 국회의원이 됐다. 2016년 7월3일 사망했다.

정호용 보병 제50사단장(소장)은 반란 직후 육군특수전사령관에 취임했다. 반란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휘하의 공수부대가 출동하면서 논란이 됐다.
이후 중장과 대장으로 연이어 진급하고 황영시의 뒤를 이어 육군참모총장에 올랐다. 군복을 벗은 후에는 내무부장관을 지내고, 국회의원으로 변신했다.

‘보안사 3인방’ 청와대 입성 후 실세로 군림

특전사 소속이던 박희도 제1공수특전여단장, 최세창 제3공수특전여단장, 장기오 제5공수특전여단장은 12.12 당시 공수특전여단 병력을 동원한 3인방이다. 이들도 군부 요직을 차지하며 승승장구했다.

박희도 준장은 육군참모총장까지 올랐다. 전역 후에는 정계 진출을 시도했으나 좌절됐다. 최근까지 보수단체 고문 등으로 활동하며 적극 목소리를 내고 있다.

최세창 준장은 전두환 정권에서 합참의장을, 노태우 정권에서 국방부장관까지 지냈다. 장기오 준장은 중장으로 전역한 후 총무처장관을 지냈다.

반란 당시 보안사령부에서 전두환을 보좌했던 최측근은 3명이다. 허화평 비서실실장, 허삼수 인사처장, 이학봉 대공수사국장(중령)이다. 이중 두 허씨는 12.12 반란을 기획한 책사로 불린다. 이 처장은 보안사로 연행돼온 정치인과 재야인사 등의 수사를 맡았다.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한 후에는 세 명 모두 청와대로 들어갔다. 화화평과 허삼수는 대령에서 준장으로 진급한 후 각각 청와대 비서실 보좌관과 사정수석을 맡았다. 허화평은 모든 정보를 장악한 명실상부한 최고 실세로 군림하며 비서실장 이상의 권력을 행사했다. 허삼수는 정부의 사정기관협의회 의장을 맡으며 사정기관을 통솔했다.


하지만 두 허씨에게 권력이 집중되자 여기저기서 견제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1982년 5월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이 터지자 두 허씨는 대통령 친인척의 문제를 제기하다 전 대통령의 눈밖에 나면서 권력에서 밀려난다. 결국 미국으로 쫓겨나듯이 떠났고, 귀국후에는 공직을 맡지 않고 정계로 진출해 국회의원이 됐다.

반면 이학봉은 전두환의 신임을 받으며 요직을 맡았다. 장세동이 비서실장에서 안기부장으로 자리를 옮기자 2차장으로 보좌했다. 노태우 정권에서는 정계로 진출해 국회의원이 됐다. 2014년 5월24일 폐암으로 투병하다 향년 76세로 사망한다.

전두환 퇴임 후 공직에서 물러난 장세동은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며 정계 진출을 모색했다.

장세동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장은 자타가 인정하는 전두환의 충복이다. 그는 지휘계통을 무시하고 반란에 가담했으며 직속 상관인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을 체포했다.

반란 이후에는 준장으로 진급해 육군특수전사령부의 제3공수특전여단장을 맡았다. 현역 장군 신분을 유지한 채 대통령 경호실장에 임명됐고, 중장으로 예편한 후에는 안기부장이 된다. 당시 안기부가 펼쳤던 각종 공작의 배후로 지목됐다.

문민정부 때는 안기부장 시절의 범법행위로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이후에는 정계진출을 시도했으나 무산됐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고,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도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장세동과 함께 수도경비사령부 소속으로 33경비단장이던 김진영 대령은 반란 이후 수경사 작전참모,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거친 뒤 수도기계화보병사단장을 맡았다.

노태우 정부에서 대장으로 진급한 후에도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을 거쳐 육군참모총장에 올랐다. 군복을 벗은 후에는 정치활동에 나서지 않고 안보분야와 기독교 군선교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김오랑 중령 사살범의 최후

제9사단 29연대장이던 이필섭 대령은 사단장이던 노태우의 명령을 받고 서울로 병력을 출동시켰다. 그는 노태우 정부에서 대장으로 진급해 합참의장을 지냈다.

반란 당시 청와대 경호실에서는 정동호 대통령 경호실장 직무대리(준장)와 고명승 경호실 작전담당관(대령)이 가담했다. 하나회 멤버인 두 사람은 경호실 병력을 이끌고 최규하 대통령이 머물고 있던 국무총리 공관을 강제로 접수했다.

정동호 준장은 제5군단장, 육군참모차장을 거쳐 한국도로공사 사장을 지냈다. 노태우 정권 때는 지역구 국회의원에 출마해 재선의원이 됐다. 2000년 총선에서는 새천년민주당에서 공천을 받고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조용히 보내다가 2009년 3월26일 사망했다.

고명승 대령은 전두환 정권에서 수도경비사령관, 국군보안사령관 등 요직을 거쳤으며, 대장으로 진급해 제3군사령관에 올랐다. 전역 후에는 정계진출을 노렸으나 번번이 실패한다.

정병주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인 김오랑 중령(추서 계급)과 영화 ‘서울의 봄’의 한 장면.

반란 당시 최세창 제3공수여단장의 명령을 받은 박종규 15대 대대장은 정병주 특수전사령관 체포에 나선다. 이 과정에서 정 사령관은 부상을 입고 부하들에게 체포당한다.

이때 비서실장인 김오랑 소령은 반란군들과 맞서다 사살되는데, 김 소령에게 총격을 가한 인물이 바로 박종규 중령이다. 그는 반란이후 제56보병사단장(소장)을 마지막으로 전역한다. 2010년 12월7일 식도암으로 투병하다 66세로 사망했다.


이처럼 12.12 군사반란 주역들은 하나 같이 승승장구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전역 후에는 정부 요직을 맡거나 정치인으로 변신해 끝까지 영화를 누렸다. 이들에게는 죽음조차 ‘화려한 휴가’로 인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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