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미용사 성폭행 살인사건
부산 북구 화명동에 있는 한 미용실에는 이아무개씨(여·25)가 미용사로 일했다. 평소 밝고 쾌활한 성격인 이씨는 봉사활동에도 적극 나섰으며, 대인관계도 좋아 주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2000년 7월27일 저녁 9시쯤 퇴근한 이씨는 아버지에게 전화해 “친구들하고 술 한 잔하고 늦게 갈게요”라고 말한다. 이어 미용실 앞에서 동료 3명과 택시를 타고 ‘젊음의 거리’로 불리는 덕천동 로터리로 이동했다. 이씨 일행은 건물 2층에 있는 소주방으로 들어가 안주를 시켜 소주 3병을 나눠 마셨다.
이씨와 동료들은 집에 가기 아쉬웠던지 소주방을 나와 근처에 있는 노래방에 들어갔다. 이때가 밤 11시가 좀 안 된 시간이었다. 약 1시간 정도 노래를 부르며 유흥을 즐긴 일행은 자정이 지나 노래방에서 나온다. 28일 0시20분쯤 이씨는 노래방 사거리에서 일행과 헤어져 집 방향으로 걸어갔다.
이씨의 집은 노래방에서 400m 거리에 있었고, 도보로 약 5분 걸리는 가까운 곳이다. 그런데 이날 어찌된 일인지 이씨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동료들과 헤어진 지 13시간 후인 오후 1시20분쯤 강서구 대저1동의 한 농수로에서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된다.

농수로 앞 공장에서 일하던 직원이 여성 시신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는데, 신원확인결과 이씨였다. 그가 발견된 곳은 인가가 드문 공장지대로 농수로 앞은 대부분 논이었다.
좁은 1차선 도로로만 접근이 가능했고, 공장 직원들이 퇴근한 후에는 차들의 통행도 거의 없었다. 해가 뜨기 전까지는 인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더욱이 근처에는 폐쇄회로(CC)TV가 설치되지 않았었다.

시신은 검은색 치마와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지만 속옷과 구두는 현장에서 발견되지 않았다. 이씨는 평소 청바지와 운동화를 즐겨 입고 신었는데 사건 당일에는 치마에 구두를 신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부검결과 사망원인은 경부압박질식사(목졸림)로 나왔다. 목에는 불규칙한 근육의 출혈이 확인되는데 손으로 목을 압박한 흔적이다. 성기 주변에 있는 표피박탈로 강제로 성폭행 당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질 안에서는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정액이 검출됐다.

당시만 해도 DNA 분석력이 지금에 비해 현저히 떨어져 범인의 혈액형이 A형인 것만 확인했다. 국과수는 이씨가 성폭행을 당한 후 목이 졸린 것으로 판단했다.
보통 성폭행 살인사건의 경우 저항흔이 발견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씨의 몸에는 이런 흔적이 없었다. 수면제 등 약물이 발견되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범인이 이씨를 완전히 제압한 상태에서 성폭행을 했다는 것이 된다.
이처럼 이씨가 저항 의지를 완전히 상실한 채 성폭행을 당한 것으로 봤을 때 범인은 한 명이 아닌 2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됐다. 만약 1대1의 관계였다면 범인이 피해자를 제압하기 위해 남긴 폭행 흔적과 피해자가 반항한 흔적이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신은 한쪽 손에 풀을 꼭 쥔 채 딱딱하게 굳어 있었는데, 법의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즉시성 시강’이라고 한다. 보통 사람이 사망하면 근육이 이완되면서 몸이 늘어진 뒤 얼마간의 시간이 경과하고 몸이 굳는데, 이씨는 극도의 긴장 상태로 근육에 힘을 주고 있다가 사망하면서 그대로 빠르게 몸이 굳은 것이다.
경찰은 이씨가 동료들과 헤어진 지점인 노래방 인근에서 목격자를 찾았는데, 다행히 이씨를 본 사람이 있었다. 목격자는 0시30분쯤 이씨 앞에 회색 계통의 승용차 한 대가 멈춰섰고, 차에서 내린 남성과 이씨가 잠시 대화하다가 뒷좌석에 함께 탔다. 운전자를 포함해 차안에는 최소 2~3명의 남성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당시 이씨가 차에 탄 장소는 번화가였던 만큼 인파도 많았고, 이씨가 강제로 차에 태워진 것도 아니었으므로 경찰은 범인이 면식범일 것으로 추정했다. 또 이씨가 직업 특성상 범인만 피해자를 알고 있었던 편면식 관계일 수도 있다고 봤다. 이씨는 기억을 못하지만 범인들이 한두 번 손님으로 왔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이씨의 시신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신발을 신지 않은 이씨의 발바닥이 깨끗한 것을 볼 때 실내에서 살해된 후 옮겨져 유기된 것으로 판단됐다. 시신 또한 도로에서 농수로 쪽으로 굴린 듯한 흔적이 있었다.
이씨의 시신에는 또 하나의 특징적인 단서가 있었다. 몸 오른쪽 팔과 다리에만 남은 직선 형태의 상처가 있었는데, 4~5㎝ 간격으로 반복돼 나타났다.
하수구의 뚜껑으로 사용되는 철제 판 ‘그레이팅’으로 인한 상처와 비슷했다. 피해자가 오른쪽으로 모로 누워있는 상태에서 범인이 이씨의 다리를 잡아끌고 가는 과정에서 그레이팅 위를 지나갔을 것으로 추정됐다.

이에 따라 경찰은 범인이 2~3명의 면식범이며 공장 등 그레이팅이 설치돼 있을 만한 장소에서 생활하고, 농수로 주변 지리를 잘 알고 있을 것으로 보고 주변 인물을 조사했다.
우선 피해자의 몸에서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DNA를 확보함으로써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남성을 추적해나갔다.
가장 먼저 떠오른 용의자는 3명이었다. 피해자의 주변을 맴돌며 관심을 보였던 남성과 단골 손님 중 꼭 피해자에게만 머리를 맡겼던 남성, 나머지 한 명은 헤어진 전 남자친구였다. 경찰은 이들의 유전자를 채취해 피해자의 몸에서 나온 유전자와 대조했지만 불일치했다.
이번에는 동종 전과가 있거나 사건 현장 근처에 살고있는 남성들을 대상으로 DNA를 대조했지만 끝내 유전자가 일치하는 용의자를 찾지 못하면서 사건은 미궁에 빠졌다.
그리고 사건 발생 15년 만인 2015년 어이없는 일이 생긴다. 부산지방경찰청 미제사건 전담팀이 재수사에 나서면서 DNA에 대한 재감정을 의뢰했다. 그 결과 범인의 혈액형이 A형이 아닌 O형으로 밝혀졌다. 처음에는 범인과 피해자의 유전자가 혼합돼 있었지만 2010년 이후에 도입된 기술로 범인의 DNA만 분리할 수 있었다. 그동안 엉뚱한 혈액형으로 수사를 한 것이 됐다.
원래 이 사건은 2015년 7월28일 공소시효가 만료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해 7월31일 시행된 ‘태완이법’이 적용돼 공소시효가 정지됐다. 범인을 잡으면 처벌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범인이 남긴 단서들
1.범인은 2~3명이다.
이씨는 성폭행 당한 뒤 목졸려 살해됐다. 당시 이씨의 혈중 알코올 농도는 0.0117로 약간 취한 상태였다. 혼자 걸어갈 수 있고, 대화가 가능할 정도여서 강제로 성폭행을 당할 때 충분히 저항이 가능했다.
그런데도 시신에서 저항흔이나 폭행흔이 나오지 않았다. 범인이 혼자가 아닌 2명 이상이었다고 볼 수 있는 정황이다. 공범 중 한 명이나 두 명이 이씨가 저항하지 못하게 제압하고 다른 한 명이 범행에 나섰을 수 있다.
목격자의 증언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이씨가 집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승용차 한 대가 접근했고, 그 안에서 한 명이 내려서 대화한 후 이씨가 차에 탔다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차에는 운전자와 차에서 내린 남성 등 최소 2명 이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범행은 우발적이다.
범인들이 이씨를 노리고 계획적으로 범행했다는 정황은 나오지 않았다. 만약 이들이 처음부터 이씨를 노렸다면 이씨의 동선을 따라 미행하고, 1,2차 회식을 하는 동안 주변에 승용차를 주차했어야 한다. 회식도 예정에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회식 장소 주변에서 수상한 남성들이나 수상한 차량을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 또 이씨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은 번화가 대로변이어서 사람들 눈에 잘 띄는 곳으로 범행 장소로는 적합하지 않다.
3.범인은 면식범일 가능성 크다.
경찰은 이씨가 차에서 내린 남성과 대화한 후 자발적으로 승용차에 탄 것으로 볼 때 범인들과 이씨가 아닌 관계, 즉 면식범일 것으로 추정했다.
또 이씨의 직업이 미용사였기 때문에 이씨는 알아보지 못하지만 범인들이 이씨의 미용실에 한 번쯤 들러 한쪽만 알고 있는 ‘편면식’일 가능성도 열어뒀다.
물론 초면인 범인들이 “차에 태워주겠다”고 호의동승을 제안했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 늦은 시간에 모르는 남성이 차에 태워주겠다고 하면 특히 여성 혼자일 때는 더욱 경계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이씨가 거부감없이 차에 탔다는 것은 면식범일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다만 범인들이 면식범이라고 해도 이씨와 가까운 사이는 아니다. 보통 가까운 면식범의 범행은 시신이 발견되면 자신이 용의선상 1순위에 오르기 때문에 시신이 발견되지 않도록 안간힘을 쓴다. 심한 경우 신원을 알 수 있는 얼굴이나 지문 등을 훼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씨를 살해한 범인들은 시신이 발견돼도 상관없다는 듯 길에서 농수로로 밀어 유기했다.
4.범인들은 사건 현장 인근에 있다.
사건 현장 인근은 인가가 드문 공장지대다. 공장 직원들이 퇴근한 후에는 차량과 인적이 드문 적막한 곳이다. 범인들이 평소 이곳을 잘 알고 있거나 지리에 익숙하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범인들이 근처 공장지대에서 일하는 직원들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번화가인 덕천로타리 인근에 있다가 이씨를 발견하고 차량에 태워 자신들이 일하는 곳으로 데려와 범행 후 농수로에 버렸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이씨가 마지막으로 목격된 덕천동 번화가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곳은 5.7km, 승용차를 이용한다면 가까운 거리다.
신발을 신지 않은 이씨 시신의 발바닥이 깨끗한 것과 찰과상의 형태, 그레이팅으로 인한 상처 등으로 볼 때 실내에서 성폭행 후 살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의문은 시신의 한쪽 손에 풀을 꼭 움켜쥐고 있었는데, 시신이 발견된 농수로에 없는 것이었다. 어디에서 이 풀을 잡게 됐는지는 의문이다.
5.초동수사 실패가 미제를 만들었다.
이 사건이 미제가 된 것은 혈액형 오판정으로 인한 초동수사 실패가 원인이다. 범행을 특정할 수 있는 결정적 단서인 DNA(정액)를 확보했지만 정작 그 혈액형이 15년 후에 A형이 아니라 O형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그동안 경찰은 엉뚱한 혈액형을 가지고 범인을 추적했으니 범인을 잡았다면 그것이 더 이상할 정도다. 사건 초기 경찰은 주변인 등 200여명을 대상으로 DNA 대조를 했는데, 당시 A형에 집착해 다른 혈액형은 제외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이 사건의 유일한 단서는 DNA다. 이것과 일치하는 남성이 확보돼야만 범인을 잡고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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