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타잔 박흥숙’ 철거반원 살인사건
박흥숙은 1954년 전남 영광군 불갑면 자비리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어릴적 이름은 ‘박정렬’이다. 그의 부모는 도로변의 허름한 점포를 운영하면서 근근이 생활했으나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가정 형편이 더욱 어려워졌다. 하나 밖에 없던 형도 병으로 일찍 사망했다.
박흥숙은 홀어머니를 모시고 남은 동생들을 잘 돌보는 효자였지만, 가난으로 인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 어머니와 막내 남동생은 절에 가서 수발을 들며 허드렛일로 연명하고, 여동생은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했다.
박흥숙은 가난했지만 공부를 잘해 학업성적은 최우등이었고, 영광중학교를 수석으로 합격했지만 교복 살 돈이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이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다. 광주시내에 가서 철물점 열쇠수리공으로 일을 시작한 그는 공부에 대한 열망을 끊지 않고 주경야독한 끝에 검정고시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
그는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 약자들을 돕기 위해 법관이 되고자 했다. 사법시험 준비를 위해 광주시 동구 운림동 무등산 산자락에 있는 속칭 ‘덕산골’로 들어간다. 이곳에 움막집을 짓고 흩어졌던 가족들을 불러모았다. 당시 무등산 자락 주변에는 20여 가구가 빈민촌을 형성했다. 대부분 흙과 돌로 엉성하게 지어져 겨우 집 형태만 갖추고 있었다.
박흥숙의 어머니는 산중턱에 있는 무당 집에서 수발을 들고 허드렛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어릴적부터 체격이 작고 허약했던 박흥숙은 건강을 위해 집안에 내려오던 무술을 연마한다.

사람들은 그의 몸놀림이 민첩하고 날렵하다고 해서 ‘무등산 타잔’이라고 불렀다. 그는 165cm의 키에 다부진 몸매, 얼굴은 둥근 편이고, 눈썹은 약간 길며 늘상 해군 작업복 상에 검정색 바지를 입고 다녔다.
1972년 5월 무등산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주변 정비작업이 시작된다. 이때부터 무등산에 있던 무허가 움막촌도 정리작업에 들어간다. 구청은 사전 안내를 통해 주민들의 자진철거를 유도했다.
광주시는 77년 10월10일부터 광주에서 개최될 ‘제58회 전국체전’을 앞두고 무등산 일대에 대한 대대적인 정화작업에 나선다.
같은 해 4월20일 오후 3시쯤 광주시 동구청 소속의 오종환(42) 철거반장과 철거반원 6명 등 총 7명이 무등산에 올랐다. 당시 무등산 빈민촌에는 박흥숙(22)의 집을 포함해 8가구가 남아 있었는데, 이들은 마땅히 갈곳이 없는 극빈층의 사람들이었다. 여기서 살던 대부분의 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옮겼지만 이들은 차일피일 철거를 미루며 최후까지 남아 버티고 있었다.
강제철거를 위해 철거반원들이 들이닥치자 주민들의 저항에 부딪힌다. 이들이 움막집에 있던 집기와 가재도구를 밖으로 내던지는 과정에서 주민들과 마찰이 빚어졌다. 박흥숙의 어머니 심금순씨(52)도 철거반원들에게 강하게 항의했다.
박흥숙은 처음에는 철거반원들에게 협조적이었으나, 이들이 심씨를 밀치며 욕을 하고, 움막집에 불을 지르면서 사태가 악화된다. 움막집 안에는 심씨가 무당집에서 일하며 모은 돈이자 전 재산인 30만원이 있었다.

심씨는 집이 불타는 것을 보고 실성해 돈을 꺼내려 달려들었다. 철거반원들이 그녀를 막아서 넘어뜨린다. 이때까지만 해도 박흥숙은 어머니를 말리면서 “위에서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일 뿐”이라며 “저들을 원망하지 말자”고 했다.
그러면서 철거반원들에게 “위쪽 골짜기에 병든 노부부가 살고 있으니 그 집만은 불태우지 말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철거반원들은 박흥숙을 윽박지르면서 그 집을 불태운다. 분노한 박흥숙은 사제총을 꺼내 공포 1발을 쐈다.
총소리에 논란 철거반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박흥숙은 철거반장 오씨를 위협해 달아난 철거반원들을 한 곳으로 모이게 했다. 2명은 달아나고 5명이 모이자 박흥숙은 오종환을 시켜 나일론 끈으로 묶게 했다. 이때 어머니 곁에 있던 여동생(18)이 총소리를 듣고 달려오자 나일론 끈을 주며 나머지를 묶게 한 다음 자신의 공부방으로 파 놓았던 깊이 1m, 직경 3m의 구덩이에 몰아넣었다.
박흥숙은 이들에게 “집을 불태운 것과 폭력 행사한 것을 사과하라”고 요구했으나 철거반원들은 사과 대신 헐거워진 결박을 풀며 박흥숙을 조롱하며 또 한번 자극한다.

분노한 박흥숙은 집에 있던 해머를 들고 그들을 공격한다. 그 자리에서 철거반장 오종환과 철거반원 이건태(30)의 머리를 때려 살해하고, 나머지 양관승(27), 윤수현(37), 김영철(31) 등 3명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후 박흥숙은 산 아래로 내려와 택시를 타고 광주 시내쪽으로 도주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기동타격대 20명을 현장에 출동시켰다. 구덩이에 쓰러져 있던 오종환과 이건태는 사망한 상태였고, 나머지 3명은 조선대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양관승과 윤수현은 치료 도중 사망했다. 김영철만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경찰은 박흥숙의 움막 뒤에서 범행 때 사용했던 것과 비슷한 길이 30cm, 직경 2cm의 사제총을 찾아냈는데, 박흥숙이 3년 전 광주에 있는 철공소에 다닐 때 호신용으로 만든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박흥숙의 어머니 심씨를 공무집행방해죄, 여동생을 살인방조 혐의로 체포한 후 박흥숙을 쫓기 시작한다.
광주시내로 내려온 박흥숙은 택시를 타고 국민은행 지점에 들어가 저금한 돈 2만700원을 찾아서 이발을 하고 옷을 사서 갈아입은 다음 여수행 기차를 탄다. 열차 안에서 해외로 나가는 배를 타는 한 남성과 대화를 나눴는데, 그가 간첩이라고 판단했다.
여수에 도착해 하룻밤을 지낸 박흥숙은 서울로 향했고, 도착해서는 곧바로 중앙정보부를 찾아가 자신이 광주 무등산에서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을 밝히며 간첩으로 의심하던 남성을 신고한다. 중정은 박씨를 체포한 후 경찰에 신병을 넘겼다.
살인과 공무집행방해, 산림법위반, 건축법위반, 총포화약류 단속법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된 박흥숙에 대해 1심 재판부는 공무집행중인 공무원 4명을 잔인하게 살해한 것과 무술을 연마한 점, 범행수단, 방법의 잔인성 등을 들어 사형을 선고했다. 박흥숙은 항소했으나 2심도 같은 판단을 내렸다.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형량에는 변함이 없었다.

광주 시민단체 등을 중심으로 각계각층에서 박흥숙에 대한 구명운동이 일어났으나 그의 사형 집행을 막지는 못했다. 수감번호 885번이던 박씨는 1980년 12월24일 오후 25살의 나이에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박씨는 죽기 전 유언장을 남겼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의 지난날을 뼈져리게 뉘우치고 저의 울분 때문에 아깝게 희생되버린 그분들의 영령을 위로하며 삼가 명복을 빈다.
나의 죄는 죽어 마땅하리다. 미친 정신병자의 개소리라 해도 좋고 빗나간 영웅심의 궤변이라 해도 좋다. 하오나 다음에는 이 같은 불상사가 되풀이되지 않는다면 죽어가는 몸으로서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방 한 칸 의지할 데가 없어서 남의 집 변소를 들여다보지 않고 남의 집 처마 밑을 들여다보지 않으신 분들이라면 지금 말씀드리는 나의 고충 조금이라도 이해하시기 어려우시리라.
나는 돼지 움막보다도 못한 보잘 것 없는 집이지만 짓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세상에 돈 많고 부유한 사람만이 이 나라 국민이고 죄 없이 가난에 떨어야 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이 나라의 국민이 아니란 말인가?
허물어진 담장을 부여잡고 울부짖는 그들을 타오르는 불길 속에 발을 동동 구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타까이 허둥대는 그들을 보라. 불쌍하지도 가엾지도 않단 말인가? 나는 움막이 있던 무등산에 묻히고 싶다.
박흥숙의 어머니는 2002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5년 3월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박우상 감독의 영화 <무등산 타잔, 박흥숙>이 개봉됐다. 박흥숙이 사망한 지 34년 만인 2014년 12월23일 광주 남구 오월어머니집에서는 그의 넋을 위로하는 진혼제가 열렸다.
박흥숙 사건은 오갈데 없는 도시 빈민의 마지막 아우성이었다. 살인행위를 옹호할 수는 없지만 아무런 대책없는 폭력적인 철거가 비극의 원인이 됐다. 이로인해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한 청년의 꿈도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박흥숙도, 그에게 죽임을 당한 4명의 철거반원들도 유신 개발독재 시대의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또 다시는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될 우리의 아픈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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