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럭 충돌로 사망한 ‘비운의 투수’ 해태타이거즈 김대현
프로야구 구단 ‘해태 타이거즈’는 1982년 호남지방을 연고로 창단됐다.
2001년 7월31일까지 19년 동안 9번의 한국시리즈에 올라가서 9번이나 우승한 ‘전설의 구단’이다. 이후 기아자동차가 인수하면서 2001년 8월1일부터는 KIA 타이거즈로 변경됐다.
해태 타이거즈는 수많은 스타들을 배출했지만 그 뒤를 묵묵히 받치고 있던 이름없는 선수들도 상당하다. 이중 한 명이 투수 김대현이다.
1962년 6월16일 전북 전주에서 태어난 김대현은 전주고와 원광대를 거쳐 1986년 해태 타이거즈의 1차 지명(투수)으로 입단한다. 190㎝에 가까운 훤칠한 키와 핸섬한 마스크로 주목받았다.
우완이었던 김대현은 첫해는 동기인 김정수, 차동철, 신동수에 밀려 제대로 된 출전 기회를 갖지 못했다.
다음해인 1987년 정규리그에 출전해 9승5패 3세이브, 방어율 2.78을 기록한다. 그해 열린 OB와의 플레이오프전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인다.
1차전에서 OB는 선발투수로 해태 킬러로 명성을 얻은 최일언을 내보냈고, 해태는 김대현을 투입했다. 예상과 달리 김대현은 7이닝 3실점의 호투로 팀의 11-3 승리를 이끌었다.
두 사람은 4차전에서 또다시 맞붙었지만 이번에도 승리의 여신은 김대현의 손을 들어줬다. 김대현은 선발로 출전해 10이닝 동안 완투했고, 해태는 3-3이던 연장 10회 1사 만루 서정환 타석에서 최일언의 폭투로 끝내기 결승점을 뽑았다.
김대현은 1차전 승리에 이어 4차전에서도 승리를 거두며 2승째를 따냈고, 해태의 KBO 한국시리즈 우승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1988년에는 후기리그 3분의 2를 소화한 시점에서 7승6패3세이브를 기록해 생애 첫 10승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해 8월27일은 경기가 없는 휴식일이었다.
이날 김대현은 다음 경기 출전을 위해 새벽에 자신의 르망 승용차를 타고 광주에서 서울로 이동 중이었다. 조수석에는 팀의 선배이자 세살 위였던 이순철(현 SBS Sports 해설위원)이 동승하고 있었다.
김대현은 이순철에게 ”형님, 잠 좀 주무셔야 되지 않습니까“하며 의자를 뒤로 젖혀 이순철이 편히 잠을 잘 수 있게 해줬다.
오전 7시15분쯤, 경부고속도로 상행선 천안삼거리 휴게소가 보이자 김대현은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그러나 휴게소로 진입하다가 주차중인 8톤 화물차를 들이받는 사고를 낸다. 당시 승용차가 트럭 아래로 들어가면서 차가 크게 부서졌고 김대현은 그 자리에서 사망한다. 향년 26세.
조수석에 타고 있던 이순철은 안전벨트를 맨 상태에서 앞 의자를 뒤로 젖히고 잠을 자고 있어 화를 면했다.
이순철은 훗날 언론 인터뷰에서 ”옆에 있는 후배는 죽었는데 나는 찰과상만 입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정밀진단 결과 신기하리만치 멀쩡했다. 그러나 병원에 머물렀다. 정신적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기뻐할 수 없었던 기적. 그 후유증으로 후반기 몇 경기쯤 결장했던 것 같다“며 사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로써 해태의 기둥 투수로 주목받았던 김대현은 10승의 꿈도 이루지 못한 채 ‘비운의 선수’로 남았다. 통산 80경기에 등판해 16승13패5세이브, 방어율 3.76을 기록했다.
김대현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하고도 구단에서 아무런 보상과 지원을 받지 못했다. 그러자 롯데의 최동원과 삼성의 김시진 등 몇몇 선수들이 중심이 되어 프로야구 선수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선수협 결성을 시도한다.
1988년 9월13일 한국프로야구선수협의회가 설립 총회를 열었으나 구단과의 마찰로 인해 정식 출범하지는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2000년 1월 한국프로야구선수협의회 창립총회가 개최됐으며, 2013년 7월 사단법인화돼 현재의 (사)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가 됐다.
김대현의 죽음이 KBO 리그의 발전과 선수들의 권익보호를 위한 초석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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