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서 실종된 후 66년 만에 빙하 속에서 발견된 과학자
남극의 거대한 얼음 틈새, 이른바 ‘크레바스’로 불리는 깊은 구덩이는 한 번 빠지면 살아 돌아오기 힘든 무덤과도 같다. 이곳에서 깊은 잠에 들었던 한 젊은 과학자가 무려 66년이라는 긴 세월을 거슬러 마침내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는 탐사 임무 중 목숨을 잃은 영국인 기상학자 데니스 팅크 벨(Dennis Tink Bell)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5세.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차가운 얼음 속에 갇혀 있던 그의 흔적이 어떻게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을까.
썰매 개들을 위해 앞장섰던 청년, 크레바스에 갇히다
벨은 당시 영국 남극연구소(BAS)의 전신 기관에 소속된 유능한 과학자였고, 2년 동안 남극에 머무는 조건으로 파견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사고가 일어난 날은 1959년 7월26일이다. 벨은 동료들과 함께 남극 대륙에서 약 120킬로미터(km) 떨어진 킹조지섬의 애드미럴티만 인근 빙하를 조사하고 있었다.
당시 탐사대의 주요 이동 수단은 썰매 개들이었다. 하지만 그날은 유독 눈이 깊게 쌓여 썰매 개들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지쳐 쓰러지기 일쑤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벨은 개들의 짐을 덜어주고 길을 안내하기 위해 직접 앞장서기로 결심했다. 그는 안전을 위해 신던 스키를 벗고 일반 부츠만 신은 채 눈밭을 걸어 나갔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눈으로 얇게 덮여 있던 크레바스를 미처 보지 못하고 순식간에 그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구덩이의 깊이는 약 30미터(m)에 달했다.

사고 직후 벨은 살아 있었다. 동료인 제프 스토크스가 구덩이 밑을 향해 소리치자 아래에서 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료들은 즉시 밧줄을 내렸고, 벨은 밑바닥에서 자신의 허리에 로프를 단단히 묶었다. 위에서 동료들과 썰매견들이 힘을 모아 밧줄을 끌어당겼다.
벨의 몸이 거의 구덩이 입구까지 올라왔을 때 예기치 못한 사고가 겹쳤다. 얼음 모서리에 몸이 걸리면서 밧줄에 강한 힘이 실렸고, 벨이 로프를 고정했던 허리띠가 그만 뚝 끊어지고 만 것이다. 벨은 다시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동료들이 다시 이름을 목놓아 불렀지만, 깊은 얼음 구덩이 밑에서는 더 이상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동료들은 추가 장비를 구하기 위해 기지로 돌아갔으나, 남극의 거센 눈폭풍이 휘몰아치면서 현장 접근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결국 동료들은 눈물을 머금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지구 온난화가 드러낸 66년 전의 흔적들
그렇게 6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영원히 얼음 속에 묻힐 것 같았던 벨의 흔적이 발견된 것은 2025년 1월19일이었다. 킹조지섬에 머물던 폴란드 탐사대가 에콜로지 빙하 근처를 지나다 우연히 얼음 표면에 흩어져 있는 유골을 발견했다.
이는 지구 온난화로 인해 남극의 얼음이 빠르게 녹아내리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수십 년 동안 얼음 두께를 유지하던 빙하 기슭이 녹아 뒤로 밀려나자, 얼음 속에 갇혀 있던 유해가 자연스럽게 지표면 밖으로 밀려 나온 것이다.
현장에서는 유골뿐만 아니라 벨이 생전에 지니고 있던 소지품 200여 점도 함께 발견됐다. 그가 차고 있던 손목시계, 어둠을 밝히던 손전등, 그리고 작은 주머니칼 등이 긴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유해 수습과 이송에는 대대적인 작전이 펼쳐졌다. 남극해를 누비는 영국의 첨단 연구선 ‘서 대이비드 애튼버러호’가 유해를 먼저 포클랜드 제도로 옮겼고, 이후 영국 공군 수송기가 동원되어 고향 런던으로 이송했다. 이어 호주에 살고 있는 벨의 남동생과 여동생의 유전자를 채취해 대조한 결과, 마침내 최종 신원이 확인됐다.

“형은 언제나 나의 영웅이었다”
호주에 살고 있는 벨의 남동생 데이비드 벨은 소식을 접하고 복받치는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형인 팅크 벨이 남극으로 떠나던 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집안의 장남이었던 형은 못 하는 게 없는, 제 인생의 영웅이었습니다. 형이 떠난 후 어머니는 평생 형의 사진을 제대로 보지 못하실 정도로 깊은 슬픔 속에 사셨습니다. 이제라도 형이 가족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어 기적만 같습니다.”
제인 프랜시스 영국 남극연구소 소장 역시 이번 발견에 대해 깊은 경의를 표했다. 프랜시스 소장은 “벨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남극 연구의 토대를 닦은 용감한 선구자였다”며 “그의 희생과 헌신은 남극 과학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벨의 유해는 고향 땅에 정식으로 안치됐다. 푸른 청춘에 멈춰 섰던 벨의 시간도 비로소 다시 흐르게 됐다.
이번 발견은 기후 변화가 남극의 얼음을 얼마나 빠르게 녹이고 있는지 보여주는 과학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인류가 초래한 지구 온난화라는 씁쓸한 현상이 역설적이게도 오랜 세월 가족을 잃고 슬픔에 잠겨 있던 이들에게는 마지막 위로를 건네준 셈이다.
차가운 얼음 감옥에서 벗어나 따뜻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젊은 과학자. 그가 남극에 남겨두고 온 미완의 연구는 이제 후배 과학자들의 손을 통해 지구의 미래를 밝히는 등불로 이어지고 있다. 거대한 흰색 장막 뒤로 해가 저무는 남극의 밤하늘 아래, 오랜 기다림 끝에 집으로 향하는 그의 마지막 발걸음은 더 이상 외롭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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