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가수 이창용 사망사건
1971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다.
1992년 KBS ‘전국노래자랑’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가수로 데뷔했다.
2004년 1집 앨범 <당신이 최고야>를 발매해 트로트계에 입문했다. 이 곡이 히트를 치면서 대중에게 얼굴을 알렸다. 2005년 2월 2집 <여보>, 2006년 7월 3집 <사랑해 말도 못하는>을 연이어 발표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이창용은 가수 활동하면서 사업을 병행했다.
건강보조식품 회사를 차려 의욕적으로 나섰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 휘청거렸고, 소송에 휘말리면서 발목이 잡혔다.
2007년에는 자신이 대표로 있는 쇼핑몰의 제품을 명품으로 속여 판매했다는 혐의로 피소돼 1년 이상 법적 다툼을 벌였다.
그는 “주부들에게 물건을 강요한 적이 없다. 나를 음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자신을 고소한 주부 등을 무고죄로 맞고소했다.
이후 사업에 실패하면서 혼자 감당하기에는 벅찰 정도로 빚더미에 앉고 말았다. 여기에 방송 활동까지 뜸하면서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됐다.
2009년 3월11일 저녁, 이창용은 동거녀 유아무개씨(32)와 금전문제로 심하게 다퉜다. 감정이 상한 유씨는 집을 나왔다. 다음날 새벽 2시쯤 이창용은 유씨에게 자살을 암시하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깜짝 놀란 유씨는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이 경기도 고양시 마두동 아파트에 출동해보니 현관문이 잠겨 있었다. 경찰은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가 안방 욕실 샤워부스에 넥타이로 목을 매 숨진 이창용을 발견했다.

현관에서 거실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자필 유서 4장과 지갑, 시계가 놓여 있었다. 유서에는 사업에 실패한 자신을 책망하며 “빚이 많아 괴롭다. 부동산 등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돈은 자식들에게 나눠주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자신의 채무, 재산 상태 등도 상세히 기재했다.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과 어머니와 남은 두 아이들의 앞날에 대한 걱정도 담겨 있었다.
경찰은 유족의 요청에 따라 부검은 실시하지 않았다. 또 고인이 유서를 남겼고 타살 흔적이 없는 점을 토대로 자살로 결론 내렸다. 이창용은 이렇게 트로트 가수로서의 꿈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채 38세의 나이에 운명을 달리했다.
고인의 빈소인 일산 백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태진아 등 동료 가수들은 추모화환을 보내 고인을 애도했다. 박상철, 현숙, 인순이, 남진, 진시몬 등은 직접 빈소를 찾았다.
가수 박상철은 가장 먼저 빈소를 찾아 침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갑작스레 동료를 잃어 슬프다”며 “하늘나라에서는 스트레스 받지 않고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가수 현숙은 “정말 착한 후배 가수였는데 믿기지가 않는다”며 눈물을 흘렸다.
이어 “사업이 잘못돼 법정소송에 휘말리면서 좀 힘들어했던 건 알지만 설마 목숨을 끊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며 “창용이는 방실이나 박윤경 등 동료가수들이 쓰러졌을 때 병원비 모금에도 가장 적극적이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인순이는 “실력 있는 가수였다”며 “평소 절친한 사이는 아니었으나 주변 모두가 좋은 사람이라고 평했던 가수”라고 말했다.
가수 남진도 빈소를 찾아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그는 “고인은 가창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판단력이 빠르고 야무진 친구로 정평이 나 있었다”고 전했다.
이창용의 한 지인은 “유명한 트로트 가수는 아니었지만 그 열정만은 그 누구에게도 못지않았다.” 며 “트로트 주 무대에 서지는 못했지만 선배 트로트 가수들에게 호평을 받던 가수 였다”고 회상했다.
고인의 시신은 화장을 거쳐 고향 전주의 한 곳에 유골이 안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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